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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6년 신년 2강 (디모데전서 4:1-16)_ 이 일을 계속하라2026-01-12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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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신년 제2강


이 일을 계속하라


말씀/ 디모데전서 4:1-16

요절/ 디모데전서 4:13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로마에서 제2차 투옥되기 전, 마게도냐에서 쓴 편지입니다. 때는 AD 63년 경입니다. 디모데전서 1:3을 보면, 바울이 마게도냐로 갈 때에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의 책임자로 세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제1차 전도 여행 중에 루스드라에서 만난 사람입니다. 그는 이후 바울의 동역자요 영적 아들이 되었습니다. 이 편지를 그에게 보낼 때는 약 15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디모데의 나이가 35세 정도 되었다고 봅니다. 에베소 교회의 여러 시니어 목자들을 생각할 때 그는 연소함으로 인해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교회 내에서 거짓 교리를 퍼뜨리는 자들과 싸우느라 마음 고생도 많았습니다. 바울과 같이 믿음이 출중한 대 사도가 있었더라면 교회가 잘 다스려졌을 텐데 디모데에게는 힘든 도전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 양무리들을 어떻게 섬길지에 대해 아버지의 심정으로 이 편지를 보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사도 바울의 디모데에 대한 권면이 무엇인지, 또한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에 대한 권면이 무엇인지 배우길 기도합니다. 


1.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1절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훈하기 전에 먼저 성령께서 자기에게 밝히 말씀하신 것을 알립니다. 그것은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공동체 안에서 그런 배교의 역사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바울은 일찍이 제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밀레도에서 고별 메시지를 전할 때도 그런 말을 했었습니다. 사도행전 20:29,30 절입니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나니"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세워진 영적인 집입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 내에서도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 내에서 비성경적이고 이단적인 가르침은 성경 해석에 대한 부주의함, 오해, 학문적 오류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거기에는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볼때 우리가 참으로 경외심을 갖고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을 공부해야 함을 배웁니다. 성경은 우리가 처음으로 읽고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나만 어떤 직통계시를 받아 깜짝 놀랄만한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이전에 많은 건전한 신앙인들이 기도하며 연구하며 깨닫고 우리에게 전해 준 것입니다. 먼저 이를 잘 배우며 따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이 명확히 말하는 바를 명확하게 영접하고 명확히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가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잘 분별하여 배우고 순종하는 것은 생명과 사망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서 하나님께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2절입니다.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그런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그 양심이 화인을 맞은 것과 같습니다. 화인이라 불도장을 말합니다. 피부에 불도장을 맞으면 나중에는 아무런 감각이 없게 됩니다.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 보통 사람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낍니다. 그러나 양심에 화인을 맞는 자는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못합니다. 거짓인 것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이단 사상으로 확신있게 오염시킵니다. 


그들은 당시에 이런 주장을 했습니다. 3a절입니다.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그들은 엄격한 금욕주의를 주장했습니다. 유대교의 에세네파에서는 결혼을 금했습니다. 레위기에 규정된 대로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고 엄격한 식생활을 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보았습니다. 영은 선하고, 물질은 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육체를 가진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육신의 욕망을 부인하기 위해 결혼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식욕을 제어하기 위해서 맛있는 음식물을 먹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아주 논리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부인하고, 미혹하는 영을 좇게 할 뿐입니다. 결혼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거룩한 제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별도의 뜻이 있지 않는 한, 결혼하여 후손을 이어가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후 그 지으신 모든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모든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 


5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이 말씀을 NIV 에는 “it is consecrated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 로 되어 있습니다. 5절에서 거룩해지는 것은 사람이 거룩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음식물이 거룩해지는 것(consecrated), 곧 성별되는 것을 말합니다. 음식물이 거룩해진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요? 음식물은 물질입니다. 선하고 악함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의롭고 불의하고가 없습니다. 거룩이나 성별이라는 말의 일차적인 의미는 하나님께 속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고백하며 감사 기도합니다. 그럴 때 그 음식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하나님이 주신 것임이 선포되고 고백됨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과 기도로 음식물이 거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단에 속한 자들은 결혼이나 음식에 까다로운 규례를 주장하며,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주신 자유를 제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결혼하면 됩니다. 음식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다만 감사함으로 받으면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31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였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음식을 먹고 마심에 자유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면 되는 것입니다.


2.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바울은 이제 디모데에게 명합니다. 6절입니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얼핏 보면 이 말씀은 1-5절에서 말한 교훈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 가르침을 받는 형제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고 양육을 받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본문의 의미는 형제를 가르치는 디모데가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Teaching is learning“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경험을 보면 배우면서 배우는 것보다 가르치면서 배우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배울 때는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가르치다 보면 확실히 알게 됩니다. 또 반복하여 가르치다 보면 그 진리를 확신하게 되고, 자기 자신이 그 가르침으로 양육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부지런히 바른 교훈으로 형제를 깨우침으로, 그 형제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말씀으로 양육 받는 은혜를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7절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여기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란 NIV 에는 "godless myths and old wives tales"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old wives's tales” 라고 하니, 예전에 사랑방에서 할머니가 손주들에게 들려준 옛날 이야기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망령되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신앙의 중심에서 벗어난"이라는 뜻이고 "허탄한"은 근거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과 복음 진리에서 벗어난 사람 중심의 종교 이야기, 꾸며낸 신앙 이야기 입니다. 경건해 보이지만 복음과 무관한 주장으로 실제로는 사람의 사상, 철학을 신앙처럼 포장한 것입니다. 현대판으로 예를 들면, “어떤 신비한 것을 들었다, 보았다, 계시를 받았다”하는 것입니다. “성경과 어긋나도 체험했으니까 맞다”고 하는 주장들입니다. 또는 숫자나 상징으로 마지막 때를 계산하는 종말론 등입니다. 이런 것들은 영적인 Junk food와 같습니다.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고 잠시 재미를 주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건강하고 진지한 소원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호기심이 이끌려 미혹을 받게 합니다. 바울은 그런 것을 버리라고 합니다. 


대신 무엇을 하라고 합니까?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NIV에는 "train yourself to be godly"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godly’ 곧 하나님과 같은 성품의 사람이 되도록 훈련하라는 것입니다.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벧후1:4)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이런 경건은 실제 삶에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야고보 1:27은 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이러한 경건(godliness)은 타고난 성품이 아닙니다. 영적 훈련을 통해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훈련이라고 해서, 우리의 인간적인 열심, 노력으로 우리가 스스로 경건해질 수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에세네파 사람들은 그런 노력으로 경건에 이르고자 하였습니다. 물론 그런 노력을 통해 약간 경건에 이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사람의 내면이 변화되는 참 경건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소위 훈련한다는 것은 우리 육신의 게으름과 세속적인 욕망을 이기고, 우리 자신을 성령이 베푸시는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힘써 새벽기도, 일용할 양식, 주일 성수, 목양 훈련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자체가 우리를 경건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을 통해 우리의 육신의 연약함과 세속적인 욕망을 극복하고, 하나님이 말씀과 기도와 성도의 교제를 통해 주시는 영적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연단하라”(train)은 지속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음악가 정경화씨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분입니다. 한국 클라식 음악을 세계 무대에 올려놓은 전설적인 바이올린이스트입니다. 현재는 나이가 많으신데, 이 분의 전기를 보니, 60대가 넘어서도 하루 12시간 연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손흥민 축구 선수도 매일 고강도 훈련을 합니다. 우리는 어떤 결과적인 성공을 바라지만 결과는 평상시 훈련의 결과입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변화되는 것도 매일 매일 훈련을 통해서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좋은 습관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늘 습관적으로 하는 한 가지가 쌓여서 결판을 냅니다. 매일 드리는 새벽기도, 매일 먹는 일용할 양식, 소감 쓰기, 하나님께 먼저 드리는 물질생활, 작지만 예배 때마다 드리는 감사헌금, 주일 성수, 약속 시간 지키는 일 이 모든 것이 습관적으로 반복이 될 때 그 결과가 나타납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좋은 습관을 들여야겠습니다. 신앙에 한 방은 없습니다. 좋은 습관이 삶이 되고 인격이 됩니다. 인생의 열매가 됩니다. 


8절입니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육체의 연단에도 약간의 유익이 있습니다. 여기서 육체의 연단은 자기를 쳐 복종시켜 억지로라도 금식하고 고행하며 신앙을 고양하고자하는 모든 투쟁을 말합니다. 불교에서 스님들은 결혼을 하지 않고 금욕을 행합니다. 고기를 먹지 않고 음식을 절제합니다. 성철 스님은 약 8년 동안 생식을 했고 12년 동안 눕지를 않았습니다, 12년간 잠도 앉아서 잤습니다. 그런 것도 경건한 삶에 약간의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참된 경건, 곧 하나님의 성품을 덧입는 것은 범사에 유익합니다. “for all things!”라고 되어 있습니다. 금생과 내생에도 좋은 약속이 있습니다. 경건을 배우면 몸도 건강해집니다.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를 함으로 마음이 평안하고 즐겁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살기에 인생이 꼬이지 않습니다. 잘못된 선택을 하여 낭패를 당하며 괴로워하는 일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형통합니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잘 계산을 해 보아도 경건에 힘쓰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의 에너지와 시간을 투자할 최고의 투자처는 경건, 곧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볼 때, 경건에 비하면 세상에서의 모든 좋아 보이는 것들은 배설물에 불과하였습니다. 과거에 배설물을 모으고자 했던 미련함을 버리고 오직 가장 귀한 보물인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전력질주하였습니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바울은 이 말이 너무나 귀한 진리이기에 9절에서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이 받을만하도다!” 


그런데 경건을 위해 수고하고 힘쓰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소망을 하나님께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0절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이를 위해 수고한다는 것은 경건을 위해 수고하는 것입니다. 경건에 이르기를 힘쓰고, 경건을 가르치기를 애쓰는 일은 궁극적으로 소망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복을 누리고자 하는 소망이 있을 때 세속적으로 살지 않고 지속적으로 경건을 훈련하게됩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에 소망을 둘때 어떻게 됩니까?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합니다. (딤전6:5) 신앙생활을 통해 주님의 성품을 배우고자 하기보다 자기의 세속적인 유익을 구합니다. 교회에 나오면서 사업가는 돈을 얻고자 하고 정치가는 표를 얻고자 합니다. 세상에서 눌려 지내왔던 사람들은 자기를 과시하고자 합니다. 영광받고자 합니다. 이는 모두 몸은 교회에 있지만 그 마음은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사는 자들의 모습니다. 그래서 소망이 중요합니다. 소망이 있으면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소망이 있으면 이 땅을 거룩한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여 이 땅에서 성결하게 살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합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 애씁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진리로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을 사모하게 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게 합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그 영혼이 깨끗해집니다. 이 땅에서 힘을 다하여 경건을 추구하게 됩니다. 진리의 말씀께서 날마다 세상에 향한 우리가 눈을 돌려주시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3.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11절입니다.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Command and teach these things." 여기서 “이것들”이란 앞에서 언급한 경건에 관한 교훈입니다.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고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으니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을 훈련하라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고 합니다. 단호한 명령입니다. 목회자는 동역자들을 위로하고 사랑으로 섬겨야 하지만 언제든지 그저 좋은 권면의 말만 해서는 안됩니다. 때로 중요한 교훈에 대해서는 행하도록 분명히 명령해야 합니다.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좋은 목자입니다. 


그런데 디모데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권위 문제였습니다. 그는 에베소 성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소하였습니다. 나이 많은 시니어 목자들에게 명령하기에는 권위가 없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영적 권위는 나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12절입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영적 권위는 본이 되는 삶에서 나옵니다. 특히 무엇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합니까?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말은 그 사람의 믿음과 생각의 나타남입니다. 우리는 일시적으로는 꾸며낸 말로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그 사람의 내면이 좋은 본이 되어야 합니다. 행실도 그러합니다. 내면에 가득한 것이 행실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과 믿음과 정절 이 모든 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디모데는 꾸준히 경건에 이르도록 자신을 연단하면서 성령의 열매를 맺고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는 어떤 일에 전념해야 합니까? 13절입니다.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여기서 읽는 것은 "public reading"으로 회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성경을 낭독하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에는 성경이 귀해서 교회에 한두 권 정도만 있었기에 사람들은 낭독을 통해서만 성경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preaching, teaching 인데 설교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목회자로서 무엇보다 성경읽기와, 설교, 그리고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요 터입니다. 말씀이 토대이고 기둥입니다. 요즘에 어떤 교회에서는 프로그램 중심으로 운영합니다. 좋은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경영학적 방법으로 운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에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것들, 예를 들어 “이것을 하면 뭐가 잘 된다, 이건 성경에는 없지만 영적인 효능이 있다, 이렇게 하면 기도 응답이 직방이다“ 같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들이 창궐하게됩니다. 말씀이 중심이 되지 않으면 신비주의나 감정적인 체험을 앞세우는 미신이 자리잡습니다. 우리가 새해에는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읽고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4.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나타나게 하라

14,15절입니다.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바울은 마게도냐로 가면서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의 책임자로 세웠습니다. 딤후1:6을 보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안수할 때 하나님의 은사가 디모데에게 주어졌습니다. 14절에도 보면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로 부터 안수를 받을 때 예언을 통해 은사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디모데가 받은 은사가 무엇인가에 대해 본문은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안수한 것이나 장로들이 안수한 것은 디모데를 교회의 목회자로 공식적으로 세우는 의식 가운데 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그가 받은 은사는 어떤 신비한 능력이라기보다 목회자의 직분을 잘 감당하도록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선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예언의 말씀을 통해 받은 것이라고 한 것을 볼 때, 디모데를 공식 임명하는 안수식에서 전해진 말씀을 통해 디모데가 내적으로 얻은 내적 담대함, 용기, 성령의 충만함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그 받은 은사를 묵혀두지 말고 전심 전력하여 그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라고 합니다. 전심 전력이 무엇입니까? 온 마음, 온 힘을 말합니다. 마음 중심을 다 바쳐서 젖 먹던 힘까지 다 바쳐서 영적 성숙함을 위해 힘쓰라는 것입니다. 영적 성숙함을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겉모습만 성숙하게 보여지도록 노력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전심 전력하여 경건에 이르도록 힘쓰는 가운데 점점 성숙해져서 그러한 변화가 자연스럽게 나타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무엇보다 먼저 꾸준히 배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과 내일이 다르고 올해와 내년이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 성숙함은 앞에서 언급한 경건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일생 동안의 과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일생 동안의 영적 경주를 그의 나라에서 평가하십니다. 예수님을 잘 배우는 사람이 가장 잘 사는 사람입니다. 


16절입니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영적인 지도자는 먼저 자신과 자신의 가르침을 잘 살펴야 합니다. 내가 제대로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는가? 내가 가르치는 말씀과 교훈이 바른 것인가를 면밀히 살펴야 합니다. 마태복음 23:15를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이 얼마나 애를 씁니까?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해 얼마나 열심입니까?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닙니다. 우리는 수양회에 양들을 초청하기 위해 때때로 지방 심방을 갑니다.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탑니다. 그러나 비행기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바다를 건너가서라도 양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얻은 양들이 결국 그들보다 배나 더 악한 지옥 자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과 가르침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자신의 가르침을 살피지 않으면 신앙적 열심이 도리어 악한 결과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늘 겸손히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성찰하고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잘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에게 유익합니다. 


바울은 자신과 자신의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고 합니다. "이 일을 계속하라" 여기서 이 일은 바로 앞에서 언급한 "전심 전력하여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는"것입니다. 그런데 NIV를 보면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이 일들을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본이 되라" "읽는 것, 권하는 것,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입니다. 이 모든 일들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입니다. 그것은 영적 성숙함을 향하여 매진하는 것입니다. 특히 온 마음으로 말씀을 배우는 가운데 영적으로 날마다 진보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계속하라! 요즘은 영적인 투쟁을 해도 눈에 보이는 열매를 보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래서 쉽게 낙심이 됩니다. 열심을 냈다가도 열정이 식어집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에게도 이 일을 계속하라라고 명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부르심 받은 그 길에 서서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부르심 받은 그 길 위에서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성공입니다. 그것이 승리입니다. 우리 인생은 마라톤 경주와 같습니다. 이 경기가 다 끝나면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수고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인정해주십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시며 칭찬해주십니다. 우리가 이 상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전심 전력하여 꾸준히 영적 진보를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이 일을 계속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을 구원하고 우리에게서 듣는 양 무리들을 구원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새해를 시작하며 우리는 영적 진보를 위해 기도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 권하는 것,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경건에 이르게 하시며 전심 전력하는 가운데 우리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