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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6년 신년 3강 (누가복음 18:1-8)_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2026-01-19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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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신년 3강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말씀  누가복음 18:1-8

요절  누가복음 18: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호수 위의 백조가 점잖고 기품 있어 보입니다. 백조는 몸의 구조상 가만히 있어도 물 위에 잘 뜬다고 합니다. 하지만 흐르는 물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떠내려가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열심히 발을 저어야 합니다. 세상은 잔잔한 호수가 아닌 거세게 흐르는 강물 같습니다. 이 가운데 우리는 삶에 닥쳐오는 각종 문제와 사건의 풍파를 발버둥 치고 몸부림치며 한 해를 살아가게 됩니다. 흔들릴지언정 중심을 잃지 않고 갈팡질팡하면서도 사명인의 자리에 서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새해가 된 지 좀 지났지만 이런 인사 드리고 싶습니다. “지난 한 해도 잘 버텨 주셔서 감사합니다!” 올 한 해도 잘 버티시기 바랍니다. 


저마다의 어려움과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의 사정을 하나님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 큰 질병과 가정의 문제, 복음 역사의 난관 등을 끌어안고 적지 않은 시간을 인내해 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오랜 취업 준비로 인해 지치신 분도 있고, 취업은 하였으나 비전이 보이지 않고, 적성에 맞지 않아 답답하기도 합니다. 또 오랜 기간 진심을 드려 소원하며 기도해 왔던 일이 응답되지 않아 낙심하신 분도 있을 겁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의 삶의 의욕을 떨어지게 할 뿐 아니라 신앙조차 크게 뒤흔들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러한 우리의 아픔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확신과 소망을 주시고자 가르치신 비유입니다. 지난 한 해, 기도 응답을 받으신 분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분도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의 자리, 믿음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면, 지난 한 해는 실패한 한 해가 아니라 믿음을 지켜낸 한 해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기도를 그친 분들이 기도의 자리로 나아오고, 낙심한 마음이 소망을 얻고 일어서며, 확신 가운데 항상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1.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1-5)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여기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가르치신 ‘그들’이란 예수님의 제자들과 일부 바리새인들을 포함합니다. 오늘 이야기의 상황은 누가복음 17장 20절의 바리새인들의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재림 곧 인자의 오심이 노아의 홍수처럼 예상하지 못한 때에 올 수 있으니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심판 당시 뒤를 돌아본 롯의 처를 기억하며 소망을 항상 하나님 나라에 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또 질문합니다. “주여, 그곳이 어디입니까?” 바리새인들의 질문과 형식만 다를 뿐 똑같은 질문입니다. 이처럼 ‘어느 때’, ‘어느 곳’에 집착하는 그들에게 인자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이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을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가 인자의 오심에 대한 이야기의 마지막 대답입니다. 때문에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내가 원하는 답을 얻기 원하지만, 예수님은 만 가지가 부족해도 낙심하지 않고 항상 기도하는 삶 자체가 ‘정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낙심하지 않고 기도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사법 체계가 완벽해 보이는 헬라 시대의 어떤 도시에, 하나님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우습게 여기는 한 재판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원수에게 단단히 한이 맺힌 한 과부가 등장합니다. 사실 이 라인업만 봐도 벌써 답답하고 낙심이 됩니다. 이 재판장은 철저히 '유전무죄 무전유죄', 즉 돈이 많거나 빽이 있는 사람에게만 유리한 판결을 ‘땅! 땅! 땅!’ 선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이 도시에서 대부분의 평범한 시민들은 제대로 된 판결을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이런 재판장 앞에서는 도저히 해결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 과부는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과부는 그 재판장을 찾아가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라며 자신의 원통함을 호소합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정말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역시나 재판장은 모두가 예상했던 대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답게 그녀의 말을 듣는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요즘이야 능력 있고 당당한 과부들도 많지만, 당시의 과부는 고아와 함께 사회에서 가장 약하고 소외된 자의 대명사였습니다.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도 무시받던 계층이었기에, 재판장은 그녀를 더욱 철저히 투명 인간 취급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과부에게는 특별한 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무시무시한 무시를 '무시'하고 재판장을 자주 찾아간 것입니다. 아침에 찾아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오후에 또 나타나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재판장의 퇴근길까지 막아서며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하며 억울함을 호소하였습니다.


이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4절과 5절을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바윗덩어리처럼 꼼짝도 않던 재판장의 마음속에 거대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재판장의 마음을 무너뜨린 것은 어떤 한 방이 아니라 바로 과부가 ‘늘 와서’ 그를 괴롭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번거롭게 하다’와 ‘괴롭게 하다’라는 표현은 상대의 눈 주위를 때려 멍들게 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권투 선수가 계속 잽을 날려 상대방을 KO 시키듯, 과부는 쉬지 않고 계속 재판장을 찾아와 원한을 풀어달라며 간청하여 재판장을 항복시켰습니다. 재판장도 처음에는 과부의 간청을 코방귀를 뀌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을 겁니다. 그런데 자꾸 찾아와 부르짖으니, 그 한 맺힌 호소가 차곡차곡 쌓여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극심한 스트레스가 된 것입니다. 결국 재판장은 손을 듭니다.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 그는 자신이 가진 막강한 법적 권한을 총동원해 세상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과부의 사건 해결에 돌입합니다. 과부의 원수를 수사하고 기소해서 ‘땅! 땅! 땅!’ 확실한 유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혹시라도 판결이 미진해서 과부가 또 찾아오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다시는 발걸음 하지 않도록 아주 말끔하고 시원한 '사이다 판결'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기도의 아주 역설적인 속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사실 처음에는 '고작 과부의 간청 따위가 어떻게 그 막강한 재판장을 움직이겠어?'라는 회의적인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우리도 기도하다가 낙심할 때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나요? ‘고작 기도한다고 내 형편이 나아지겠어?’라는 일종의 영적 무력감에 빠져, 차라리 그 시간에 유튜브를 보거나 운동을 하거나 알바나 재테크를 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이야기는 그 '고작'이라는 편견을 완전히 뒤집어 버립니다. 아무 힘도 없는 과부의 간청이 기어코 그 철벽 같던 재판장에게서 정의로운 판결을 받아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에 정말 놀랍고 대단한 일은 바로 기도를 통해 일어납니다. 그 도시의 최종 결정권자가 재판장이었던 것처럼, 우리 삶과 온 세상 만물의 최종 주권자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간청하는 기도만큼 힘 있고 위대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의 '고작' 하는 기도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움직이는 시작점이 됩니다.



2. 속히 풀어 주시리라 (6-8a)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핵심적인 해석과 적용을 들려주십니다. 6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장이 속으로 내뱉은 말에 주목하십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사실 재판장은 이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속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비유 속의 과부나 도시 사람들은 이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오직 이 비유를 듣고 있는 청중들, 즉 우리만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이것을 문학적으로는 ‘기능적 방백’이라고 부릅니다. 극 중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숨은 동기를 폭로함으로써, 그 사건이 주는 메시지를 극대화하는 장치입니다. 재판장이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고 정의를 행한 동기는 신앙심 때문도 아니었고,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내가 귀찮고 번거롭다'는 지극히 사소하고 이기적인 동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강력한 도전을 받습니다. 이렇게 천박하고 이기적인 동기 때문에라도 결국 정의가 실현된다면, 하물며 공의와 사랑 그 자체이신 우리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겠느느냐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도 끈질긴 요청에 움직이는데, 우리를 사랑하시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어떻게 대하시겠습니까?


7절부터 8절 앞부분까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여기서 '택하신 자들'과 하나님의 관계는 앞서 본 과부와 재판장의 구도와는 완전히 딴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친히 선택하셨기에, 우리의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필요나 작은 어려움에도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하시는 분입니다. 얼마 전 들은 박엘리사 목자님 가정에 있었던 예화가 생각납니다. 목자님은 아파트 23층에 사시는데, 얼마 전 엘리베이터 공사 때문에 한 달간 온 가족이 계단으로 오르내리셨다고 합니다. 배달 음식은 당연히 안 되었겠죠. 그런데 어느 날 아들 요한이가 연어 샐러드가 너무 먹고 싶다고 하자, 목자님은 아들의 사사로운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음식을 받으러 그 높은 23층에서 1층까지 계단으로 다녀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육신의 부모도 자녀를 위해 이런 수고를 기꺼이 감담합니다. 하물며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시겠습니까? 더욱이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에게 맺힌 원한이 있다면 더욱더 속히 풀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고통과 신음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십니다. 불의한 재판장조차 번거롭고 괴로워서 문제를 해결해 주었는데,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의 아픔을 보실 때 그 마음이 얼마나 괴로우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십니다. 얽히고설킨 실타래처럼 아무리 복잡한 문제일지라도, 하나님의 크신 지혜는 그것을 말끔하고 시원하게 풀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신속하고 확실한 응답을 무려 세 번이나 강조하십니다.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오래 참지 않으시리라!”,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성경에서 같은 의미를 세 번이나 반복하는 것은 매우 드문 강조법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응답이 필연적이며,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100% 신뢰하라는 강력한 선언입니다.


한국 교회가 위기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옵니다. 성도 수가 줄고, 예배의 자리가 비어가며, 재정적인 어려움이 닥친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진짜 위기는 눈에 보이는 숫자의 감소가 아닙니다. 바로 기도하는 사람이 사라지고, 기도하는 시간이 메말라가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가장 심각한 위기입니다. 신앙생활에는 여러 가지 소중한 요소들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위기 앞에서 가장 먼저 포기해버리는 것이 바로 기도인 듯합니다. 어쩌면 우리 마음 한구석에서도 ‘고작 기도’해서 뭐하냐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우리가 기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리고 기도가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를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나 혼자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것을 넘어, 낙심해 있는 주변 사람들을 다시 기도의 자리로 이끄는 통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가 멈춘 시대에 기도의 불을 지피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종말과 재림에 대해 공부할 때 “속히 오리라”, “지체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접하면 종종 혼란에 빠지곤 합니다. 기도의 응답이 생각보다 늦어지고, 기다리는 고통과 아픔의 시간이 길어질 때 우리 마음엔 여지없이 낙심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속히’라는 말은 단순히 ‘짧은 시간 안에’라는 물리적인 속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드시, 틀림없이’라는 확신의 의미가 더 강합니다. 실제로 주변을 보면 아주 오랜 시간 기도하다가 응답을 받은 분들이 계십니다. 놀랍게도 그분들은 응답이 늦었다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정말 속히 응답하셨다, 정확한 때에 응답하셨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원했던 타이밍보다 훨씬 더 완벽한 ‘베스트 타이밍’에 응답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축복이 응답하는 시기가 좀 지연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기다림조차 조금도 헛되지 않게 만듭니다. 결국 기도는 ‘얼마나 빨리 응답받느냐’보다 ‘어떤 응답을 받느냐’가 훨씬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원한을 누구보다 시원하게 풀어주길 원하시고, 가장 좋은 때에 응답하길 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니 결코 포기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결론입니다. 



3.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8b)


오늘 비유는 언뜻 보면 단순히 기도 응답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에 우리의 시선을 '믿음'이라는 주제로 급선회하십니다. 8절 하반절을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당시 바리새인들과 제자들은 늘 질문했습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언제 응답하시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도대체 언제 권능으로 임하는가?" 그들은 하나님의 응답이 더디다고 생각하며 의심하거나 답답해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응답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낙심하지 않고 항상 기도하다 보면, 결국 시원하게 원한이 풀릴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겁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쪽에는 결함이 전혀 없습니다. 문제는 바로 기도하는 우리들의 '믿음'입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이 질문 속에는 하나님의 때가 올 때까지 끝까지 믿고 기다리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는 예수님의 깊은 안타까움이 담겨 있습니다. 당대 신앙의 엘리트라 자부하던 바리새인들, 그리고 누구보다 주님을 잘 따른다고 자부했던 제자들에게 이 말씀은 매우 도전적인 질문입니다. “너희에게서 진짜 믿음을 볼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마지막 날까지 '남은 자'로 서 있을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화려한 스펙이나 뛰어난 성과보다,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는 그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다시 오실 주님께서 우리에게서 가장 보고 싶어 하시는 것 또한 바로 이 믿음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간절한 기도의 응답을 기다릴 때나, 다시 오실 예수님을 소망하며 살아갈 때, 우리가 가장 행복하고 벅찬 순간은 바로 우리의 믿음을 주님께 인정받는 때일 것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그 한마디 칭찬을 듣는 것보다 더 위대하고 가치 있는 상급이 우리에게 또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며 사는가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생각할 때 우리의 신앙은 비로소 새로운 차원으로 올라섭니다. 내가 원하는 응답에만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한 주님의 마음에 시선을 맞추는 것이죠. 인자가 오실 때 보여드려야 할 그 믿음의 좋은 모델이 누가복음 앞부분에 등장합니다. 바로 시므온과 안나입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난 지 팔 일 만에 성전에 가셨을 때, 그들은 단번에 그분이 메시아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들은 거의 평생을 성전에서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를 기다려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침내 성령의 감동으로 아기 예수님을 만난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그들은 고백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이들에게는 물질적인 보상이 주어진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직 예수님을 만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격했습니다. 이제는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다고 고백할 만큼 큰 평안을 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고 싶어 하시는 믿음의 정수입니다.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세상의 불의한 재판장과 견고한 벽 앞에서 조금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항상 기도하는 모습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다면, 그 순간은 우리 인생 최고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응답보다 크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늘 그 기도의 자리를 끝까지 지켜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결론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 것”을 가르치십니다.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반드시, 그리고 속히 풀어 주실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셔서 이루실 그 나라는 죄도, 질병도, 상함도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눈물과 작은 신음 하나까지도 그곳에서는 시원하게 풀릴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그분을 믿고 기대하며 감사와 찬양으로 함께 모여 기도합시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흔들리지 않고 오직 믿음 위에 굳게 서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