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고린도전서 제9강
교회 내의 질서와 사랑
말씀 / 고린도전서 11:2-34 요절 / 고린도전서 11: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성탄과 신년 말씀 공부를 마치고 다시 고린도전서 나머지 부분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에게 보낸 질문들에 대한 답변으로 구성된 서신입니다. 고전 7:1을 보면 "너희가 쓴 편지에 대하여는.." 라고 밝히는데, 성도들이 실제로 고민하며 던진 질문들에 대해 목회적이고 성경적인 답을 주는 내용들입니다. 성도들의 질문은 그저 알고 싶은 단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사는 신자들이 일상과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근본적인 물음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그들이 문의한 것들은 결혼과 부부생활 문제, 음행 문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 공적 예배에서의 질서 문제, 그리고 애찬과 성찬을 어떻게 행할 것인가 하는 문제, 은사 문제, 사도권 문제, 그리고 부활과 연보 문제들이었습니다.
이 중에서 오늘 본문은 공적 예배에서 여자들이 너울을 쓰는 문제, 그리고 애찬과 성찬을 어떻게 행하는 것이 합당한지에 대해 답하는 내용입니다. 사실, 고린도 성도들의 모든 질문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이 주는 자유를 얻은 그리스도인은 개인의 삶과, 공동체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어떻게 자유와 책임을 행사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바울의 대답도 하나로 수렴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정신, 곧 복음 원리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두 가지 주제, 곧 여자들이 공적 예배에서 머리를 가리는 문제, 또한 애찬 문제로, 서로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모든 것을 성만찬의 정신, 곧 십자가의 원리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성만찬의 정신을 배우고 우리도 공동체 가운데 실천하기를 기도합니다.
2절입니다.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전통을 전해주었었습니다. 여기서 '전통'은, 원어에 가까운 번역인 KJV 과 NAS 성경에는 각각 "Ordinance", "Tradition"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이 교회 내에서 마땅히 행할 규범을 말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이 전해준 전통을 대체로 잘 지켰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들을 칭찬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본문에서는 그것을 명확히 이슈화하여 말하고 시작하지는 않고 있지만, 그 문제는 바로 교회 내에서 어떤 자매님들이 무질서하게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이 주는 자유를 추구하는 가운데 기존의 관습을 깨뜨리고 있었습니다. 공예배 때 머리에 너울을 쓰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개신교 교회에서는 그런 경우가 없지만, 이단으로 알려진 '안상홍 증인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지금도 공예배 때 여자들이 머리에 너울을 씁니다. 카톨릭에서도 너울을 쓰다가, 1983년에 교회법을 개정하면서 이를 폐지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본문에서 여자들이 너울을 쓰도록 한 것은 고린도 교회의 특수한 정황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고린도는 로마 제국 내에서도 대표적으로 음란한 우상 숭배 도시였습니다. 아크로고린도 정상에 있던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1,000명의 여사제가 제사 의식의 일환으로 음행을 행하였습니다. 항구 도시로 급진적인 자유주의적인 사상에 쉽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당시 로마 제국의 여인들은 공적인 자리에서 너울을 썼습니다. 이는 여자들이 남자의 권위 아래 있음을 나타내는 조신함과 정숙함의 표현이었습니다. 교양 있는 여인들은 너울을 쓰지 않고는 외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행실이 부도덕한 여자들이나 창녀들은 머리를 가리지 않았고 짧게 잘랐습니다. 따라서 당시에 너울을 쓰고 공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고상하고 품위 있는 관습이었습니다. 당시에 남녀는 불평등하였고, 노예 제도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귀족이나 평민이나, 자유인이나 노예나, 남자나 여자나 다 존중을 받고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러자 일부 자매님들이 "모두 평등한데 왜 여자들만 머리에 너울을 써야 하는가? 나는 남자들보다 기도나 예언을 더 잘하는데 왜 머리를 길게 길러야 하는가?" 하는 불만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런 불만이 생기자 너울을 쓰는 것이 속박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3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머리는 온몸을 대표하는 사령탑입니다. 모든 일을 계획하고 방향을 잡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머리와 몸이라는 유기적인 질서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입니다. 물론 이는 우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는 동등합니다. 단, 가정에 질서가 있고 역할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제가 예전에 큰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간 적이 있습니다. 배를 운전하는 Bridge 에는 선장과 항해사가 있습니다. 그들은 멀리서 바라보며 배의 방향을 잡습니다. 한편, 기관장과 기관사는 배 밑의 엔진룸에 들어가 일합니다. 그들은 거대한 엔진이 아무 문제 없이 움직이도록 관리합니다. 배에서 선장과 기관장은 동급이고, 1항사와 1기사가 동급입니다. 동등하나 역할이 다릅니다. 같이 동역하므로 큰 배가 안전하게 바다 위를 다닙니다. 우리 몸도 그렇지 않습니까? 저마다 머리가 되고자 하면 팔이나 다리 역할은 누가 하겠습니까? 팔다리가 없고 머리만 있다면 얼마나 기괴하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은 남녀의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그 질서를 존중히 여겨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이 나도 잘 되고 전체 몸도 잘 되게 하는 길입니다.
또한 남자는 자기가 머리라고 해서 마음대로 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머리 되신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셨듯이, 남자는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 철저히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그릇된 권위 의식으로, 남편이 그리스도에게 순종하지 않으면서 아내를 억압함으로 좋지 않은 가부장적인 행태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 권위를 행사하는 방식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목숨을 주기까지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남편은 자기 목숨을 주기까지 아내를 사랑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남편이 가정의 모든 어려운 십자가를 먼저 지는 것입니다. 모든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머리로서 아내를 다스리고 가정을 다스린다는 의미입니다.
7~10절입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여자가 머리에 너울을 쓰는 문제를 도우면서, 이를 계기로 더 나아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먼저 남자를 창조하시고 돕는 배필로 여자를 지으셨습니다. 요즘에 여자가 남자를 위해 지음받았다는 말을 하면 완전히 꼰대 취급을 받습니다. 서양에서는 이런 남녀 차별적인 말을 하는 것 자체가 금기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한 질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를 말해야합니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이는 남녀의 우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와 역할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1,12 절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남녀는 동등합니다. 모두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기초와 기둥이 서로 동역하여 건물을 세우듯이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합심 동역하여 가정을 세우는 존재들입니다.
바울 당시 공예배에서 남자들은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여자들은 머리에 너울을 쓰고 드렸습니다. 그것이 로마 사회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남자가 그 머리에 너울을 쓰고 기도하거나 예언한다면 그것은 그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남자는 오직 그리스도 외에는 자기 위에 아무도 없는 자임을 알고 당당하고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반대로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것은 그 머리인 남자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여자는 그 위에 남자가 있음을 표시함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존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에서 긴 머리는 여자의 아름다움과 교양을 드러내었습니다. 남자처럼 머리를 짧게 하는 것은 행실이 정숙하지 않은 여자, 심지어 매춘부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공예배때 여자들이 그렇게 한다면 같이 예배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은 불편을 느낄 것입니다. 외부 사람들도 "아, 교회에 나가는 여자들은 행실이 좋지 않구나"하며 오해하게 됩니다. 그들을 전도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여자들은 너울을 쓰라고 하는 것은 이미 시행되고 있는 그 지역의 관습이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지 않을 때 그 관습을 인정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믿지 않는 사람들도 복음에 대한 거부감을 갖지 않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교양 있는 시민으로 인정하고, 그들의 전도를 받아들입니다. (딤전2:2) 복음의 자유가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요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영적인 질서를 지키고 다른 사람을 배려함으로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17절부터는 애찬과 성찬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당시 초대 교회에서는 주일예배 후 애찬과 성찬을 했습니다. 애찬을 먼저 한 후에 성만찬 의식을 행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성만찬 의식을 제정하실 때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마26:26, 막14:22) 애찬은 신자들의 공동식사를 의미합니다. 주일예배가 끝나면 각자가 준비해온 음식을 같이 나누어 먹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먹거리가 풍부합니다. 그러나 30~40년 전만 해도 먹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밥을 굶기도 했습니다. 쌀이 귀했기에 떡을 먹는 것은 최고의 잔치였습니다. 고기는 거의 없고 소가 지나간 것 같은 국물이었지만, 1년에 한 두번 명절 때나 고깃국을 먹었습니다. 2천 년전, 교회에서의 공동식사는 그야말로 가난한 자들이 모처럼 배불리 먹을 수 있는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부유한 형제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맛있는 음식을 풍성히 준비해왔습니다. 가난한 형제들은 간단한 것을 가져오기도 하고, 종들은 빈손으로 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빈 들에서 무리들이 예수님의 오병이어로 풍성히 먹은 것 같이, 모두들 같이 나누어 풍성히 먹었습니다. 베푼 자는 베풀어서 기쁘고 가난한 자들은 사랑의 섬김을 받아서 기뻤습니다. 한 마디로 사랑의 식탁, 애찬이었습니다. A love feast!
그런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20, 21절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다 모이면 같이 기도하고 먹지 않고, 먼저 온 사람들은 그냥 배고프다고 자기들이 준비해 온 것을 먼저 먹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부유한 자들이었습니다. 하층민이나 종들은 일하다가 늦게 오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보통 아무 음식도 가져오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조금 늦게 교회에 도착하면 몹시 배가 고픈데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반면에 부자들은 배가 불러서 늘어져 있었고 포도주에 취해 있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늦게 온 사람에게 책임이 있으니 어쩔수 없다고 말하는 자들도 있었고, 그렇게 말하지 않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먹는 문제로 인해 그들 가운데 분쟁과 파당도 생겼습니다. 결국 애찬이 교회에 덕이 되지 않고 오히려 해가 되었습니다. '주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만찬'을 먹는 그저 먹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어떻게 책망합니까? 22절입니다.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사랑의 식탁이 이기심의 식탁이 되었습니다. 분열과 파당의 식탁이 되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더욱 열등감과 굴욕감을 느꼈습니다. 이런 분위기 가운데 애찬 후에 성만찬 의식을 행할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성만찬을 제정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23~25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성만찬 의식은 주께 받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만든 의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것이요, 사도들을 통해서 전승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잡히시던 전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나누셨습니다. 그때 유월절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24).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최후의 만찬 그 다음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게 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통해서 자신이 왜 죽으시는지 그 영적 의미가 무엇인지 깨우쳐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눅22:15) 성만찬에서 떡을 떼는 행위는 예수님이 자기 몸을 찢으시는 것을 상징합니다.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몸을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잔을 마시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흘리신 그 피를, 우리가 받음으로 죄사함을 누리는 것을 상징합니다.
25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는 말은 모세가 짐승의 피로 세운 언약과 대조되는 말입니다(출 24:8). 예수님은 짐승의 피가 아니라 자신의 피로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맺은 언약이기에 그 효력이 완전하고 영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는 자들의 죄를 완전히 사하시고,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십니다. 이는 우리의 행위를 근거로 세우신 언약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죄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언약입니다. 우리가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새 언약의 백성으로서 감사함으로 그 은혜의 축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행하여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24절에서도, 25절에서도 "기념하라"고 반복하여 명령하십니다. 기념하라는 것은 단순히 기억하라가 아닙니다. 기억하고 그 정신, 곧 예수님이 자신의 살과 피를 내주어 죄인된 우리를 구원해주신 그 정신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지키면서 자녀들에게 매년 출애굽 사건을 상기시키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구속의 은혜를 기억하며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처럼 성만찬을 통하여도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유월절 규례를 대대로 기념하여 지키라고 하신 것과 같이 (출 12:14) 우리는 성만찬 의식을 행하며 그의 죽으심을 대대로 기념해야 합니다. 꼭 의식을 행하지는 않더라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그 정신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열정과 헌신은 주님의 희생에 대한 감사함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는 것은 우리의 열심으로 구원에 이루고자 함이 아닙니다. 아무런 잘 한 것도 없는데, 한 것이라고는 죄 지은 것 밖에 없는데, 이런 나를 대신하여 피 흘려 죽으사 나를 구원해주신 그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기에 열심이 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놀라운 은혜를 깊이 깨닫고 기억하며 그 은혜 가운데 사는 자들의 마음은 뜨겁습니다. 어찌하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딤전 1:13-15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는 죄인 중의 괴수인 자신을 대신하여 피 흘리신 예수님의 은혜를 잠시라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였습니다. 그 사랑의 표현으로 온갖 박해를 무릅쓰고 복음 역사를 섬겼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순교하였습니다. 그는 일생 동안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죽으심을 언제까지 기념해야 합니까?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바울은 성만찬을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예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전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말로 전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만찬을 통해 전하는 것입니다.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재현하는 것, 보이는 복음입니다. 교회사를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이 거의 사라진 시대에도 주의 만찬은 계속되어 왔습니다. 성만찬을 통해서 너무나 명확한 복음을 재현함으로서 기독교의 복음 진리가 변질되지 않고 지금까지 지켜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성만찬을 일 년에 한두 번씩 하는 교회도 있고, 또 자주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횟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본래의 의미를 깊이 새기며 기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만찬의 의식을 자주 하지는 않아도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늘 새롭게 하며 그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27절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성만찬은 거룩한 예식입니다. 상징이기는 하지만 거룩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으신 사건을 기념하는 의식입니다. 성자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고난받고 죽으신 이 사건은 우리에게는 큰 은혜이지만, 주님이 친히 큰 고통과 희생을 당하신 사건입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 우리가 가볍게 이를 기념할 수는 없습니다.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먼저 자기를 성찰해야 합니다. 영원한 심판을 받아 마땅할 나를 대신하여 피흘리신 예수님께 대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생각하며 나의 죄를 회개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자 하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회개와 결단의 마음이 성찬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기억과 감사가 없이 그저 예식이니까 참여하는 것은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됩니다. 당시에 자기를 성찰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몸이 허약한 자와 병든 자들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와 같이 징계하신 것은 선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징계를 받음으로 회개하고 장차 영원한 심판을 받지 않도록 함이었습니다.
이상과 같이 바울이 예수님이 제정하신 성만찬에 대해 자세히 기술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33절입니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조금 늦게 오는 사람들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기다렸다가 다 모이면 함께 애찬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만찬의 정신, 곧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성만찬과 같이 중대한 말씀을 할 때 우리는 어떤 큰 믿음의 결단을 해야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성만찬 교훈의 결론은 "서로 기다리라"입니다. 우리의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은 실제 생활에서 이웃에 대한 태도로 나타나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6절은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우리의 주님께 대한 믿음은 까다로운 규칙을 지키거나 종교적 열심을 내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보는 바 그 형제를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요일 4:20)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 기만이요 합리화입니다. 믿음이 좋다, 영적으로 성숙하다라는 것은 자기 확신과 열심이 강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실생활에서 이웃에게 더욱 겸손하고 친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나누며 구체적인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앞부분 말씀처럼 다른 사람을 배려하여 교회 내의 영적 질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서로 기다리며 애찬을 같이 하여 가난한 자들, 낮은 자들이 열등감을 느끼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배려하고 나누고 섬김으로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것, 그것이 사랑이요 영적 성숙이요, 예수님의 성만찬의 정신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만찬의 정신은 나눔과 희생입니다.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공동체 안에서 실제적으로 나타남이 마땅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믿음이요 죽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늘 주님의 희생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기념하기를 기도합니다.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욱 실천하며 교회를 세워가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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