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고린도전서 제 10 강
한 성령, 다양한 은사
말씀 / 고린도전서 12:1-31 요절 / 고린도전서 12: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는 말을 들을 때 어떤 장면을 떠올립니까? 뜨거운 찬양, 눈물의 기도, 가슴 벅찬 감동, 혹은 어떤 특별한 체험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분명 성령의 역사 가운데 나타날 수 있는 열매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그것이 정말 성령의 역사인가?”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가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말씀도 있었고, 다양한 은사가 넘쳤고, 신비로운 체험도 많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을 향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다”(고전1:7)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은사가 넘쳤지만, 교회에는 평안이 없었습니다. 비교와 자랑, 시기와 분쟁이 가득하였습니다. 마치 한 가족이 모두 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는데 서로를 인정하지 못해 식탁에서 늘 다투는 그런 모습과 같았습니다.
이러한 문제 앞에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부터 14장까지, 세 장에 걸쳐 성령의 은사와 교회의 하나 됨에 대해 깊이 가르칩니다. 12장은 은사의 본질을, 14장은 방언과 예언의 질서를, 그리고 그 한 가운데 위치한 13장은 모든 은사를 꿰뚫는 사랑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한 성령께서 다양한 은사를 주시는데, 그 목적이 무엇이며 그 은사들이 어떻게 교회의 하나 됨을 이루는지 알려줍니다. 특히 ‘다양성’과 ‘통일성’에 맞추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참된 성령의 역사는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과거를 상기시킵니다.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2절) 그들은 과거 아데미 여신 앞에서 제사 의식을 행하였고 황홀경에 빠지는 신비한 체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우상과 귀신의 역사였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신비하고 강렬하다고 해서 반드시 성령의 역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면 무엇이 기준입니까? 3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의 가장 분명하고 결정적인 표지는 단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게 하는가? ‘주’라는 고백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당시 로마 제국에서 ‘주’는 황제에게만 사용되던 표현이었습니다.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름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는 나의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주권자로 인정하고, 내 인생을 그분께 맡기겠다는 신앙의 선언입니다. 예수님이 주가 되신 이유는 십자가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히 순종하여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외치는 자기 사랑하는 아들의 외침을 외면하셨습니다. 대신 형벌을 받도록 내 버려두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태어나심부터 예수님의 사역 전반에 걸쳐 동행하셨던 성령 하나님은 그때 무엇을 하셨습니까? 증인으로서 지켜보셨습니다. 십자가 사건에서 삼위 하나님의 역할을 요약하면 성자는 순종하셨고, 성부는 외면하셨고, 성령은 증인이 되셨습니다. 이러한 역할을 통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오실 성령에 대해 제자들에게 요한복음 16장 13,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또한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성령의 핵심 사역은 예수님의 주 되심을 증거하고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여 우리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케 하시고, 우리를 새 피조물로 태어나게 하십니다. 새 인류의 대표,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성장케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 하나님은 구원얻은 우리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성령의 능력과 은사들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역은 언제나 예수님을 높이고, 십자가를 증거하며,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열매로 나타납니다. 신비한 체험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로 이끌지 않는다면,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의 열매가 없다면 우리는 반드시 분별해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모든 신비한 경험이 곧바로 성령의 역사라고 단정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겪었던 경험을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초등학생 시절, 저는 우연히 아무도 없는 성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청아한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는 듯 하였습니다. “재승아~” 두 세 차례 더 불리어졌습니다. 저는 너무 놀라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매우 신비했고, 분명히 기억에 남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은 저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끌지 않았고, 복음에 대한 믿음으로 연결되지도 않았습니다. 반면, 대학 시절 인생의 무의미와 허무가운데서 방황하고 있던 제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때의 감동은 제 감정에만 머물지 않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게 했습니다. 제 삶의 방향을 ‘주님을 배우며 주님을 위해 살리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두 경험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4-6절을 통해 매우 놀라운 구조(깊이 있는 신학적 구조)를 보여 줍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여기서 반복되는 단어는 ‘여러 가지’와 ‘같고’입니다. 은사와 직분과 사역은 여러 가지, 즉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사의 근원은 성령이시며, 직분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모든 사역을 이루시는 분은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다양성 가운데 통일성을 이룹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다양성’과 ‘통일성’이 무엇일까요? 다양성은 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 하늘의 통일성을 바탕으로 지상의 다양성을 만드셨습니다.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속에는 확산과 다양성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자연 속의 모든 생명체는 서로 의존하며 살아가도록 설계하셨습니다. 인간도 획일적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서로 다른 모습과 역할 속에서 관계를 이루며 살아가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에서 ‘다양성’을 거부하고 ‘획일성’을 선택했습니다.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인간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다양성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이름을 중심에 둔 통일을 추구하였습니다. 그 결과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졌습니다. 랍비 전통에 의하면, 바벨탑을 쌓다가 사람이 떨어져 죽으면 애도하지 않다가도 벽돌 한 장이 떨어져 깨지면 “아이고~, 언제 다시 벽돌을 만들어 이곳까지 옮길꼬!”하며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인간의 생명이 벽돌 한장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습니다. 획일성과 효율성이 인간 생명보다 더 우선시될 때 이런 비극이 일어납니다. ‘하나의 언어, 하나의 생각’ 여기에는 단순한 소통의 편리함을 넘어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사고와 동일한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전체주의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는 현대 역사 속에서 나치즘의 사례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히틀러와 나치는 절대적 진리와 획일적 이데올로기로 국민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그들은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였고 유대인들을 박해하고 말살하고자 하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결국 나치 독일은 몰락했고, ‘몰락’이라는 영화에서 히틀러와 참모들은 서로 총을 싸서 최후를 맞이하는데, 이는 비극적 결말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바벨탑 사건속에서 하나님은 획일성을 막기위해 언어를 흩으셨습니다. 이는 심판이면서 동시에 은혜였습니다. 인간을 다시 창조 본연의 자리로 돌려놓으신 ‘은혜의 흩으심’이었습니다. 성경적 통일성은 모두가 똑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이 사랑 안에서 자발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땅의 수많은 ‘다름’이 하늘의 ‘한 분’을 예배함으로 고차원적 연합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계획입니다.
그러면 은사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7절은 읽겠습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은사는 개인의 영적 수준을 과시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살리고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바울은 8-11절에서 은사들을 나열합니다. 읽겠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은사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 말씀의 은사입니다. 지혜(σοφία소피아)의 말씀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가진 은사로 성경을 올바로 주해하고 해석하는 능력입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주신 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식(γνῶσις그노시스)의 말씀은 복음의 요지를 잘 이해하고 파악하여 잘 가르쳐주는 능력입니다. 교사들에게 주신 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특별한 믿음의 능력에 관한 은사입니다. ‘믿음’의 은사는 믿기 힘든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바로봄으로 성취합니다. ‘병고치는 은사’는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하고 치유해 줍니다. ‘능력 행함’은 귀신을 쫓아낸다든지, 어려운 상황을 반전시켜 일이 성취되게 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초자연적인 능력 행함도 여기에 속합니다. 예를 들면, 바울이 에베소에서 2년 동안 두란노서원에서 날마다 말씀을 강론할 때,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간 사건이 여기에 해당됩니다.(행19:12) ‘예언(προφητεία프로페테이아)’은 기본 의미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사람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더불어서 ‘그 사람에 대해, 그 사람의 미래에 대해 말해주는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 가고자 할 때 가이사랴에서 아가보 선지자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되어 이방인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예언을 합니다(행21:11). 우리는 ‘예언’과 ‘설교’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언은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께서 지금 이 공동체에 하시는 말씀을 선포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런데 주어진 말씀을 벗어나면 안됩니다. 설교는 이미 계시된 성경 말씀을 해석하고 설명하여 적용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영들 분별함’입니다. 이것이 정말 성령의 역사인지, 아니면 개인의 생각인지, 감정인지, 또 성경에 부합한지, 교회를 세우기 위함인지, 아니면 분열시키는 것인지, 교만인지를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예언’은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되고, 분별해야 합니다.
셋째는 방언 말함과 방언들 통역함입니다. 방언은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기 위해 주신 신령한 언어를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늘의 언어’라고도 합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은사들이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성전을 건축할 때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같이 무엇을 잘 만드는 은사도 있고 (정다윗, 윤보현목자가 여기에 해당), 아삽과 같이 찬양과 악기를 잘 다루는 은사 (임여호수아, 신은미목자가 해당)도 있습니다. 어제 우리 종로 청년 대학생들이 찬양 댄싱을 했는데, 모두 잘하였습니다. 강가일목자는 프로급 수준이었습니다. 요즈음 교회에서 상담학이 중요하게 떠오르고 있는데, 상담을 잘 해주는 은사를 가진 분도 있습니다. 섬기는 은사, 잘 들어주는 은사, 어떤 모임이든 잘 참여하는 은사, 잘 웃어주고 맞장구를 잘 쳐주는 은사, 예배후에 메시지 잘 전했다고 칭찬해 주는 은사, 교제를 잘해주는 은사등, 수많은 은사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은사들이 있습니까? 저는 저의 은사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 가지가 생각났습니다. 그중에 몇 가지를 이야기하면, 말씀을 학자적 자세로 탐구하고 연구하는 은사가 있습니다. 말씀을 볼 때, 자료들을 찾아보고 관련 구절들을 세세히 찾아봅니다. 그리고 암송합니다. 이것이 저의 즐거움입니다. 또 긍휼히 여기는 은사가 있습니다. 병든 사람, 나이든 사람, 신체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보면 왠지 측은하고 돕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랜 기간 치과에서 장애인 무료 진료 사업을 하였고, 지금도 찾아오시는 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몇가지 생각나는 은사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많은 은사가 있는 줄 압니다. 성령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여러 다양한 은사들을 소중히 여기고, 이것들이 교회에서 잘 쓰임받도록 개발하고,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바울은 여러 다양한 은사들을 설명하고 난 후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11절을 읽겠습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모든 은사의 주권은 성령께 있습니다. 한 성령께서 그 뜻대로 나누어 주셨습니다. 마치 퍼즐 조각과 같습니다. 퍼즐 조각이 홀로 있을 때는 필요 없어 보일지라도, 맞추면 아름다운 그림이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서로 비교할 이유도, 자랑할 이유도 없습니다. 대신 각자 받은 은사로 몸을 섬길 책임이 주어졌습니다.
12,13절을 읽겠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표현합니다. ‘무대’가 아니라 ‘몸’입니다. 무대는 경쟁의 장소입니다. 반면 몸은 생명 공동체입니다. 몸은 신경계, 면역계, 호르몬계, 근골격계, 순환계, 비뇨 생식계등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기 역할은 다르지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상호 의존적입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머리, 팔, 다리, 손, 눈, 코, 귀등 여러 다양한 지체들이 각기 역할을 하면서 통일성을 이룹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 헬라인, 종, 자유인등 각기 다른 인종, 다른 신분이지만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성령을 따라 각기 다른 역할을 하지만 성령의 지시를 받아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모든 지체는 다양하며 모두가 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만약 각 지체가 서로를 비교하면서 열등감을 갖든다든지, 우월의식을 갖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바울은 그 이야기를 14절부터 21절까지에서 합니다.
손과 발은 우리 몸에서 가장 활발하게 일하는 지체입니다. 손이 하는 일을 참으로 다양합니다. 손으로 자기 몸을 꾸미기도 하고, 핸드폰을 하고, 재미있는 게임도 합니다.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집어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손을 소중히 여깁니다. 핸드 크림도 발라주고 네일 샵에 가서 예쁘게 손질도 하고, 잘 관리해 줍니다. 반면 발은 어떻습니까? 온 몸을 지탱해 줍니다. 몸을 이동시켜 줍니다. 걷기도 하고 급할 때는 뛰기도 합니다. 필요한 경우 시궁창에 들어가기도 하고, 건강을 위해 맨발로 황토 길을 걷기도 합니다. 그런데 발은 손에 비하면 그리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 손은 자주 씻어주지만 발은 냄새 날 때까지 있다가 겨우 하루에 한 번 씻어줍니다. 손이 글씨를 썼는데 잘 쓰지 못하면 “너는 글씨를 발로 썼냐?”하며 애매히 고난받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내가 손이 아니라 발이라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못해 먹겠다.”하며 몸에서 떨어져 나가겠습니까?
자, 이번에는 내가 발이 아니라 머리가 되었습니다. 이때 머리인 내가 저기 별 볼일 없어 보이는 발더러 “넌 하등 도움이 안돼” 무시하면 어떻게 될까요? 요즘 I’am boxer 란 예능 프로그램이 있는데, 쇼츠로 본 적이 있습니다. 권투에서는 발의 움직임이 정말 중요하다고 합니다. 발 움직임이 좋으면 맞지 않고 때리는 권투가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발이 멈추면 권투도 멈춘다’고 합니다. 그런데 상대방의 주먹, 원투 스트레이트, 어퍼컷이 날라오는데, 발이 머리로부터 받은 무시와 상처 때문에 의기 소침해져서 안 움직인다면 어떻게 됩니까? 얼굴이 가격당하고 턱을 맞아 다운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한 지체라도 아프면 온몸이 고통을 받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비교와 열등감, 우월의식은 공동체 전체를 병들게 합니다.
민성은 사모님은 아름다움을 창조해 내는 ‘손’을 가지고 계셔서 그림을 잘 그립니다. 자주 상을 받습니다. 그런데 상을 누가 받나요? ‘상장- 민성은 사모님 손’ 이렇게 하지 않잖습니까? 민성은 사모님이 받습니다. 온몸이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도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온몸이 영광을 받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의 모든 설명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27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연합된 생명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각 지체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소중합니다. “나는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내가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도 소중합니다. 내가 이 교회에 있어야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이 교회에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우리 함께 따라해 보겠습니다. “나는 교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다”, “당신도 꼭 필요합니다” 아멘~ 올해 종로2부는 청년 대학생 제자 양성을 위해 기도하며, 여기에 힘을 쓰고자 합니다. 오늘 청년 대학생 수양회가 끝나는데, 그들이 많은 은혜를 받은 줄로 압니다. 수양회 이후 이들이 모임 안에 잘 담기고, 주님의 제자로 성장하도록 기도로, 섬김으로, 다양한 은사들로 여기 계신 목자님들이 동역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31절입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보이리라” 바울이 말하는 가장 좋은 길, 가장 큰 은사는 사랑입니다(13장). 사랑이 없는 은사는 소음에 불과합니다. 사랑 안에서 사용될 때, 은사는 교회를 살리는 능력이 됩니다.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획일성이 아니라 다양성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다양성이 한 성령 안에서 통일을 이루길 원하십니다. 특히 우리 각 자에게 주신 은사는 모두 다 다르지만 모두 귀하며, 모두 교회를 위해 사용하라고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와 직분에 감사하며, 사랑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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