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고린도전서 제 11 강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말씀 / 고린도전서 13:1-13 요절 / 고린도전서 13: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이 “사랑의 찬가”, 얼마나 감미롭고 아름답습니까? 결혼식 때 특송으로 많이 부릅니다. 어떤 집에 가 보면 이 사랑장을 액자로 걸어놓고 있습니다. 참 좋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 말씀을 잘 묵상해 보면, 우리가 이러한 사랑을 실천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너무나 높은 수준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 말씀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이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말씀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입장에서는 아주 은혜가 많은 말씀입니다. 받기만 하면 되니까요. 또한 이 말씀은 원래 이제 막 결혼하는 젊은 부부를 축복하기 위해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 자랑과 시기와 갈등으로 무질서하게 된 고린도 교회 공동체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말은 부드럽지만 엄한 책망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도 고린도 교회와 같은 영적인 문제들을 갖고 있습니다. 실상 세상의 모든 교회가 그러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참 사랑이 무엇인가 배우고 그 사랑으로 교회의 덕을 세우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이 가장 중요한 덕목임을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1절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지난 시간에 언급하였듯이, 고린도전서에서 은사에 대해 말하는 장이 12장과 14장입니다. 사도 바울은 12장에서 영적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에 대해 말했습니다. 14장에서는 방언과 예언의 은사에 대해 말합니다. 12장과 14장을 바로 연결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특히 고린도교회의 뜨거운 감자와 같은 방언 문제를 다루기 전에 일부러 오늘 본문인 13장을 끼워 넣었습니다. 사랑의 중요성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도 바울의 의도가 보입니다. 그가 첫 번째 언급하는 말이 방언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방언에 대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방언이란 "tongues of men"으로 유창한 말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에서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인기였습니다. 기원전 4세기 아테네의 정치가 데모스테네스는 당대 최고의 웅변가였습니다. 그는 세 치의 혀로 세상을 움직인 사람이라고 불립니다. 로마의 키케로도 그런 웅변가였습니다. 당시에는 말 잘하는 것이 출세의 길이었고 수사학이 최고의 인기 학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데모스테네스나 키케로와 같은 탁월한 언변이 있다 하더라도! 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더 나아가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라고 합니다. 천사의 말은 한마디로 일체의 죄와 악이 없는 말입니다. 속한 것이나 천박한 것이나 추한 것이 전혀 없는 천상의 말입니다. 이와 같이 말을 잘하는 분들을 보면 아, 나도 저렇게 말을 잘하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바울은 무엇이라 합니까?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여기서 구리는 ‘gong’으로 ‘징’을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예전에는 굿을 많이 했습니다. 무당이 굿을 하는 동안 징을 칩니다. 소리가 아주 큽니다. 농악 하는 것을 보면 꽹과리를 칩니다. 징이나 꽹과리는 처음에는 듣기 괜찮은데 계속 듣다 보면 귀가 아픕니다. 음의 높낮이가 없어 지루하게 들립니다. 이와 같이 아무리 말을 청산유수처럼 잘해도 사랑이 없으면 그런 소음과 같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는 방언의 은사가 풍부했습니다. 그러나 방언을 잘 한다고 자기 자랑만 하였습니다. 그 은사로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2절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예언하는 능력은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아는 능력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까지 꿰뚫어 보는 능력입니다. 이러한 능력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시대의 수퍼스타가 될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믿음에 대해 말합니다.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우리 신앙생활에 믿음이 얼마나 귀합니까? 신자에게는 믿음이 필수적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길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믿음은 얼마나 대단합니까? 히11:33 을 보면 믿음의 영웅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이런 믿음의 사람들은 그 시대의 영웅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가 그런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라고 말합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가 NIV에 보면 “nothing”입니다. 사람을 칭하는 ‘nobody’도 아니고 물건을 칭하는 ‘nothing’입니다. 아무리 존재 의미가 없어도 사람은 존귀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랑이 없으면 자기는 사람도 못되고 먼지나 돌 같은 물건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상을 보면 바울이 너무 극단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것이 아무 것도 아니면, 그래도 적어도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남을 위해 희생한다면, 그런 것은 아무 것이겠지, 의미가 있는 것이겠지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3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조선시대 후기 제주도에 김만덕이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사업으로 자수성가한 분입니다. 그런데 1795년 제주도에 대기근이 들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었습니다. 이때 그녀는 자기의 전 재산을 들여 육지에서 쌀을 들여와 굶주린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정조 임금이 이를 알고 포상하려 했으나 정중히 거절하였습니다. 헌신적으로 구제를 실천한 분이십니다. 또한 우리나라의 장기려 박사님은 한국전쟁 후 무의촌, 빈민을 위해 평생 무료 진료를 베푸셨습니다. 자신의 월급, 연금, 집까지도 모두 드려 환자들을 섬겼습니다. 김만덕, 장기려 이런 분들은 물론 사랑으로 구제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만일 사랑의 동기로 한 것이 아니라면, 그런 구제와 헌신을 해도, 설사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이 없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이 없이 구제하고 심지어 자기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하는 것은 어떤 경우일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예, 그런 경우가 있죠. 예를 들어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 구제합니다. 어떤 상을 받기 위해 합니다. 또는 정의감 때문에, 때로는 이념 때문에 분신하기도 합니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상을 볼 때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하느냐? 무슨 동기로 하느냐?”가 중요함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목양을 합니다. 역사를 섬깁니다. 열심히 해야 하지만 먼저 왜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역사를 열심히 섬기는 것도 그 마음에 하나님과 양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있을 때 오랫동안 열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더욱 더 헌신적이 될 수 있습니다. 단지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 자기 역사를 키워 영광 받기 위해서라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헛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에게 말씀하시는 문맥에서 보면 방언을 아무리 잘하더라도 사랑의 동기가 아니면 헛짓을 하는 것입니다. 잠시의 자아도취가 있을 수 있지만 교회에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상도 없는 것입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이 선거 때 사용했던 문구가 있습니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It's the economy, stupid.) 바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바보야, 문제는 사랑이야! 우리가 능력있는 목자가 되기보다 먼저 사랑있는 목자가 되어야 함을 배웁니다.
저는 예전에 이 말씀을 공부했을 때 그냥 사랑장의 아름다운 구절 정도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성경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 마디라도 성경 어디에 있으면 불변의 진리입니다. 이번에 본문을 다시 묵상하면서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아무 유익이 없다”는 말씀이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아, 정말 그렇구나! 사랑의 동기로, 사랑 때문에 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구나! 별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한다면, 나의 이름과 명예를 위해 한다면 나의 수고가 아무 것도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수고를 많이 하고서도 하나님께 아무런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제가 무엇을 하든지 사랑하기 때문에 행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우선 여기서 언급된 사랑은 단순한 감정적,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원어로 아가페(ἀγάπη)입니다. 헬라어에는 4가지 사랑이 있습니다. 첫째, 에로스(ἔρως). 남녀간의 사랑입니다. 둘째, 필리아(φιλία). 친구간의 사랑입니다. 셋째, 스토르게(στοργή). 가족간의 사랑입니다. 마지막으로 아가페(ἀγάπη). 하나님의 자기희생적 사랑입니다. 아가페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해서, 사람들간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어 사람들을 통해 나타나는 사랑입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 어떠합니까? 4절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첫째,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단순한 관념이 아닙니다. 감정상의 느낌도 아닙니다. 사랑은 수동적이나 소극적인 것도 아닙니다. 의지를 갖고 적극적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사랑의 첫째 속성은 참는 것입니다. 사랑은 고난을 당할 때 참아냅니다. 섬기기 어려운 사람을 참으며 변함없이 섬깁니다. 이런 점에서 사랑은 힘든 사람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감당하며 세우는 실력입니다.
둘째, 사랑은 온유합니다. 온유는 따듯하고 부드러운 마음에서 나오는 태도입니다. 로마 시대에 온유함은 숭상할 덕목은 아니었습니다. 로마는 힘을 숭배했습니다. 온유는 연약함의 일종으로 멸시받았습니다. 그러나 온유는 자기 내면에서 강력하게 분출되는 교만과 혈기를 제어하는 힘입니다.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노를 억누르는 능력입니다. 모세는 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였습니다. (민12:4) 물론 그도 처음부터 온유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애굽 사람을 쳐 죽인 혈기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거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간 감당하면서 예수님과 같이 온유한 사람으로 빚어졌습니다.
셋째,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시기는 남이 잘 되는 것은 싫어하는 마음입니다. 그가 가진 것을 내가 갖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사랑은 그런 마음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잘 되는 것을 내가 잘 되는 것처럼 기뻐하고 축복해주는 것입니다.
넷째,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시기의 다른 면이 자랑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마음, 자기 영광을 구하는 본성이 생겼습니다. 사랑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고전1:31은 말합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다섯째,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교만은 자기를 높이는 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너보다 낫다 라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모든 죄의 뿌리는 교만입니다. 사람은 일생 동안 교만과 싸워야 합니다. 반면에 겸손은 모든 신자가 열렬히 구할 귀한 덕목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 말씀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여섯째,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고귀한 존재입니다. 신분과 귀천을 떠나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해 정중한 예의를 갖추어야 합니다. 무례한 것은 상대방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특히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무례하게 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랑은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무례히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곱째,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의 유익을 구합니다. 남이 배고픈 것을 모르지만 자기가 배고픈 것은 귀신같이 압니다. 자기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금방 알아채고 챙깁니다. 특히 요즘은 권리에 대해 민감합니다. 자기 권리가 침해 당하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운전하다가 양보를 하면 뒤에 있는 차가 빵! 합니다. 왜 자기가 잘 갈 수 있는데 내가 섰냐는 겁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의 마땅한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배웠듯이 바울은 사도였지만 값없이 복음을 전하고 아무 대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마땅한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도들을 사랑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덟째,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애매히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죄인들에게 침뱉음을 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그러나 성내지 않으셨습니다. 성내는 것은 상대방이 없어지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면에서 성내는 것은 살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홉째,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NIV 에 "It keeps no record of wrongs" 입니다. 악한 일들을 마음에 기록하지 않는다, 마음에 곰씹어 생각하지 않는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 옛말에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은 원한을 물에 새기는 것입니다.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남이 나에게 악하게 대한 일을 잊어버리고 기억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열째,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합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의로운 사람이 복을 받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우리로 불의를 심판하실 하나님을 고대하며 과부와 같이 원한을 갖고 기도하게 합니다.
열한 번째,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악인들이 서로 뒤를 보아주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자기가 설사 잘 안되더라도 하나님의 진리가 서는 것을 기뻐합니다. 사무엘서에 나오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기꺼이 그 진리가 세워지길 원했습니다. 그는 다윗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반드시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이라” (삼상23:17) 사랑은 자기보다 진리가 세워지는 것을 기뻐합니다. 7절입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우리가 어떤 상황이나 사람에 대해 더 이상 참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영어 표현으로 "enough is enough" (정말 충분해! 더 이상은 노!)일 때가 있습니다. 그때도 참는 것이 사랑입니다. 게임하러 PC방에 안가겠다고 10번도 더 약속하고도 또 거기 가 있는 양이 있습니다. 더 이상 그의 말을 믿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11번 째 믿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의심하지 않고 믿어주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자신을 팔 것을 아셨습니다. 베드로가 곧 자기를 세 번 부인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달릴 때 그의 제자들이 모두 도망갈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겨주신 그 사람들을 최후까지 믿고 최고의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들의 발을 일일이 씻어주셨습니다.
제가 아는 한 영국 형제가 있습니다. 그는 결혼하여 아이가 둘이 있습니다. 그의 아내는 비신자입니다. 얼마 전에 그의 아내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에게 사랑을 느낄 수가 없어요. 나는 내가 다니는 헬스클럽의 P.T와 사랑에 빠졌어요.” 서양에서는 ”사랑에 빠졌다는“것은 결혼과 이혼의 충분한 사유가 됩니다. 그러나 사람의 사랑의 감정은 얼마나 일시적입니까! 여하튼 이런 아내의 말을 들은 이 형제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믿고 바라며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이 가정을 이루어주셨다고 믿어요. 나는 당신이 어떤 상황에 있든 당신을 끝까지 사랑합니다.“ 그 형제의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아내도 감동을 받고 변화되어 지금은 좋은 관계성이 되었습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선택이요 결단인 것을 보게 됩니다.
이상을 볼 때 사랑이 어떠합니까? 포근한 의자에 앉아 커피 한잔 하면서 감미로운 음악과 함께 듣는 시입니까? 너무나 수준이 높아서 부담이 됩니다. 누가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을 하신 분이 있습니다. 누구죠? 예, 예수님이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랑’이라는 말 대신에 예수님을 넣어서 읽어보세요. 완전하게 말이 됩니다. 예수님은 오래 참고 예수님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예수님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 한편, 자기 이름을 넣어서 읽어보세요. 영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온유하지 않으며 시기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무례히 행하며... 정 반대의 말을 해야 내 이름에 딱 맞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기서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우리가 이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못합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왜 사도 바울은 자기 자랑하고 교만하고 시기 경쟁하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또 우리에게 이런 사랑의 말씀을 주신 것일까요?
세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첫째, 오늘 본문은 부담스런 명령이 아니라 우리에게 두신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어떤 소망? 우리를 이런 사랑의 사람으로 만드시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온유하지 않으며 시기하며 자랑하며 교만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게 끝까지 소망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그 바라는 것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사랑의 사람으로 빚어가십니다. 근거가 무엇이냐고요? 로마서8:29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에 대해 정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맏아들되신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예수님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로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그분은 뜻하신 바, 정하신 바를 이루지 못하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로 끊임없이 우리를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로 키워가십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는 완전한 구속함을 받아 예수님과 같은 형상을 덧입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정하신 바요 우리에 대한 축복된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약속을 가진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소망을 믿어야 합니다. 바라야 합니다. 하나님을 소망을 믿고 예수님을 배우기 힘써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할 수 없지만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의 내면에는 누구에게나 그리스도가 살아계십니다. 고후13:5b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십니다. 지금도! 우리 신자들은 내가 아니요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사시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갈2:20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우리는 자신을 죽은 자로 알고 내 안의 그리스도가 실제적으로 나를 살아내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가요? 이는 매 순간마다 주님께 기도하며 그를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의 내면의 왕좌에 앉으시어 나를 다스려주시도록 기도하며 그렇게 하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는 나를 통하여 그의 비범한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셋째, 그리스도를 의지한다고 나는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노력을 하고 투쟁을 해야 합니다. 물론 이러한 노력과 투쟁은, 사랑의 속성을 일일이 수첩에 적어 놓고 매일 매일 지켰나 안 지켰나 체크하는 율법적인 투쟁을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구체적인 방향을 잡고, 내가 애를 쓰고 투쟁하되 주님이 주시는 힘과 은혜를 덧입어 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율법적인 투쟁과 차이가 별로 없게 보입니다. 나의 속 마음 자세와 믿음이 중요합니다. 나를 의지하지 않고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믿고 행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의 삶을 통해 나타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이 먼저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무시하는 사람들, 우리가 판단하는 사람들, 그들보다 나 자신은 더 악한 자가 아니었나요? 더 소망이 없던 자가 아니었나요? 이런 나를 포기하지 않고 모든 허물을 감당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 아닌가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사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도록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 사랑을 알 때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할 말 없는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뿐입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 나의 내면을 변화시키시고 점차 사랑의 사람으로 변하게 해 주십니다.
저는 이번 말씀을 준비하며 제 자신이 온유하지 못한 것을 깊이 발견하였습니다. 이를 회개하고 구체적인 삶에서 예수님의 온유함을 배우고자 결단하였습니다. 이를 실제적인 삶에서 실천하고자 애를 쓰고 노력하기를 원합니다. 저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투쟁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도 은혜 주셔서 하나님의 참사랑에서 성장하도록 축복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대로 달려 있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은 이 땅에서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나 영원합니다.
9,10절입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린도 성도들은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를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은사는 이 땅에서만 필요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면 이런 은사는 더 이상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은사를 갖고 자랑하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행동입니다. 사랑의 사람이 장성한 사람입니다. 장성한 후에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립니다.
13절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데 항상 있어야 할 세 가지 요소는 바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영원한 나라에서도 사랑은 필요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오,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의 방식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은사가 많아도 능력이 많아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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