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2강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말씀 / 고린도전서 14장 요절 / 고린도전서 14: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오늘 말씀은 신령한 은사에 대한 사도 바울의 결론입니다. 바울은 12장에서 성령의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13장에서는 모든 은사가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밑받침이 되어야 함을 증언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교회의 당면 문제인 예언과 방언에 대하여 구체적인 문제 해결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먼저 바울은 방언보다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받은 은사를 질서 있게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덕을 세울 것을 권면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진정으로 사모해야 할 은사가 무엇이며, 우리가 받은 은사를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1-25)
1절을 보십시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바울은 은사를 구하되 13장에서 말한 사랑을 추구하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많은 은사를 받아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모든 은사들은 사랑을 베풀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사를 구하는 자는 "사랑을 따라" 구해야 합니다. 사랑을 베푸는데 더욱 필요한 은사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령한 은사를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사모하라는 말은 열정적으로 구하라는 말입니다. 당시 고린도교인들 중에는 성령의 은사 중에서 방언의 은사를 중히 여기며 다른 은사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언의 은사를 특별히 열심히 구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영적으로 유익하게 하는데 필요한 말씀의 은사를 구하라는 말힙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방언은 영어로 혀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방언은 사도행전 2장에 오순절 성령 강림 때 임한 외국어가 아닙니다(행 2:9). 오순절 때 임한 방언은 각 나라 언어로서 거기에 모인 각 나라 사람들이 자기 나라 말로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서 행해진 방언은 세상에 없는 언어 이기에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바울은 방언은 사람에게 말하는 언어가 아니라 하나님께 말하는 영적인 언어라고 합니다. 비록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의미없는 소리는 분명 아닙니다. 나의 영이 알고 하나님도 알아들으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영으로 자기의 비밀을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예언은 어떠합니까? 3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방언이 하나님에게 말하는 것이라면 예언은 사람에게 말하는 은사입니다. 예언하는 은사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은사입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 넣어 주고, 위로와 희망을 심어줍니다. 성령께서는 이 예언의 은사를 통해서 생명을 살리는 역사를 이루십니다. 때로는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어떤 특별한 사건을 예고하기도 했습니다(행 11:28, 21:11). 이때는 아직 신약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사도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예언하는 은사를 통해 주로 전해졌습니다. 교부시대로 넘어오면서 예언의 은사는 설교의 은사로 점차 대치되었습니다. 예언과 설교는 교회의 덕을 세우고, 성도들을 책망하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역할을 합니다(고전 14;3), 다른 점은 설교자는 사도와 선지자를 통하여 완성된 계시의 말씀을 맡은 자입니다(고전 4:1,2; 딛 1:7). 그 말씀에 근거하여 사람들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웁니다.
그러나 4,5절을 보십시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웁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은사를 주신 것은 성도들을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자라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엡 4:12). 그런데 방언은 다른 은사와는 달리 개인의 덕을 세우도록 주신 은사입니다. 개인의 덕을 세운다는 것은 영이 건축되어 간다는 뜻으로 개인신앙을 견고하게 해주는 은사입니다. 하지만 예언에 비해 다른 영혼에게 직접적인 도움은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지만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예언하여 성도들의 신앙이 더욱 견고하여지고, 교회가 더욱 성장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방언도 통역이 있으면 교회에 덕을 세울 수 있어 예언과 동등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앞에서 말씀 드렸지만 방언의 은사는 기도의 은사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기도할 때에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은밀하게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깊은 만남과 교제를 위해서 방언하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예를 들어서 예언의 은사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만일 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방언만 말했다면 그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었겠습니까? 바울이 계시의 말씀을 전하고, 지식의 말씀을 가르치고, 예언의 말씀을 증언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교훈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들이 복음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방언이란 자신의 기도생활에는 유익을 주지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유익을 주지는 못합니다.
통역이 없는 방언이 교회에 덕을 세우는 일에 무익함을 무엇에 비유합니까? 통역이 없는 방언은 거문고와 같은 생명이 없는 악기가 악보에 따르지 않고, 자기 멋대로 소리를 내는 것과 같습니다. 악기들이 악보대로 소리를 내면 아름다운 음악이 연주됩니다. 그러나 악보 없이 자기 소리만 내면 시끄러운 소리에 불과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8절을 보십시오.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나팔 소리도 진격 나팔 소리와 후퇴 나팔 소리, 취침나팔 소리가 다 다릅니다. 모든 병사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분명한 소리로 나팔을 불어야 전투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9절을 보면 이처럼 고린도 성도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지 않고 방언을 말하는 것은 허공에다 대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예언의 말을 하도록 예언의 은사를 열렬히 구해야 합니다.
10,11 절을 보십시오. 세상에는 소리의 종류가 많지만 뜻 없는 소리는 없습니다. 각 소리마다 다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뜻이 있더라도 전달되지 않는 소리를 내면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서로에게 외국인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방언을 말하는 자도 교회에 덕을 세우는 방법이 있습니다. 13절에 보면 통역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통역하는 은사를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통역을 해야 자신도 알아듣고, 다른 사람들도 알아듣고 힘을 얻고, 용기와 안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통역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14-15절을 보십시오. 통역 없이 방언으로 기도하면 자신의 영으로만 기도할 뿐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여기서 마음으로 번역 된 단어는 지성으로 번역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합니다. 여기서 방언으로 기도할 때, 나의 마음은 열매 맺지 못한다는 말은 마음에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무슨 내용을 기도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지적으로 얻게 되는 유익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방언 뿐만 아니라 통변의 은사도 함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방언을 통해 영으로 기도를 하였지만, 자신이 무슨 기도를 하는지 알고 지성으로도 함께 기도를 하였습니다. 바울은 방언 만 할 수 있고 아직 통변은 할 수 없는 자들에게, 교회 공동체에 유익을 줄 수 있도록 통역을 할 수 있는 은사도 구하라고 합니다. 교회에 유익을 주고자 하는 건강한 목적으로 은사를 구할 때, 하나님이 기뻐 받으사 은사를 주실 것입니다.
또 16,17절을 보십시오. 방언으로 축복할 때에 축복을 받는 자가 무슨 축복을 받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방언으로 감사해도 아멘으로 화답할 수 없습니다. 너는 감사를 잘 하였으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합니다. 방언으로 축복하고 감사해도 알아듣지 못하니 무슨 덕이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방언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많이 했습니다. 바울은 방언의 은사로 하나님께 영으로 기도할 수 있는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 은사를 소중히 여기며 더욱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교회에서는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를 하는 것이 방언으로 일만 마디 하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방언으로 백 마디 하는 것보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다섯 마디를 하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 중에는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통역도 없이 예배 도중 방언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은사 문제로 서로 다투고 시기했습니다. 이는 마치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자기가 가진 것을 자랑하기를 좋아합니다. 질투심이 많습니다. 자기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지도 모릅니다. 성령의 은사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방언의 은사입니다. 평소 듣지 못하는 신기한 소리를 내기 때문에 신령한 은사처럼 보입니다. 예언이나 지식의 말씀이나 지혜의 말씀이나 섬기는 은사나 구제하는 은사는 신령한 은사 같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사를 주시는 목적에 입각해서 볼 때 방언은 요란한 것만큼 많은 교회에 덕을 세우거나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고린도교인들은 방언의 은사를 드러내며 자기도취에 빠져 있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형제들에게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고,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리고 구약 성경 말씀을 근거로 방언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서 증언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이 말씀은 이사야 28:11,12에서 인용해 온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거역하는 백성들에게 다른 방언을 말하는 이방인들이 와서 말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유다 말로 안 통하니까 이제 이방인들이 와서 유다를 짓밟고 어눌한 말로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방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심판의 표적입니다(22). 그들의 불신앙을 밝혀 줄 뿐입니다. 그러나 예언은 믿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합니다. 예언을 통해서 그들의 신앙이 더욱 견고해지고 성숙해집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온 교회가 방언을 하면 믿지 않는 자들이 와서 보고 미쳤다고 합니다.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심판을 경고하는 표적입니다. 그러나 예언은 어떠합니까? 24,25절을 보십시오.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듣습니다. 자기들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또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습니다. 자기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자신의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모든 죄 문제를 주님 앞에 드러내어 놓고 회개하고 사죄의 은혜를 덧입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전파하게 됩니다. 이처럼 예언은 불신자들에게 회개와 믿음을 불러 일으켜 복음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유익을 주는 방언의 은사를 구하기보다 교회에 덕을 세울 수 있는 예언의 은사를 사모해야 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사도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계시가 완성된 교회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사도를 보내셔서 성경말씀을 추가로 주시지는 않습니다. 오늘 날 우리 공동체 가운데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를 통해 책망하고 권면하고 위로하게 하십니다. 또 지식의 말씀과 지혜의 말씀으로 형제자매들을 권면하고 바르게 지도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영접한 사람들은 다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에 예언대로 나시고 예언대로 죽으시고 예언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시겠다고 예언하셨습니다. 그 예언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언의 말씀을 믿고 삶의 지혜와 힘을 얻어 열매 맺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예언의 은사가 계시된 말씀으로 책망하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은사라면 우리는 모두 예언의 은사를 받은 자입니다. 우리가 받은 말씀을 그대로 믿고 전하면 불신자들이 알아듣고 숨을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복음은 전하는 은사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바로 깨닫고, 말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쉽게 분명하게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덧입고자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역사가 풍성히 일어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Ⅱ. 모든 것을 질서대로 하라 (26-40)
26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당시 초대 교회는 고정적인 예배 형식을 갖추고 있지 않았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예배는 은사 중심의 예배였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규율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덕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예배에는 찬송시도 있었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회원들이 부를 수 있었던 신령한 노래였습니다(엡 5:19; 골 3:16). 또 가르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한 간단한 지침서라든지, 예수님의 말씀 집 같은 것들을 낭독하였습니다. 교리나 도덕에 관해서 교훈도 베풀었습니다. 이 때 안으로는 이단이 생겨나고, 밖으로는 이교도들이 성행하였습니다. 그래서 교사들은 구약 성경 말씀과 기독교 교리 등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계시를 받은 사람이 예언을 했습니다. 방언을 하고 통역도 했습니다. 모든 은사를 받은 자들이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바울은 특히 방언과 예언이 무질서하게 사용되어 고린도교회가 혼란스럽게 된 문제가 있었기게, 이에 관하여 구체적인 가이드를 세워줍니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27,28절을 보십시오. 누가 방언을 하려고 하면 두 사람 정도로 하고 많아야 세 사람 정도 하라고 했습니다.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을 하라고 했습니다. 만일 통역이 없으면 교회에서 잠잠하고 하나님께만 개인적으로 말하라고 했습니다.
또 예언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29,30절을 보십시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해야 합니다. 예언은 믿음의 분수대로 해야 하는데 분수를 넘어 거짓 예언을 할 수도 있습니다. 또 성령의 인도하심을 벗어나 사단이 주는 예언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예언은 분별해서 들어야 합니다. 그 예언이 구약 성경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지,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지 가려내야 합니다. 예언을 하는 중에 옆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계시가 임하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씩 하나씩 차례대로 예언해야 합니다. 자기 말만 고집하고, 다른 사람에게 임한 계시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또 31,32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극도의 혼란과 영적 무질서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3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우리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또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무질서를 초래하는 어떤 행동도 삼가야 합니다. 은사중심의 예배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자유스러운 장점이 있었지만 반면 무질서해질 수 있는 약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질서를 분명히 세웠습니다. 우리는 딱 정해놓은 프로그램과 스케줄에 따라 정형화된 예배를 드립니다. 이것은 UBF 에서 임의로 만든게 아니라 교회 정통에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질서는 있지만 다소 딱딱할 수는 있습니다. 저마다 장단점이 있고,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를 수 있기에 우리는 서로 다른 예배 방식을 존중해 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질서의 하나님, 화평의 하나님을 말할 때 교회를 어지럽히는 또 한 가지 문제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것은 자매님들이 교회에서 너무 시끄럽게 말하여 교회가 어지러워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34,35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다른 교회와 같이 고린도 교회 여성도들에게 잠잠하라고 권유합니다. 이는 여자들에게 예언의 은사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 선지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공적 예배에서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자가 공중적인 말을 하게 되면 복종하도록 명령된 질서에 위배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중집회에서 의문점이 생기면 그 자리에서 묻지 말고, 집에 가서 남편에게 물으라고 했습니다. 여자가 교회에서 소란하게 따지고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교회의 권위와 사도의 전승과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여자들이 교회에서 조용할 것을 명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서 여성들이 잠잠해야 할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딤전 2:13,14)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인 질서를 파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활동을 하도록 권했습니다.
교회에서 말을 많이 하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은 자기에게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바울은 그들에게 어찌 너희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느냐고 꾸짖고 있습니다. 37,38절을 보십시오. 그들 중에는 자신을 선지자나 신령한 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바울의 편지가 주님께로부터 온 주님의 명령으로 먼저 알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은사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의 여부를 그의 편지를 기준으로 판단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편지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깨달아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참 선지자도 아니요, 신령한 사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자랑하는 은사나 은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9,40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이제 신령한 은사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첫째, 예언하기를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예언의 은사를 받아서 모든 교회 성도들을 덕을 세우고, 봉사하며, 교회의 덕을 세우기를 열렬히 구하라 했습니다. 둘째, 방언을 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방언도 성령께서 주신 은사이니까 개인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셋째,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도를 지나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예언도 믿음의 분수대로 해야 합니다. 자기가 받은바 은사로 몸 된 교회에 봉사하되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질서를 지켜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신령한 은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 내게 필요한 은사가 무엇인지 간절히 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개인적인 은사보다 교회에 덕을 세울 수 있는 은사를 구하라, 특히 예언하는 은사, 말씀의 은사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책망하고 권면하고 위로하고, 믿음을 굳게 하여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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