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메세지

제목2026년 고린도전서 13강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린도전서 16:1-24)2026-03-02 02:11
작성자

2026년 고린도전서 제 13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말씀 / 고린도전서 16:1-24

요절 / 고린도전서 16:14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우리는 이번 고린도전서 공부를 통해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여러 문제가 많은 고린도 교회를 돕는 사도바울의 목자의 심정과 그의 교회에 대한 사랑을 배웠습니다.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이 특히 12, 14장에 여러 번 나왔습니다. (12:7, 14:12) 또한 지난주에 우리는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배웠는데,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함께 하라고 보내주신 동역자님들, 형제 자매님들, 곧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 주신 공동체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고린도전서 마지막 장을 허락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성경 말씀을 바르게 읽고 깨닫는 것은 천만금을 얻는 것보다 귀합니다.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과 영원한 생명이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겸손한 마음과 깨닫는 마음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1,2절입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여기서 연보는 "collection"인데 모금또는 헌금을 말합니다. 본문에서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구제 헌금"을 의미합니다. 당시에 예루살렘 지역에는 기근이 자주 있었습니다. 특히 예루살렘은 대 도시로 도시 빈민들이 많았습니다.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지 않았던 유무상통의 공동체가 제일 먼저 예루살렘에 이루어진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바울 당시에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과 가난으로 곤궁에 처해있다는 소식이 알려졌습니다. 그러자 여러 교회들이 구제헌금을 하겠다고 자원하여 나섰습니다. 고린도교회도 구제헌금 역사에 동참하고자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헌금을 모으고 어떻게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면 좋을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그 문제를 문의한 것입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고린도성도들이 문의한 그 연보 건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답합니다.

 


첫째, 바울이 이미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바와 같이 고린도교회도 매주 첫날에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헌금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여기서 매주 첫날이란 안식일 다음의 첫날 곧 주일을 말합니다. 당시에 크리스천들은 매주 첫날에 주일 예배로 모였습니다. 그날은 그리스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었습니다. 주일 예배로 모이는 그날에 구제 헌금을 정기적으로 해 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도착했을 때 급히 헌금을 해야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급하게 헌금을 하는 것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급하게 하면 마음을 드리지 못하게 됩니다. 억지로 하게 됩니다. 마지못해 하거나 의무감으로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헌금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내가 불가피하게 누구의 도움을 받을 때 그의 사랑의 마음,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도움을 받기 원합니다. 억지로, 누가 하라고 하니 마음도 없이 하는 것은 받고 싶지 않습니다. 고후9:7은 말합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그런데 구제헌금이나 예배헌금이나, 헌금은 사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짐승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무엇을 드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편 50:8-12에 말씀하셨습니다. "8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9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10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11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12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세상 만물이 다 창조주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것에도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바라시기 때문에 물질을 드리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십니다. 우리와 사랑의 관계성을 원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요 우리는 그의 백성으로 살며 영원히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십니다.

 


저는 오래 전에 어떤 글을 읽다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한 크리스천이 다른 지방을 여행하다가 주일에 그 지역의 교회에 갔습니다. 그가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한 일은 예배 헌금을 정성껏 준비한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이 제게 은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 정성껏 물질을 준비함으로 자기의 마음을 준비시키는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저도 그분의 예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도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나아올 때 빈손으로 나오지 말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23:15, 34:20, 16:16) 날이 갈수록 물질주의가 강해집니다. 우리가 물질주의를 이기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시간입니다. 마음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찬양하며, 마음으로 헌금을 드리고,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시간입니다. 이와 같은 자세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령한 은혜를 풍성히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 내면을 당신의 형상으로 빚어가시고, 우리의 모든 삶을 형통하게 해 주십니다.

 


헌금에 대한 권면 사항 둘째는 각 사람의 수입에 따라 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수입이 많은 사람은 많이 하고, 적은 사람은 거기에 맞게 하라는 것입니다. , 수입이 많든 적든 모든 사람이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구제 헌금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고귀한 것입니다. 은혜로운 역사입니다. 이 은혜의 역사가 조금도 사람들의 비방이 되지 않도록 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물질 관리에 대해서도 권고합니다. 3절입니다.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가게되면 구제 헌금을 모아서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성도들이 인정한 사람, 곧 그들이 인정하여 세운 사람이 가져가게 하고, 바울은 그에게 편지를 써 주겠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이 헌금을 전달하는 사람을 믿고 받을 수 있도록 바울의 친필 추천서를 써주겠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4절을 보면 고린도교회를 위시하여 각 지역의 구제 헌금 전달자들 7명의 이름이 나옵니다.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이들은 아마 각 교회의 재정부장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구제 헌금을 가지고 갑니다. 바울은 물질 관리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습니다. 3절은 헌금을 너희의 은혜라고 합니다. 헌금은 은혜를 받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자발적으로 드리는 은혜의 역사입니다. 바울은 이 은혜의 역사가 끝까지 은혜롭게 되도록 섬세히 섬겼습니다.

 


5-9절은 바울이 자신의 고린도 방문 계획을 왜 변경했는지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당초에 바울은 에베소 사역을 마치고 배편으로 고린도에 가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에서 마게도냐 지역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이 경우 고린도는 잠시 패씽하는 셈이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 방문계획을 이렇게 바꿉니다. , 에베소에서 떠나 먼저 마게도냐 지역 교회들을 방문하고 그리고 나서 고린도에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현재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장소인 에베소를 당장 떠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광대하고 유효한 복음의 문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두란노 서원을 중심으로한 제자양성 역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아시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퍼져나갔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 가운데 큰 회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한편, 복음역사가 활발한 만큼 방해역사도 많았습니다. 아데미 여신 숭배자들의 박해가 극심했습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바울은 좀 더 에베소에서 머물며 하나님의 교회를 지켜야 되었습니다.

 


둘째, 당초에는 고린도를 잠시 들르고자 하였지만, 먼저 마게도냐를 거쳐 가서 겨울철에 고린도에 도착하여 그곳에 오래 머물고자 한 것입니다. 이는 고린도 성도들을 좀 더 깊이 돕고자 함이었습니다. 실제 바울은 이 계획대로 실행하여 마게도냐를 거쳐 고린도에 AD 57년 늦가을에 도착하여 3개월간 그곳에 머무릅니다. 그 기간 동안 그 유명한 로마서를 집필합니다. 바울이 자신의 여행 계획의 변경을 이와 같이 소상히 설명하는 것은 원활한 소통을 위한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도 많았습니다. 작은 일에도 오해를 하기 쉬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들을 잘 이해하고 섬세하게 소통하며 섬겼습니다. 소통이 중요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소통하면 이해가 됩니다. 이해가 안 되면 오해가 되고 다툼이 생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동역하는 가운데 작은 일이라도 자주 소통하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당초 계획과 달리 에베소에서 더 머물러 있게 되자, 먼저 디모데를 에베소로 보냈습니다. 이에 바울은 디모데와 관련하여 고린도성도들에게 부탁을 합니다. 10,11절입니다.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그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이를 보면 바울은 어떤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나요? 디모데가 고린도에 가서 두려움 가운데 있을 수 있겠구나, 멸시를 받을 수도 있겠구나, 박대를 받아 평안히 오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염려가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를 보면 실제로 바울이 염려하는 대로 디모데가 고린도 교회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박대를 받고 돌아오게 됩니다.

 


12절은 아볼로에 대한 언급입니다.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그에게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였으되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성경에 능통한 유대인이었습니다. AD 52년 경에 에베소에 왔는데 그때 그는 복음을 잘 모르고 오직 요한의 세례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가 이런 그를 데려다가 복음에 대해 잘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후 아볼로는 고린도에 건너가 고린도교회를 능력으로 잘 섬겼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고린도전서 편지를 쓰고 있을 때에는 아볼로는 다시 에베소에 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 어떤 사람들은 아볼로를 다시 고린도로 보내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볼로에게 디모데와 에라스도 등(19:22)이 고린도에 가니 같이 가도록 여러 번 권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볼로는 가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로 나누어 다투고 있었습니다. 아마 아볼로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아볼로를 보내 달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아볼로는 그런 상황 가운데 뛰어들어 분쟁에 휘말리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세력을 만들기 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도록 기도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현재 불같이 일어나는 에베소 역사를 동역하기 원했던 것입니다. 아볼로는 학식과 능력이 많았지만 지혜가 있고 성숙한 종이었습니다. 또한 바울도 당시 위대한 사도였지만 일방적으로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동역자인 아볼로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수용하였습니다.

 


13,14절입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15절부터 오늘 본문의 끝인 24절까지는 마치는 인사말입니다. 그러므로 13,14절이 사도 바울의 고린도 성도들에 대한 마지막 권면이요 명령입니다. 그의 마지막 명령이 무엇입니까?

 


첫째,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유혹과 시험이 많은 세상에서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영적인 긴장을 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긴장을 놓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개인적으로 말씀과 기도에 힘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혼자서 말씀과 기도에 힘쓰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도의 교제가 필요합니다. 모임에 참여하는 것이 자기 시간을 뺏기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만나 말씀으로 교제하며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나 자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이 갈수록 개인주의화 되어 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서로 모이기를 힘씀으로 깨어 있어야겠습니다. (10:25) 믿음에 굳게 선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받은 복음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하여 자매님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시니어 사모님은 이 말씀을 연요절로 삼고 투쟁하신 분도 있습니다. ‘남자답게라는 것은 굳세고 강하게라는 뜻입니다. 그와 같이 믿음에 굳게 서서 어떠한 도전이나 장애물에 흔들리지 말라고 명합니다.

 


둘째,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여기서의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지난 13장에서 배웠듯이 모든 은사 중에, 모든 덕목 중에 사랑(아가페)이 으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도 없고 그 자신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믿음에 기초하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는 말씀으로 그의 권면을 마무리합니다. 고린도교회에 심각한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그 최종 솔루션은 하나님을 믿고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입니다. "Do everything in love." 고린도성도들에게나 우리에게나 아주 분명하고도 명확한 방향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할 수 있을까요? 오래 전에 제가 시카고에 계신 한 선교사님으로부터 카드를 받았습니다. 아마 생일 축하카드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카드에 첫 면에 이런 글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Let everything be done in love." 오늘 말씀의 제목인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의 영어 문장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은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로 보는 NIV 번역은 "Do everything in love.""너희는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로 네가 사랑하라인데, 수동태로 쓰여진 "Let everything be done in love" "모든 일이 사랑으로 되어지게 하라"는 뜻입니다. 이 표현이 제게 더 마음에 다가왔었습니다. 우리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할 수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어지도록 해 달라는 기도의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아가페적인 사랑을 할수 없습니다. 아가페 자체가 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영이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신자에게는 성령이 계십니다. 한번 우리 안에 거하신 그 성령은 일생 동안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각과 힘을 의지하지 않고 이 성령님을 의지할 때 우리는 아가페적인 비범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우리가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고자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께서 우리의 영과 몸과 마음을 통해 일하십니다. 내 자신의 힘으로는 전혀 불가능하게 보이는 아가페 사랑을 행하게 하십니다. 다른 동역자를 위해 마음으로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가 잘 되는 것을 내가 잘 되는 것처럼 진심으로 기뻐하는 그런 사랑이 내면에서 샘 솟게 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의 섬김과 희생을 몰라주는 것을 도리어 기뻐하게 하십니다. 낮아지는 기쁨, 은밀히 나누어 주는 기쁨을 알게 하십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먼저 말씀을 마음에 영접하고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가운데 이러한 놀라운 성령의 능력을 날마다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15-18절은 스데바나와 그와 함께 에베소를 심방 온 동역자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15,16절입니다.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 같은 사람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라스데바나는 아가야의 첫 열매, 곧 사도 바울의 첫 양이요, 고린도 교회의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는 바울이 세례를 준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고전1:16) 그는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직후부터 아볼로가 오기까지, 또 아볼로가 에베소로 간 이후 잠시 평신도 스탭목자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교회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책임자로서 섬기기로 결단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런 스데바나의 수고를 알고 그에게 순종하도록 명합니다.

 


17,18절입니다.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 주라고린도교회의 조상 스데바나와 다른 두 동역자,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에베소에 있던 바울을 방문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들의 방문을 받고 너무나 기뻤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에베소 개척을 시작할 때 물질 지원을 했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물질이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이들이 와서 그 부족한 것을 보충해주었습니다. 스데바나, 브드나도와 아가이고는 충성스런 동역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평신도 목자들로 자기 생활하기에도 바빴습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의 비협조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헌신적으로 교회를 섬기고, 직장에서 휴가를 내어 에베소 심방도 온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충성스런 동역자들로 인해 마음이 시원해졌습니다. 큰 힘을 얻었습니다. 25:13은 말합니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 충성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변함없이 또 우직하게 마땅히 할 일을 합니다. 사람들이 알아주던 안 알아 주던 신경쓰지 않습니다. 신실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을 또한 서로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는 충성스런 종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9,20절은 성도들의 문안입니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아시아 (오늘날의 튀르키예 서쪽 소아시아 지역)에 있던 교회들은, 에베소 교회, 골로새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 히에라볼리 교회 등입니다. 그들 모두가 고린도 성도들에게 문안합니다. 또한 바울을 위해 목이라도 내어주고자 했던 동역자들인 아굴라와 브리스가, 또 그 집에 있는 교회와 모든 형제가 문안합니다. 문안하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는 자신들의 사정을 그들에게 알리고 또한 상대방의 안부도 묻고 평안을 기원하는 것입니다. 서로 피차에 잘 알고 서로 챙겨주며 기도해주는 것입니다. 요즘은 점점 개인주의 시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서로 간의 관계성은 카톡 문자로나 나누고 인스타 정도에 올립니다. 자기 일을 알리고자 하지 않습니다. 서로 깊이 있는 관계성을 맺는 일이 드문 시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교회 성도들 간에도 주일 예배 때나 얼굴 한번 보는 추세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우리는 서로 자기의 삶을 알리며 또 상대방의 사정을 알고 기도해주는, 문안하는 관계성을 이어가야 하겠습니다.

 


21-24절은 바울의 개인적인 인사입니다. 21절입니다.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바울은 시력이 나빠서 대필을 하였다는 해석도 있지만, 실상 당시에 대필은 통상적인 것이었습니다. 서양에 종이가 본격적으로 전래된 것은 서기 1200년대입니다. 바울 당시에는 양피지를 주로 사용하였습니다. 양피지는 보통 사람들이 구하기 어려웠고 비쌌습니다. 연필이나 펜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문맹률이 90%가 넘었습니다. 글자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문 필사자들이 있었습니다. 구두로 불러주면 필사자가 쓰고 마지막에 구술자가 몇 줄 친필로 썼습니다.

 


바울 자신도 편지 마지막에 친필로 그들에게 문안하며 말합니다. 22절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서소" 이 말씀을 문맥을 떠나 읽으면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듭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가 임한다? 협박하는 느낌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강요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 말씀은,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그렇게 하지 않는 자에게는 저주 밖에 무엇이 있겠느냐라는 일반적인 뜻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하는 바울은 지금 고린도교회 내에 음행과 분쟁, 사도권에 대한 도전, 무질서 조장 등 끊임없이 문제를 야기하는 일부 사람들을 마음에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에 대해 경고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를 보면 실제로 이 편지 이후 디모데는 별 성과 없이 에베소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이 직접 고린도를 방문합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도 고린도 성도들의 박대를 받고 고통스런 마음으로 에베소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에 바울이 소위 눈물의 편지를 그들에게 다시 보내고, 마침내 고린도성도들이 회개에 이르게 됩니다. 바울이 현재 편지를 마무리하는 이 순간에는 여러 사람들이 바울을 대적하여 고린도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교회이지만 그들에 대한 바울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23,24절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바울은 변함없이 그들을 사랑하였습니다. “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My love to all of you!”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사랑! 바울의 개인적인 사랑이 물씬 다가오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문제가 많은 그들을 변함없이 사랑했습니다. 그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1:8) 그는 그리스도의 뜨거운 심장으로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사랑이야말로 목자의 필요 충분 조건입니다. (21:15) 사도 바울은 지식이 많고 용맹한 목자 이전에 사랑의 목자였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 행한 예수님을 닮은 사랑의 목자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한 목자의 심정과 사랑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는 창을 들고 원수의 심장을 향해 달려가는 영적 장군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예수님의 뜨거운 심장을 소유한 사랑의 사도였습니다. 우리도 남자답게 강건하면서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사랑의 목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