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신년말씀 제3강
말씀을 전파하라
말씀 / 디모데후서 4:1-22 요절 / 디모데후서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의 마지막 서신입니다. 로마에서 제2차 투옥되었을 때 사랑하는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의 말년의 행적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역사적 자료를 통해 다음과 같이 추정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바울은 가이사랴에 2년 동안 구금되었다가 로마로 이송됩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가택연금 상태로 갇힙니다. 사도행전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기술합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행28:30,31) 당시 미결수 감금 최대 기간이 2년이었습니다. 2년 후 재판을 받았는데 원고와 증인이 없는 궐석재판이었습니다. 바울은 석방되어 로마교회의 도움을 받아 스페인까지 갑니다. 그 후 아시아 지역을 전도여행하다 드로아에 이릅니다. 그 당시 로마 대 화재 이후 네로 황제에 의한 대대적인 기독교 박해가 있었습니다. 기독교 지도자로 잘 알려진 베드로와 바울이 AD 66년경에 체포되고 투옥됩니다. AD 68년경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고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로 참수형을 당합니다.
바울이 인생의 마지막을 보낸 로마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기간은 인간적으로 볼 때 참으로 외롭고 힘든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디모데후서를 보면 그의 마음은 도리어 승리의 확신에 넘칩니다. 의의 면류관을 주실 주님을 바라보며 소망에 넘칩니다. 그런 소망 가운데 마지막으로 이 사적인 편지를 디모데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당시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의 책임목자였습니다. (딤전 3:1) 그는 외적, 내적으로 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외적인 것은 로마 제국의 박해였습니다. AD 64년 로마 대 화재 사건 이전에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의 주동자는 유대교인들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로 보고 관용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네로는 기독교인을 로마화재의 주범으로 몰았습니다. AD 64년부터 그가 죽는 AD 68년까지 최초로 제국 차원에서의 박해가 있었습니다. 당시 에베소교회는 이런 어려움 가운데 있었고 디모데는 책임자로 특히 고난이 많았습니다.
내적으로는, 교회 내에 거짓 교사들이 분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교회 내에서 다른 교훈을 가르치며 변론과 언쟁, 투기와 비방을 일삼았습니다. (딤전6:3) 연소한 디모데는 이런 상황 가운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눈물을 자주 흘렸고 위장병으로 고생했습니다. 목자 바울도 투옥된 상태라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디모데에게 딤후 1장에서는 “복음을 지키라”고 합니다. 2장에서는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라”고 합니다. 3장에서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합니다. 오늘 4장은 유언 중의 유언이 되는 말씀, 최후의 부탁이요 명령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말씀을 전파하라고 명령하기 전에 먼저 길게 단서를 답니다. 1절입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여기서 엄히 명령하는 주체는 바울 자신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디모데의 목자, 또는 교회의 수장으로 명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앞에서 명합니다. 바울이 누구 앞에서 명한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그 분의 승인 하에, 그 분의 권위를 갖고 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 구원을 이루신 분입니다. 그 분은 이제 곧 다시 오셔서 심판하십니다. 그의 나라가 곧 임합니다. 바울은 만유의 주인,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의 권위로 엄히 명하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바울은 디모데를 위로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어디 조용한 곳으로 휴가를 가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도리어 엄숙하게 명합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바울은 “디모데야, 네가 말씀을 전하면 참 좋겠다!”라고 권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엄히 명합니다. 여기서 “엄히 명한다”는 것은 NIV에 “I give you this charge”로 되어 있습니다. “charge“는 군대 용어로 ”돌격 앞으로!”라는 뜻입니다. 기병들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다가 이 명령이 떨어지면 쏜살같이 적진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보병은 총에 검을 꽂고 적진을 향해 달려가 백병전을 합니다. 이러한 돌격 명령에는 생각할 시간도 없습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전투에 돌입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의 상황에 관계없이 절대적으로 순종하여 말씀을 전파하라고 명합니다.
여기서 “말씀을 전파하라”에서 말씀은 "그 말씀"입니다. 4장 바로 앞, 3장 15-17절까지 언급한 그 성경 말씀을 말합니다. 영원 전부터 감추어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 말씀입니다.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배워서 안 성경,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한 성경,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어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그 성경 말씀입니다. 온 천하,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 사람들로 믿고 구원을 얻게 해야 하는 그 성경 말씀입니다.
‘전파한다’는 말은 원어로 ‘케뤼소’인데 ‘큰 소리로 선포하다’는 것입니다. 보통 말을 할 때는 듣는 사람이 누구인지, 반응은 어떤지 보고 말합니다. 그러나 선포는 듣는 사람의 반응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듣던 안 듣던 전하는 것입니다. 이는 누구나 반드시 듣고 알아야 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캠퍼스에서 말씀을 전하면 어떤 학생들은 자기가 원하지도 않는데 왜 와서 일방적으로 말하냐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왕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듣든 안 듣든 누구에게나 선포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를 구원하시겠다는 어명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씀 선포는 1절과 같이 곧 임할 예수님의 재림과 하나님의 나라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생들을 심판하러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예수님의 심판을 받지 않겠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누가복음 19:27절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이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원수들을 끌어다가 그 앞에서 죽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심판은 모든 사람이 직면해야만 하는 절대적인 현실입니다. 바울이 말씀을 전파하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말씀 전파는 디모데가 에베소의 목자이기에 의무적으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양들을 얻고 역사를 키우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닙니다. 역사가 있던 없건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자로서 긴급성을 갖고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모든 불신자는 선교지요 모든 신자는 선교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우리와 함께 있으면 동일한 명령을 줄 것입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이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 곧,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모든 민족에게 가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과 동일한 것입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이는 이해하기에 복잡하거나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을 통해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 빚진 자로서 우리 주님의 명령, 사도 바울의 최후의 명령에 순종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선지자 에스겔에게 주신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겔3:17-20절을 보면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가서 악인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만일 하나님의 명령하시는 데도 그가 가서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겠지만 그 악인의 피 값을 에스겔에게서 찾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악인의 피 값을 네게서 찾겠다!” 이는 네가 그를 구원하기 위해 말씀을 전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두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어떤 사람에게 곡식이 많아 넘쳐나는데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이웃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를 심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에게 복음의 말씀이 풍성한데 복음을 듣지 못해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엄한 책망이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이 말씀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순종해야 함을 배웁니다. 저는 리더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드립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부족합니다. 삶 가운데 캠퍼스 양들에게, 또 이웃에게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생활 가운데 실제적인 전도자의 삶을 살고자 합니다. 우리가 캠퍼스에서나 직장에서나 늘 생명을 살리는 복음 전도자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2절 하반절을 보겠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는 NIV에 "in season and out of season" 으로 되어 있는데 ‘형편이 좋을 때든지 좋지 않을 때든지’라는 말입니다. 즉 형편에 상관없이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을 때를 기다리기만 한다면 끝이 없습니다.
‘항상 힘쓰라’는 전도가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일도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은 힘을 써야 합니다. 힘쓰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누워서 유트브 보는 정도일 것입니다. 순간적인 재미를 따라 그냥 시간을 보내는 것은 힘쓰지 않아도 됩니다. 특히 바울이 디모데에게 항상 힘쓰라고 말한 것은 사람들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현실 때문입니다. 딤후3장을 보면 바울은 말세가 고통하는 때라고 합니다. 어려운 시기, 위험한 시기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합니다. 사납습니다.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부인합니다. 실로 말세는 전도하기 어려운 시기입니다. 우리는 말세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 전하기 좋은 시절이 오기를 바라지만, 성경은 좋은 시절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시대는 항상 어렵습니다.
특히 요즘 우리가 섬기는 캠퍼스 상황은 사막과 같이 삭막합니다. 복음의 수용력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캠퍼스 폴리스나 보안요원들, 심지어 수위 아저씨도 전도를 하지 못하게 합니다. 말씀을 전파하는 게 민망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전에도 말씀을 전하기에 좋았을 때는 없었습니다. 우리 모임의 역사가 한창 성장하던 1980년대 민주화 운동 시기에도 말씀 전파는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최루탄 연기 속에서도 말씀을 전파하였을 때 하나님이 놀랍게 축복하셨습니다. 말씀 전파에 좋고 나쁠 때가 없습니다. 언제나 때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매일 수 있어도 말씀은 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시대를 불문하고 사람의 죄 문제는 늘 동일합니다. 복음은 언제나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준비되는 것이요, 내가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청중이 듣든지 안 듣든지 전파해야 하지만, 어찌하든지 잘 영접하고 알아듣도록 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범사에 오래 참아야 합니다. 참기만 하면 안 됩니다. 참으면서도 온유한 마음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결국은 가르쳐야 말씀이 전달이 되고 깨닫게 됩니다. 경책하며(correct), 경계하며(rebuke), 권해야(encourage)합니다. 어떤 사람은 올바로 깨닫게 도와주고, 어떤 사람은 꾸짖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 복음을 듣고 영접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조급함을 버리고 인내하면서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때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3,4절입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말세에는 사람들이 바른 교훈 받기를 싫어합니다. 건강한 가르침을 듣는 것을 스스로 견디지 못합니다. 가려운 자기 귀를 만족시키려고 사욕을 따라 입맛에 맞는 선생을 많이 둡니다. 오늘날 유튜버들은 사람들이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연구해서 올립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구미에 맞는 말을 해주는 유튜버들을 찾아다닙니다. 한마디로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고 하는 시대입니다. 입맛 댕기는 인스턴트식품에 길들여진 것과 같습니다. 어떤 아이들에게는 건강식을 주면 맛이 없다고 먹지 않습니다. 어떤 학생은 수양회에 참여하고 나서 UBF 수양회는 건강식품 같다고 하였습니다. 짜릿한 재미는 별로 없는 데, 뭔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걸 느꼈다고 합니다. 입맛이 바뀔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고 인내가 필요합니다.
말세에 사람들이 말씀을 잘 듣지 않을지라도 디모데는 전도자로서 직무를 다하라 명합니다. ‘다하다’는 영어로 ‘discharge’로 되어 있는데 군대 복무를 마치고 전역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공동번역은 "그대의 사명을 완수하시오”라고 되어 있습니다. 전도자의 삶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고귀한 삶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전도자의 사명을 완수하기를 기도합니다.
작년 2월 8일, 미국 에즈버리 대학에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채플시간이었습니다. 일주일에 세 번 드려지는 일반 대학생들을 위한 작은 예배였습니다. 은혜를 갈망한 19명의 학생들이 예배가 끝난 후에도 예배당에 남아 무릎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자발적으로 이어진 이 기도회는 주최자도 인도자도 없이 밤새 이어졌습니다. 기도 중에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학생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털어놨고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부흥회는 지역사회를 시작으로 미국 전역으로 퍼졌고 매일 1만 5천여 명이 에즈버리 대학이 있는 작은 소도시 월모어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부흥운동 뒤에는 한 교수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에즈버리 캠퍼스를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그는 자기 몸 앞뒤에 나무판자 같은 것을 매고 그 위에 말씀을 적었습니다. “Repent & Believe in Jesus! For the Kingdom of God is near.” 그는 많은 조롱을 받았습니다. 학교에서는 그를 샌드위치맨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지난 2년간을 전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와 말씀 전파 스피릿을 축복하셨습니다.
6절부터 8절은 바울의 ‘마지막 유언’으로 불립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6-8) 주어가 ‘나’로 바뀝니다. 그는 자신의 현재와(6), 과거(7), 미래(8)를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제와 같이 부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I am being poured out like a drink offering"인데 현재 진행형입니다. 전제는 모든 제물 위에 붓는 마지막 제물입니다. 그간 바울은 자기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지금 마지막 제물, 곧 전제로 자기를 드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의 삶은 실로 자신을 거룩한 산 제사로 온전히 드리는 삶이었습니다. 그는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죽음을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라고 합니다. "떠난다"는 표현을 씁니다. 떠난다는 것은 갈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곳은 사랑하는 주 예수님이 계신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그는 싸움꾼의 삶을 살았습니다. 복음을 위한 선한 싸움을 한 삶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코스를 끝까지 달리고 있습니다. 이제 골인 지점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 줄리어스 시이저는 폰토스의 한 전쟁에서 승리한 후 원로원에게 보낸 이런 승전보를 보냈습니다. “Veni Vidi Vici”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그런데 바울의 승전보는 이것입니다. “싸웠노라, 마쳤노라, 지켰노라” 그는 조금도 여한이 없습니다. 도리어 소망이 넘칩니다.
어떤 소망입니까? 8절입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8) 바울의 미래는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이 주시는 의의 면류관을 받는 것입니다. 시상식만 남은 것입니다. 당시 헬라인들은 운동경기에서 승리한 사람에게 꽃으로 엮은 면류관을 씌워주었습니다. 그런 면류관은 그때뿐이고 며칠 후에는 말라버립니다. 그러나 바울이 쓰게 될 면류관은 믿음의 경주를 완주한 사람이 받는 영광스럽고 영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생명의 면류관’(계2:10)이 아닌 ‘의의 면류관’이라고 합니다. ‘의의 면류관’은 의로운 인생을 살아온 사람에게 주는 면류관입니다. 이를 볼 때 바울은 말씀을 전파하는 삶을 의로운 삶으로 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이 따를 길이라고 전파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틀렸다고 가르치고 책망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만이 구원의 길이고 하나님께 가는 길이라고 가르치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결국 말씀 전파자의 삶은 불의에 대한 “의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조만간 처형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마지막 순간 의로우신 재판장 앞에 서서 그 분이 주실 의의 면류관을 기대하고 확신합니다. 바울의 유언적인 고백은 우리가 세상의 인정이나 판단에 매이지 않고, 끝까지 말씀을 전파하며 살아야 함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9-22절은 지극히 사적인 내용인데 이 글을 통해 바울의 당시 형편을 알 수 있습니다. 9절과 19절을 보면 바울은 디모데에게 로마로 ‘어서 오라”는 말을 두 번이나 합니다. 디모데가 속히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는 특히 데마가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기 때문입니다. 본래 데마는 데살로니가 출신으로 바울이 1차 투옥 때만 해도 바울을 가까이서 동역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골4:14) 그런데 그가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가버렸습니다.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바울은 또한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가 장차 받을 의의 면류관을 사모하면서도 이 땅의 믿음의 동역자들을 기억하며 그리워합니다. 바울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람의 따스한 손길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도 믿음의 친구가 필요하고 동역자들의 격려와 위로가 필요합니다. 우리 믿음의 세계에서도 그러합니다. 믿음의 동역자가 소중한 것입니다.
바울은 지하 감옥에서 몹시 추웠던 것 같습니다. 디모데가 올 때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밤이면 몸을 웅크리며 잠을 청하는 바울의 모습을 그려보게 됩니다. 바울이 처음 재판을 받았을 때는 곁에서 자기를 변호해 준 사람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다 그를 버리고 떠났습니다. 박해가 심해져서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고 이해합니다. 그는 디모데후서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버렸다는 말을 세 번 합니다. (1:15, 4:10, 4:16) 바울은 인간적으로는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생애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바울과 함께 하셨습니다. 평생 바울과 함께 하사 그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모든 전도 사역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합니다. 또한 다시 한 번 디모데에게 겨울 전에 오라고 합니다. 추운 겨울이 기다리고 있고, 동시에 디모데의 위로를 받고 싶기 때문이었습니다.
결론입니다. 평생 말씀을 전파하며 산 바울의 마지막은 쓸쓸하고 초라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슬픔이나 회한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는 죽어가는 생명을 구하기 위해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쏟아 부었습니다. 이제 의로우신 재판장 앞에서 의의 면류관을 받을 소망으로 충만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을 때면 “나와 같이 살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과 같은 길을 가라고 권합니다. 그는 말씀을 전파하라고 명령합니다. 사람들이 듣고 안 듣고, 남고 안 남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말씀 전파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길을 걷는 것입니다. 불의한 시대에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삶! 이것이 이 어려운 시대에도 우리가 말씀을 전파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