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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4년 느헤미야 5강 나의 하나님, 나를 기억하소서 (느헤미야 11장-13장)2024-01-28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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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느헤미야 5

 

나의 하나님, 나를 기억하소서

 

말씀 / 느헤미야 11-13

요절 / 느헤미야 13:30,31

"내가 이와 같이 그들에게 이방 사람을 떠나게 하여 그들을 깨끗하게 하고 또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반열을 세워 각각 자기의 일을 맡게 하고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오늘 말씀은 느헤미야서 마지막 강의입니다. 지난번에 배웠듯이 느헤미야서 1-7장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대한 내용입니다.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은 대적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52일 만에 성벽공사를 마무리합니다. 8-10장은 외적인 성벽 재건보다 더 중요한 내적인 성벽을 재건합니다. , 학사 에스라 주도하에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영적 갱신을 이룹니다. 오늘 11장은 예루살렘성에 거주할 사람을 정합니다. 12장에서는 성벽 봉헌식을 거행합니다. 느헤미야서가 12장의 감격적인 성벽 봉헌으로 끝나면 개혁과 회복의 이야기로 해피엔딩이 될 것 같은데 13장이 또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처음 임기 12년을 마치고 페르시아에 갔다가 약 1년 후에 돌아와 두 번째로 유대 공동체를 개혁합니다. 개혁의 와중에 느헤미야는 세 번에 걸쳐 자기를 기억해달라는 기도를 합니다. 느헤미야서 자체가 이 기도문으로 끝납니다. 이 기도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11장은 예루살렘 성에 거주한 사람들에 대해 말합니다. 11:1,2절입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 그 십 분의 구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하였으며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느니라" 당시 예루살렘 성에 거주하는 것은 여러 면에서 꺼리는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그간 성벽이 없어서 이방인들의 침략을 많이 받아 황폐해졌습니다. 사람이 살기에 적당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 침공이후 지금까지 거의 150년 가까이 폐허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경작지가 없었기에 물질 자립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에 충분한 수의 사람들이 거주해야만 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거주해야 인프라가 생겨 성전 기능이 유지가 되며, 성벽 관리도 되고 방어도 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거주지를 어떻게 재배치합니까? 먼저 백성의 지도자들을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합니다. 지도자들이 우선적으로 헌신하도록 했습니다. 지도자는 좋은 것을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본을 보이고 희생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일반 백성들은 제비를 뽑아 십분의 일을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합니다. 제비를 뽑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인데 이와 같이 하여 사람의 십일조를 예루살렘에 배치합니다. 그런데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불편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자원하는 사람들입니다. 백성들은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복을 빌었습니다. 여기서 복을 빌었다는 것은 NIV 에는 commend 로 되어 있는데, 칭찬했다, 축복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왜 자원했을 까요? 이는 그들이 성전을 중심으로 살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1절에 보면 예루살렘을 거룩한 성이라고 부릅니다. 겉으로 볼 때 예루살렘은 초라하고 황량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그곳은 율법이 나오는 거룩한 성이었습니다. 자원하는 백성들은 좀 고생이 되어도 이러한 거룩한 성전 중심, 하나님을 섬기는 삶 중심으로 살고자 하였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사명 중심으로 살고자 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의 중심 역시 주님의 거룩한 사명에 있어야 됨을 믿습니다. 어디에서 사느냐의 문제는 그 사람의 삶의 중심에 무엇이 있느냐와 연결됩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캠퍼스를 중심으로 산다는 말은 삶의 중심이 교회와 캠퍼스 복음사역에 있다는 말입니다. 나의 삶의 터전을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을 기초로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나타내는 실제적인 행동입니다. 우리 목자님들은 특별한 사정이 있지 않는 이상 대부분 교회나 캠퍼스에서 멀지 않은 곳에 거주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삶의 중심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73:28은 말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11:4절부터는 예루살렘 성에서 살게 된 사람들의 명단을 구체적으로 기록합니다. 19절까지 기록된 것을 보면 유다 자손 468, 베냐민 자손 928, 제사장 1,192 레위 사람 284, 성 문지기 172명 총 3,044명입니다. 예루살렘이 성읍의 기능을 할 만큼의 사람들이 정착을 하게 되었습니다.

 

12장은 성전 봉헌식에 대한 내용입니다. 1-11절은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좇아 돌아 온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명단입니다. 이를 기록한 이유는 과거 살기 편한 바벨론을 떠나 성전도 없는 황폐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그들이 귀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느헤미야는 성벽 봉헌식을 행합니다. 12:27절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게 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성벽 봉헌은 느헤미야서의 클라이맥스입니다. 성벽이 BC 586에 무너졌다가 BC 444년에 완공되었으니 거의 140년 만에 다시 세워진 것입니다. 참으로 감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봉헌식을 하기 위해 먼저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왔습니다. 28,29절을 보면 레위인들이 사방 들과 느도바 사람의 마을에서 모여들었다고 말합니다. 레위인들 중에 특별히 성가대를 데려왔습니다. 감사의 노래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제금, 비파, 수금 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을 데려왔습니다. 감사를 제대로 표현하려면 악기가 있어야 합니다. 악기 연주가 있어야 더욱 즐겁고 기쁘게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30절을 보면 느헤미야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몸을 정결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총독이라고 자기나 나서서 봉헌식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세웠습니다. 그들을 정결하게 하여 하나님 앞에 받으심직한 예배가 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30b절을 보면 백성과 성문과 성벽도 정결하게 합니다. 성벽을 정결하게 한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이는 느헤미야가 성벽을 단순히 방어의 목적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거룩한 성으로 여긴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으로 여기며 성문과 성벽도 정결하게 합니다.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보기 좋게 꾸며서 낙성식을 합니다. 겉모습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식은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식은 사람들 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축하 파티나 공연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야단스럽게 외적인 것을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요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31-42절을 보면 백성들은 두 팀으로 나누어져, 한 팀은 에스라가 인도하여 성벽 위에서 우측으로 행진합니다. 다른 한 팀은 느헤미야가 인도하여 좌측으로 행진합니다. 두 팀은 성전 바로 옆에 있는 양문에서 만납니다. 느헤미야가 그 많은 사람들이 성벽 위를 걸어가며 찬양을 하도록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첫째로, 성벽이 튼튼하게 잘 지어진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대적들은 성벽이 여우가 올라갈지라도 무너질 것이라고 조롱했었습니다. 그러나 성벽은 많은 사람이 올라가도 문제되지 않게 튼튼하게 지어졌습니다. 대적들의 방해에도 이와 같이 튼튼한 성벽이 지어진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백성들은 잘 알았습니다. 둘째로, 성벽 위에서는 예루살렘 성 안이 다 보입니다. 멀리 성 밖도 보입니다. 거룩한 성 안팎에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널리 선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성벽 위 행진 찬양을 마친 그들은 무엇을 합니까? 43절입니다.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43절 한 절에 즐거워했다는 말이 4번이나 나옵니다. 성벽 봉헌식의 핵심은 기쁨, 즐거움이었습니다. 왜 백성들이 이렇게 기뻐하고 즐거워할까요?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생각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 박해와 방해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도움으로 성벽이 완성된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성벽 자체보다도 성벽을 짓도록 은혜를 베푸신 그들의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성벽이 완성됨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수치가 없어진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온전히 회복이 된 것입니다. 이를 생각할 때 백성들은 심히 기뻐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에게 쉼이 필요하지만, 일하지 않고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님을 봅니다. 하나님을 믿고 열심히 충성을 다하도록, 진심을 드리도록, 하나님을 진심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돕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때 오히려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하게 됩니다.

 

13장은 에스라, 느헤미야서의 결론입니다. 만일 12장의 감격적인 봉헌식으로 스토리가 끝났다면 느헤미야서를 고난 가운데서 개혁의 완성으로 해피엔딩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13장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13장을 통해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1~3절입니다. “그 날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렸는데 그 책에 기록하기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양식과 물로 이스라엘 자손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하였는지라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모두 분리하였느니라.” 성벽 봉헌식을 한 그 날, 느헤미야와 백성들이 한 두 번째 일은 모세의 책을 낭독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공부가 시작된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개혁은 성경에서 시작하고, 개혁의 기준도 언제나 성경입니다. 낭독된 모세의 책은 신명기 233절부터 5절이었을 것입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의 공동체에 암몬과 모압 사람이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과거에 하나님의 백성을 영접하지 않고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씀 앞에서 무엇이 드러났습니까? 암몬과 모압 사람들이 그들 중에 들어와 함께 살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즉시 순종합니다.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모두 분리합니다. 이방인들과 섞여서 사는 이점도 있었겠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을 최우선 순위로 삼았습니다.

 

133절과 4절 사이에는 약 12여년의 갭이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성벽 봉헌식 이후 약 12년 동안 예루살렘 남아 유다의 총독으로서 시무합니다. 그 이후 총독임기가 만료되어 페르시아 왕궁으로 돌아갑니다. 그 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데 그가 예루살렘을 비운 시간을 약 1년으로 봅니다.

 

느헤미야가 페르시아 왕에게 갔다 온 사이에 성전에서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도비아가 연락이 있었습니다. 과거에 도비야는 성벽공사를 집요하게 방해했던 자입니다.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것이라고 조롱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전부터 유다의 귀족들과 친밀한 관계였습니다. 아라의 아들인 스가냐의 사위였으며(2:5, 7:10), 도비야의 아들 여호하난도 므술람(3:4)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정략결혼으로 유다 세력가들과 엮여 있었습니다.

 

엘리아십은 대제사장으로 성전을 대표하는 자였습니다. 성전 운영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가 도비야에게 성전에 있는 큰 방을 내어 주었습니다. 이방인에게 성전의 방을 제공한 것도 심각한 문제지만,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는 암몬 사람에게 방을 내 준 것은 더욱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도비야에게 준 방은 각종 제물과 특히 레위인에게 줄 십일조를 쌓아 놓던 곳이었습니다. 그 방을 도비야가 점령하고 있으니, 레위 사람들에게 십일조가 돌아갈 리 없었습니다. 그 결과 레위인들은 자신들이 직접 생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성전에서 봉사해야 할 그들이 더 이상 성전에 거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갱신할 때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위한 십일조를 드리기로 맹세하였습니다. 다시는 성전을 버려두지 않겠다고 결의했었습니다. (10:37,12:47) 그러나 느헤미야가 없는 사이에 그들은 다시 성전을 버렸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합니까? 8,9절입니다.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명령하여 그 방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전의 그릇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놓았느니라" 엘리아십은 대제사장입니다. 막강한 종교권력자입니다. 도비야는 유다 귀족들과 인척관계가 있는 자요 부와 권력을 가진 자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런 것에 매이지 않고 단호한 조치를 취합니다. 그는 도비야의 가구들을 모두 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 그 방을 정결하게 했습니다. 그곳에 있었던 성전 물건들을 다시 들여 넣도록 했습니다. 원래의 기능을 회복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버린 민장들의 행실을 꾸짖습니다. 도망간 레위인들을 불러다가 다시 제자리에 세웁니다. 백성들도 이제 헌물 창고 방도 비어 있고 신뢰할만한 지도자가 온 것을 보고 다시 십일조를 곳간에 들입니다. 느헤미야는 충직한 사람들을 분배 책임자로 세우고 제사장들과 레위인을 섬기게 합니다.

 

느헤미야는 또한 백성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을 발견합니다. 15~22절을 보면 어떤 사람이 안식일인데도 평일처럼 일합니다. 안식일에 시장이 열렸고 두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 자손에게 물고기와 각양 물건을 팔았습니다. 경제적 이익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이 무력하게 무릎을 꿇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이 안식일을 지키도록 조치합니다. 금요일 저녁부터 시작되는 안식일에 성문을 닫고 경비를 세워 물건들이 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끔 합니다. 그런데도 상인들은 혹시나 백성들이 밤에 몰래 나와 물건을 사갈지도 모른다고 기대하고 성 밖에서 밤을 새웠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런 그들을 쫓아버립니다. 레위인들에게 성문을 지키도록 합니다. 당시 왜 안식일이 지켜지지 않았을까요? 경제적 이익 때문이었습니다. 백성들은 경제적인 이익 앞에 쉽게 굴복했던 것입니다. 이 시대의 물질주의도 우리로 하여금 주일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게 하는 큰 유혹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이런 유혹 앞에서 분명해야 합니다. 힘들더라도, 손해가 나더라도 주일 성수를 최우선순위로 두고 지켜야 할 것입니다.

 

23~31절은 이방 여인과 결혼한 사람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지난번 공부한 바와 같이 10장을 보면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회개하고 다시는 이방인과 통혼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10:30) 백성들이 자기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고 맹세한 그 첫 번째가 이방인과 통혼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10:30) 하지만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 간 사이 백성들이 이 맹세를 어기고 아스돗, 암몬, 모압 여인과 결혼해 살고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 그곳에 정착하고 살려면 주변 사람들과 혼인하는 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다 사람들은 그곳에 새로 온 사람들이요 이방인들이 토박이들입니다. 이들이 그곳에 사는 데 도움이 됩니다. 또는 유다 백성들이 이방인들의 육신적인 문화에 끌렸을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그로 인해 어떤 문제가 생겼습니까? 유다 백성들의 자녀가 아스돗 방언을 절반쯤은 하여도 유다 방언은 못하였습니다. 자녀들이 히브리어를 모르고 외국어만 쓰는 것입니다. 왜 이게 문제가 되나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듣지도 못하고 읽지도 못합니다. 그러면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섬길 수 없고, 말씀대로 살 수도 없습니다. 거룩한 제사장 백성의 존재의미와 목적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방 신을 섬기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어떻게 합니까? 그들을 책망하며 저주합니다. 분노하여 그들을 때리기도 하고 머리털을 뽑고 맹세를 시킵니다. 그들에게 이방 여인과 결혼을 했던 솔로몬의 죄를 상기시킵니다.

 

그런데 이 일에 더욱 기가 막힌 것이 무엇입니까? 먼저 본을 보여야 할 제사장들이 이방인과의 통혼의 죄를 범하고 있던 것입니다. 율법을 보면 특히 제사장들은 자기 백성 중 처녀를 취하여 아내를 삼도록규정되어 있습니다. (21:14) 그런데도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요야다의 아들 하나가 산발랏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산발랏은 사마리아 총독입니다. 성벽 재건사역을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대적하였던 자입니다. 느헤미야를 죽이려고도 했었습니다. 산발랏이 이제는 혈연적 관계를 이용해서 유다 사회 깊숙이 들어온 것입니다. 제사장 직무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성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 종들도 거룩해야 합니다. 제사장 직무의 시작은 성결로부터입니다. 성결 없이는 제사장의 직무도 없습니다. 느헤미야는 대제사장의 그 손자를 쫓아냈습니다.

 

29-31절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그들이 제사장의 직분을 더럽히고 제사장의 직분과 레위 사람에 대한 언약을 어겼사오니 그들을 기억하옵소서 내가 이와 같이 그들에게 이방 사람을 떠나게 하여 그들을 깨끗하게 하고 또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반열을 세워 각각 자기의 일을 맡게 하고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13장에는 느헤미야가 자기를 기억해 달라는 기도를 세 번 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이 일로 말미암아 나를 기억하옵소서 내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내가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마옵소서.”(14) “내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시옵고 주의 크신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22)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31)

 

특히 느헤미야서는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31)로 끝납니다. 이 기도에 담긴 의미가 무엇일까요? ‘기억하옵소서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억하시고, 개입하시고, 일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8:1, 2:25) 느헤미야는 대적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52일 만에 성벽을 완공했습니다. 백성들의 삶을 개혁했고 감격적인 성벽 봉헌식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시일이 지나지 않아 백성들은 개혁 이전으로 돌아갔습니다. 백성들이 언약을 갱신하면서 지키겠다고 한 통혼, 안식일, 십일조 약속들이 다 무너졌습니다. 이를 보았을 때 느헤미야의 마음이 얼마나 낙심되었을까요?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을 확인하고 절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개혁해봤자라고 회의에 빠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도로 원점으로 돌아와버린 사람들을 보기보다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사람들은 언약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느헤미야는 처음부터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붙들고 예루살렘에 왔었습니다. (1:5) 과거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반복해서 언약을 잊어버렸습니다. 끊임없이 애굽으로 돌아가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때도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끝까지 도우셨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백성들의 삶을 개혁하고 또 개혁하셨습니다. 느헤미야는 아마 이 하나님을 기억했던 것 같습니다. 이 하나님을 의지해서 옛 삶으로 돌아가 버린 백성들을 다시 개혁합니다. 이런 점에서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소망을 소유한 진정한 개혁가입니다.

 

우리의 영적 개혁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번 회개하고 주님께 헌신하기를 결단했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선 자는 넘어질 것을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히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갱신해 나가야 합니다. 끊임없는 개혁의 과정이 우리 신자들의 삶입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에게 언약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지기까지 열심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끊임없이 내적 갱신을 이루어가야 하겠습니다. 우리 자신이, 또 우리 공동체가 거룩한 하나님의 모임이 되도록 말씀을 붙들고 끊임없이 개혁하며 기도로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유지시켜 주시지 않으면 사람의 노력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온전한 개혁은 주님의 은혜로만 가능하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영적 순결함이 도전받고 있습니다.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기 쉬운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힘은 거룩함에서 옵니다. 우리의 거룩함이 유지되려면 우리 마음에 절대적인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기준이 무너지면 다 무너집니다. 손해 보지 않으려고 세상과 금방 타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사람의 개혁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주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개혁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