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데살로니가전서 제 1강 (메시지) 본이 된 데살로니가 교회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1:1-10 요절/7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개척한 교회입니다. 사도행전16장을 보면, 바울이 드로아에서 한 환상을 봅니다.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마게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이에 바울이 순종하여 유럽으로 건너갔고 유럽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바울이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과 박해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던 중, 귀신들려 점치는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냅니다. 이 일로 여종의 주인들이 더 이상 경제적 이득을 얻지 못하게 되자 바울을 고발하여 바울과 실라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는 일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만신창이 가 된 몸을 이끌고 160km을 걸어서 데살로니가에 이릅니다.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의 수도로서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교통의 중심지요 요충지였습니다. 인구는 20만명이나 되었고 유대인들도 많이 살았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유대인 회당도 있었겠지요. 바울은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3주동안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담대히 전했습니다. 그러자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귀부인 몇 사람이 복음을 영접했습니다(17:4). 그러자 여기서도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박해를 합니다. 할 수 없이 바울은 베뢰아로 내려가 복음을 전하지만 박해자들이 그곳까지 따라옵니다. 바울은 다시 아덴으로 내려갑니다. 이때 목자 바울은 신생교회인 데살로니가 교회가 염려되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3주밖에 안된 아이를 떼어놓고 온 유모와 같은 심정이었습니다(2:7). 가고 싶어도 대적자들 때문에 갈수가 없었습니다(2:18). 그는 부득이 자기를 대신하여 디모데를 데살로니가 교회로 파송합니다.(3:2) 이후 바울은 아덴에서 고린도로 가 1년 6개월 동안 사역을 합니다. 이때 디모데가 돌아와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을 전합니다. 아주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바울 목자님~ 데살로니가 교회가 핍박가운데서도 믿음의 중심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어요” 이에 바울이 기뻐하며 그들의 신앙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부족한 바른 재림 신앙을 갖도록 돕고자 급히 이 서신을 썼습니다. 그러기에 데살로니가 전후서는 바울이 쓴 서신중에 가장 먼저 쓰여진 서신입니다. 대략 A.D.51년에 쓴 걸로 봅니다. 자, 오늘 함께 볼 1장 말씀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떻게 그렇게 본이 되는 교회가 되었는가를 말해줍니다. 우리가 어떻게 본이 되는 그리스도인, 본이 되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개척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교회를 개척했을지라도 그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1). 교회의 개척자가 아무리 큰일을 했을지라도 그 교회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교회 안에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간구했습니다. 세상은 경쟁과 비교로 자기 의와 공로를 내세우지만 교회 공동체는 구원의 은혜, 부르심의 은혜로 충만해야 합니다. 나의 공로는 없습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은혜의 감격속에서 나를 낮추고 주님만을 높여야 합니다. 또한 평강이 있어야 합니다. 평강은 다른 말로 샬롬입니다. 안식입니다. 교회에 오면 쉼이 있고 위로가 있고 안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종로2부 공동체가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교회가 되길 기도합니다. 목자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양들을 생각하면서 무엇을 합니까? 2절입니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목자는 양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항상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양들을 친히 키우시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양들의 어떤 점을 감사합니까? 3절을 읽읍시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목자는 양들에게서 이루어진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그리고 소망의 인내를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믿음의 역사’란 ‘믿음으로 행한 일들’을 말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믿음으로 사는 일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내적 외적으로 힘든 일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 힘든 상황,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믿음의 중심을 지켰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전도하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기대만큼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을지라도 도전하고 또 도전했습니다. 우리는 작년 한 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어떻게 국민대, 상명대를 섬길 것인가 기도하면서 학생들과 접촉을 늘리며 복음을 전하고자 애썼습니다. 국민대는 매주 수요일 기도모임후 국민대 모통이돌 하우스 앞에서, 또는 국민대 캠퍼스안에 들어가 간식이 든 조그마한 선물과 함께 전도지를 나누어주며 관계성을 맺고자 했습니다. 특히 최장민목자님이 휠체어를 타고서 매 주 수요일에 나와 전도에 동참하였습니다. 상명대는 최희철목자님과 송다윗목자님이 퇴근 후에 상명대 앞에서 쏘잉을 하였습니다. 어떤 때는 ‘이것이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관심을 보이는 학생들이 생겼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열매는 ‘하면 되는 구나’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생겼다는 것입니다. 올해 성령의 역사를 기대케 하십니다. 종로 1부의 함바울목자님은 행정고시를 패스하여 현재 4급 공무원으로서 높은 지위를 가진 분이시지만 매주 주일 오후에 대학로에 가서 서울대 병원앞에서 꾸준히 전도하였습니다.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눈이 오면 모자를 쓰고서 했습니다. 올해 초 제주지부 인권위원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그런데 제주에 가서도 습관을 따라 퇴근후 제주대학에 가서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벌써 신실한 양 한 명을 얻어 일대일 성경공부를 시작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도전에는 능력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 믿음의 역사는 무엇으로 또 나타납니까? 사랑의 수고로 나타납니다. ‘사랑의 수고’란 ‘동역자끼리 서로 행하는 사랑’입니다. 그들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세상에서도 동역자를 사랑했습니다. 그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는 수고로움이 따릅니다. 사랑은 립서비스로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랑을 실천하려면 양보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자기 생각을 앞세워서는 절대로 사랑의 수고를 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만이 사랑의 수고를 할 수 있습니다. 자기 부인은 믿음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동역자를 위해서 내 생각을 양보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도하실 것이다’라는 믿음이 있을 때 동역자에게 양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동역자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역사’가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행위가 ‘사랑의 수고’입니다. 그 사랑의 수고는 어디에서 옵니까? ‘소망의 인내’입니다. 즉 소망으로 인내할 때에 사랑의 수고를 할 수 있습니다. 소망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심을 말합니다. 그날에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고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이 소망이 있습니다. 이 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일하도록 하고, 사랑의 수고를 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그러므로 믿음, 사랑, 소망은 ‘신앙생활의 3종 세트’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무엇을 감사합니까? 4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셨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그 사실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인을 선택하신 근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선택을 받은 사람의 편에서는 아무 노력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선택받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은 그 은혜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택받은 것을 ‘오직 은혜’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양들에게 어떻게 이런 은혜를 베풀 수 있었는가? 5절을 읽겠습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일방적으로 택하신 근거는 목자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양들에게 복음을 어떻게 전했나요? 먼저, 말로 전했습니다. 말은 복음을 전하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복음을 말로만 전한 것이 아닙니다. 능력으로 전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사람의 말로 전파되지만 실은 성령의 능력으로 전파됩니다. 복음 전파와 성령의 능력은 언제나 함께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말씀 없는 성령은 무기가 없는 것이요, 성령 없는 말씀은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전할 때에 성령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만이 사람의 마음속까지 변화시켜서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큰 확신입니다. 큰 확신은 복음을 증언하는 사람의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큰 확신’하면 떠오르는 것이 TV 홈쇼핑의 쇼호스트 입니다. 우리가 쇼호스트, 즉 판매원의 설명을 듣고 있으면 저 물건을 지금 사지 않으면 뭔가 손해 볼 것 같은 그런 충동이 일어납니다. ‘판매원’이 너무나 큰 확신으로 상품을 선전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른바 ‘충동구매’를 합니다. 큰 확신이 자라면 ‘펜덤’을 만들기도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자님은 제가 자주 기침을 하고 감기에 걸리니 매일 비타민C를 먹으라고 권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자주 감기에 걸렸는데 비타민C를 매일 먹고 난 후로는 감기에 한번도 걸리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너무나 강한 확신가운데 말하셔서 제가 한동안 그 분 말대로 비타민C를 먹었습니다. 진짜 감기에 잘 안 걸렸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복음을 통해 양들의 인생이 바뀐다. 진짜 너에게 이게 필요해” 하는 분명한 내적 확신이 있다면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과거 우리 안에 이런 큰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그 큰 확신이 약해지지는 않았는가 돌아보게 됩니다. 성령이 주시는 큰 확신을 우리가 덧입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 “주님,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는 구령의 마음을 우리에게 주옵소서. 저들에게 어찌하든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열심을 내게 주옵소서” 혹시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시나요? 입춘입니다. 봄으로 들어가는 길목입니다. 이제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고, 캠퍼스에는 양들이 몰려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뭐~ 연례행사하네.” 이런 마음으로 관망만 한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령의 능력과 큰 확신으로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양들도 큰 확신가운데서 복음을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면 반드시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게 됩니다(시126:5). 이제 새 봄학기 개강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기도로 준비하고 나인스텝 말씀을 잘 준비하여 캠퍼스 영혼들을 섬기는 그 은혜를 우리가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양들이 복음을 큰 확신으로 영접하였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6절입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양들은 많은 환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성령님은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에게도 기쁨을 주고, 말씀을 받는 사람에게도 기쁨을 줍니다. 따라서 박해가 있을지라도 우리가 말씀을 전파할 수 있고 양들이 말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받으면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들은 목자와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본받는 사람들로 자랐습니다. 그리고 어떤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까? 7절을 다함께 읽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마게도냐는 그리스 북쪽을 말하며, 아가야는 그리스 남쪽을 말합니다. 그들은 그리스 전 지역의 모든 성도들의 본이 되었습니다. 롤 모델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얼마 되지 않은 신생교회였지만 본이 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신앙연수는 적지만 신앙의 본이 되는 사람을 ‘데살로니가 교인과 같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본이 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말씀의 본, 기도의 본, 쏘잉의 본, 섬김의 본등 다양하게 본을 보이는 2부의 귀한 목자님들과 청년들이 생각이 납니다. 교회 일을 섬긴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경제적 이득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많은 분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의 성도들을 사랑하여 헌신하고 섬기는 모습을 볼 때 저는 늘 하나님과 2부 동역자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닮아가며 변화되어 가는 목자님들과 청년들의 모습을 볼 때 더욱 감사가 됩니다. 이처럼 복음은 한 사람을 변화시켜서 그 삶을 통해서 주위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복음은 허물과 죄로 얼룩진 사람을 품격 있고 건강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본받도록 합니다. 예수님을 닮은 사람, 예수님을 모방하는 사람으로 키웁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작은 예수(little Jesus)’라고 부릅니다. 복음은 나 한 사람의 변화를 통해서 캠퍼스와 가정, 직장과 사회를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그동안 에스라와 느헤미야서를 공부하면서 그들의 영적 개혁을 배웠었는데, 진정한 개혁은 복음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 변화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습니까? 8절을 읽겠습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복음은 삶의 변화를 체험한 그들을 통해서 많은 곳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들의 건강하고 품격 있는 삶은 고속도로를 타고 곳곳으로 전파되었습니다. 건강한 믿음은 전파되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향기로운 꽃향기가 봄바람을 타고서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구체적인 변화의 모습이 무엇입니까? 9절입니다.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첫째로 그들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100km만 가면 그리스에서 가장 높은 산인 올림푸스 산이 있습니다. 그곳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를 비롯한 유명한 신들이 사는 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 데살로니가에 우상신상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들은 이런 우상들을 섬기는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둘째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분도 아니고 죽은 사람의 하나님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살아 계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그림자가 아닌 실체이십니다. 그들이 과거 섬겼던 우상이 무엇입니까? 죽었고,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이제 그들은 살아 계시고 실체이신 하나님을 섬깁니다. 셋째로 그들은 어떤 삶을 삽니까? 10절을 읽읍시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기다리며 삽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사흘 만에 다시 살리셨습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로 가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다시 오십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그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그분은 어떤 분이십니까? 장차 닥쳐올 진노에서 우리를 건져주실 구원자이십니다. 세상은 종말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 심판을 우리 스스로 이겨낼 수 없습니다. 우리를 그 심판에서 건져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에 대한 기다림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데살로니가 교인의 삶의 뿌리에 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삶의 뿌리, 신앙의 토대는 하늘로부터 오실 그분의 아들을 기다리는 믿음입니다. 이 소망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합니다. 이 기다림은 소망입니다. 이 소망이 사랑으로 나타났고, 믿음으로 나타났습니다. 작년 한해 우리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배웠습니다. 누가복음은 하늘에 계신 성자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를 떠나 이 땅에 오셔서 잃어버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세상 여행’하신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들리시고 하늘로 들리셔서 승천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은 하늘로 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사역하시는데 (그것을 예수님의 ‘천상사역’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예수의 영, 성령을 보내사 성령의 권능을 덧입게 하사 예수님의 대행자로써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게 하신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배우는 데살로니가전서는 하늘로 올리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심을 이야기합니다. 누가복음, 사도행전, 데살로니가전서. 이 순서는 예수님이 행하신 역사적 사건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윤모세목자님은 이번 겨울 특강으로 그동안 공부해 보지 않은 것을 해보자는 취지로 데살로니가전서를 택하였는데, 저는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성령께서 예수님이 행하신 역사적 사건 순서대로 공부하게 하시는구나!’ ‘예수님의 재림’.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심으로 예수님의 구원역사가 완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신앙은 참으로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고 우리를 깨어있게 합니다. 사도 바울도 딤후 4:8에서 ‘주의 나타날 것을 사모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날에 의로우신 재판장이 우리가 선악간에 행한 것을 벌거벗기듯 다 드러내어 행한대로 보응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자는 그 행위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요 성도들은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며 주를 따른 그 보상을 반드시 받게 됩니다. ‘심판과 구원’ 이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동시에 우리에게 함께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주 안에서 우리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음을 알고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며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됩시다.(고후15:58) 결론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환란속에서 성령의 기쁨으로 복음을 받았고 목자와 주님을 본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이루는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의 본이 되었습니다. 종로 2부 UBF 교회도 한국 UBF와 한국교회, 더 나아가 세계 UBF의 본이 되는 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 모든 환란중에도 우리의 참목자되신 예수님을 본받고 예수의 길을 따릅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