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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3년 봄 특강 `만민의 기치 예수님` (이사야 11:1-16)2023-02-27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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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봄 특강

 

만민의 기치 예수님

 

말씀 / 이사야 11:1-16

요절 / 이사야 11:10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이사야는 유다의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웃시야 왕은 산당은 제거하지 않았지만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습니다(왕하15:3-4).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시고 유다의 국력을 강하게 하셨습니다. 이런 웃시야 왕의 죽음은 강성했던 유다의 몰락을 의미하였습니다. 그 당시 유다 사회는 심히 타락하였습니다. 관리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뇌물을 좋아했습니다. 백성들 얼굴에 맷돌질하였습니다(3:15). 청년들은 나라에 대한 책임감이 없었습니다. 지도자 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자기 앞 가리기에만 바빴습니다(3:6,7). 자매님들은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아기작거리며 다녔습니다. 그 시대는 한 마디로 소망이 없는 시대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이사야는 당시 사람들처럼 하나님께 대한 불신의 말, 원망의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 입술이 부정한 자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죄를 사하시고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그 때가 BC 740년경입니다.

 

당시 국제정세를 보면 앗수르가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다 왕 아하스는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연합하여 쳐들어오자 앗수르에게 구원을 요청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앗수르와 손을 잡으면 유다에 엄청난 재앙이 올 것을 경고했습니다. 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아하스는 앗수르에 구원을 청했고 결국 재앙이 불어 닥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다 왕국이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으로 전락하였고 많은 고난을 당하다 결국 바벨론에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 모든 재앙이 끝난 뒤에 하나님이 남은 자들을 돌아오게 하시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실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11장의 메시아 왕국에 대한 예언을 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의 바벨론에서의 귀환 예언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메시아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사야가 예언하는 메시아와 그의 왕국이 어떠합니까?

 

1절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이새가 누구인가요? 다윗 왕의 아버지입니다. 마태복음 1장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보아스-오벳-이새-다윗으로 연결이 됩니다. 그런데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게 됩니다. 한 싹은 어떠합니까? 미미하고 작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 정도는 돼야 인상적일 텐데, 작은 한 싹은 무슨 의미가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어떤 영향을 줄 것 같지도 않습니다. 특히 이사야는 '다윗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난다고 하지 않고 '이새의 줄기'에서 난다고 합니다. 왕에게서가 아니라 베들레헴 작은 시골의 농부에 불과한 이새로부터 난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메시아가 화려한 왕실이 아니라 초라한 가정에서 태어날 것임을 암시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몰락한 다윗의 가문에서 목수의 아들로 나셨습니다. 작은 성읍 베들레헴의 한 여관, 그것도 마구간에서 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멸시했던 갈릴리에서 자라셨습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직업도 천하게 여겼던 목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도 평범한 어부들이었습니다. 멸시받던 세리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항상 죄인들과 소외받은 자들,  가난한 자들이 모였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머리 둘 곳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죄수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은 사람들이 보기에 아무런 흠모할 만한 것이 없으셨습니다. 줄기에서 난 한 싹과 같고 칡넝쿨과 같이 거친 뿌리로부터 마른 땅을 뚫고 나온 한 가지와 같으셨습니다.

 

그러나 한 싹과 같은 그 메시아가 어떻게 됩니까? 2절입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 위에 여호와의 영이 강림하십니다. 그 영은 메시아에게 그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 영은 각각 세 쌍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1) 지혜와 총명의 영: 지식이 사람과 사물에 대한 앎을 뜻한다면 지혜(호크마)는 그것을 삶에 적용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총명은 보다 깊은 내적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2) 모략과 재능의 영: 모략은 정책의 수립, 전쟁 계획 등 전략을 세울 수 있는 능력을 뜻합니다. 재능은 실제적으로 나라와 군대를 운영하는 능력입니다. (3)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 여기서의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이해를 말합니다. 여호와 경외는 하나님을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경배의 대상으로 삼고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영이 메시아에게 임함으로 능력있게 그 사역을 감당하시게 됩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그의 위에 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충만을 받고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메시야 사역을 능력있게 섬기셨습니다.

 

열두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떠났던 연약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오순절에 그들에게 성령을 충만히 부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힘으로는 하나님의 역사를 섬길 수 없습니다. 복음의 증인으로 살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11:3) 우리가 이 말씀을 믿고 늘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여 받아 능력 있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메시아가 여호와의 영으로 충만할 때 무엇을 즐거워하게 됩니까? 3a절입니다.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이 부분을 원문대로 읽으면 '그가 여호와 경외를 코로 호흡한다'입니다. '코로 호흡한다'는 말은 단순히 냄새를 맡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좋은 향기를 만끽하는 것, 다시 말하면 심히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은 먼저 와인의 냄새를 맡는다고 합니다. 마시기 전에 그 향기를 즐긴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메시아는 마치 감미로운 와인 냄새를 맡듯이 오직 여호와께 대한 경외로 참된 만족과 즐거움을 삼으십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삶을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그의 기쁨이요 삶의 목적이셨습니다. 그러한 삶을 사셨기에 하나님께서도 예수님을 가리켜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간의 뜨거운 사랑의 관계성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존귀하십니다. 향기가 그윽한 분이십니다. 영광으로 충만하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을 알아갈 수록 우리도 그 향기를 누리게 됩니다. 그 분을 경외하여 섬기는 것을 심히 즐거워하게 됩니다.

 

3b-5절입니다.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메시아는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않습니다.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합니다. 공의와 정직으로 판단하십니다. 한 마디로 메시아는 사람을 외모가 아니라 그 중심을 보시고 판단하십니다. 예수님은 거룩하게 보이나 외식하는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였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15:8) 하셨습니다. 많은 돈을 남이 보란 듯 넣는 자들보다 한 과부가 드린 작은 헌금을 가장 귀하게 보셨습니다. 옥합을 깨뜨려 값비싼 향유를 드리는 여인의 마음을 기뻐 받으셨습니다. 오늘날도 높은 자나 부자는 거드름을 피웁니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은 굽신 거립니다. 아파트 경비하는 분들에 대한 갑질 기사가 뉴스에 자주 나옵니다. 그러나 메시아 예수님은 사람의 내면을 보고 판단하십니다. 이런 메시아가 다스리는 왕국에서는 가난해도 겸손한 자가 보살핌을 받습니다. 소유를 남용하는 부자들은 엄하게 심판을 받습니다.

 

메시아는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이십니다. 그의 입의 막대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불법한 자를 그 입의 기운으로 죽이십니다(살후2:8). 요한복음 12:48도 말합니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마지막 때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날 그 말씀이 심판을 하게 될 것입니다. 메시아는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습니다. 이러한 메시아가 다스리는 나라는 평화와 복락의 나라입니다.

 

메시아가 통치하는 나라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6-8절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기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기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기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여기서 보면 이리와 어린 양, 표범과 어린 염소, 송아지와 어린 사자, 암소와 곰, 젖 먹는 아기와 독사가 서로 대비하여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본래 천적관계입니다. 결코 한 자리에 함께 있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장차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이처럼 서로 평화롭게 의지하며 살게 됩니다.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이러한 동물들이 있을까 하는 것에는 논란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비유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하튼 요점은 모든 적대감과 갈등이 사라지는 평화의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살던 때는 평화가 없던 시기였습니다. 끊임없는 전쟁의 위협 속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단이 되었습니다. 강대국의 힘을 빌어 서로 침공을 하기도 했습니다. 갈등의 골이 깊어졌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한 후 남유다는 더욱 고립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피폐하여지고 국력이 쇠하여졌습니다.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웠습니다. 백성들은 애굽파, 바벨론파 등으로 갈라져서 싸웠습니다. 국론은 분열되고, 민심은 흉흉해졌습니다. 이런 갈등과 분열의 시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이사야는 장차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와서 공평과 정의의 나라, 사랑과 평화의 나라를 건설하는 비전을 본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놀라운 비전에 불탔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평화가 없습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써 1년을 넘기고 있습니다. 작은 땅을 두고 뺏고 빼앗는 소모적인 전쟁으로 벌써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과거의 우리나라 6.25 전쟁만 해도 그렇습니다. 삼팔선이 휴전선으로 바뀐 것 외에는 전쟁 후 달라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수백만 명의 인명만 잃었을 뿐입니다. 지금도 북한은 핵을 갖고 남한을 위협합니다. 남한도 지지 않고자 무력으로 시위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정치는 당쟁을 일삼고 있습니다. 국제 상황은 날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신 냉전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경제도 곤두박질치고 있습니다. 수출이 막히고 매달 무역 적자가 엄청납니다. 물가는 급등하고 있습니다. 기업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입니다.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평신도 목자님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언제 잘릴지도 모르는 불안을 안고 일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에는 아무런 위협이 없는 평강의 나라입니다. 모든 사람이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요, 섬김의 대상입니다. 그 곳에는 모든 짐승이 평화롭게 공존합니다. 사자가 풀을 뜯습니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을 치고 젖 땐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 손을 넣습니다.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는 곳, 그러한 영원한 나라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러한 소망을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현실 문제에 매여 마음이 좁아져 있지 않습니까? 먼 미래에 대한 소망을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학생들은 취업 준비에 온 마음을 씁니다. 목자님들은 아이들 교육비와, 큰 폭으로 오른 난방비를 줄이기 위한 대책에 마음이 쓰입니다. 대출 이자 상환이 걱정이 됩니다. 개강이 되었지만 캠퍼스 역사에는 전혀 마음이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길 기도합니다. 좁아진 마음을 넓히고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이 믿음으로 장차 이루어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해 주시고 하나님의 비전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 가능할까요? 9절입니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여기서 '내 거룩한 산' 1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후반부의 '세상'과 병행하여,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뜻합니다. 하나님에 의해 구속된 새 나라는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습니다. 우주적인 안전과 평화가 보장됩니다.

 

그러나 그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란 단순히 머리로만 아는 지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분을 순종하여 사는 지식을 말합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행태가 생겨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모든 적대와 갈등의 문제들은 사라지고 평화의 나라가 임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는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순종함으로 지금 내가 있는 이 곳,  내가 사는 여기가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우리도 과거에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 마음에 평화가 없었습니다. 염려, 걱정, 두려움으로 가득하였습니다. 가족이나 이웃을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마음을 열고 대화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성령님을 모시고 살자 하나님의 나라가 내게 임하였습니다. 우리의 내면에 사랑과 하늘의 평화가 임했습니다. 화평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한 목자님은 변화되어 그의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아버님은 늘 가정을 힘들게 하고 술에 취해 길바닥에 눕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도 예수님을 잘 믿고 새벽기도를 신실히 하는 분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직장에서 상사의 호통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상사에게 자기를 변명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의 허물을 겸손히 말하며 도움을 구했습니다. 이런 그는 직장에서 "예쁘게 말하는 OOO 씨로 소문이 났습니다. 기쁨과 평화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면 내가 있는 곳에 평화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가정과 직장, 캠퍼스에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됩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10절입니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여기서 이새의 '뿌리'에서 나는 한 싹은 1절과 같이 메시아를 말합니다. 이새의 뿌리 속에 감추어졌던 그분이 마침내 온전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만민의 기치로 섭니다. 여기서 '기치'는 사람들을 소집할 목적으로 멀리서도 볼 수 있게 만든 표식 또는 깃발(banner)을 뜻합니다. 이 기치를 높이 올리자 흩어진 백성들을 이를 보고 몰려드는 것입니다. "! 저기 메시아의 깃발이 있다. 우리 모두 저기로 가서 메시아의 말씀을 듣자! 그가 주시는 구원을 누리자!" 하며 몰려오게 됩니다. 기치가 높이 들려져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를 볼 날이 옵니다. 그에게 주목하고 그를 경배하기 위해 몰려들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모든 사람이 메시아의 기치를 보고 나아옵니다. 그리하여 세상은 메시아를 믿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사람들이 넘치는 아름다운 곳이 됩니다. 영화로운 곳이 됩니다. 이러한 일은 뿌리에서 싹이 나는 것처럼 서서히 은밀하게 진행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생명력을 막을 수 없듯이 반드시 이루어지게 됩니다. 메시아의 기치가 있는 곳은 신약 시대의 교회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의 기치가 세워진 곳이기 때문입니다.

 

11,12절입니다. "그 날에 주께서 다시 그의 손을 펴사 그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치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들을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리니" 여기서 언급된 나라들은 그 당시 이방 세계 전부를 가리킵니다. 그 날에 주께서 다시 그의 손을 펴십니다. 다시 그의 손을 펴사 그의 백성을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13절입니다. "에브라임의 질투는 없어지고 유다를 괴롭게 하던 자들은 끊어지며 에브라임은 유다를 질투하지 아니하며 유다는 에브라임을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을, 유다는 남유다를 가리킵니다. 에브라임의 투기가 없어지고 유다도 에브라임을 괴롭게 하지 않습니다. 동족상잔의 전쟁도 없어집니다.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이는 솔로몬 이후 남북으로 갈라져 수백 년 동안 분단의 아픔을 겪어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그 소원이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북이 힘을 합하여 서쪽에서 늘 괴롭히던 블레셋을 제압합니다. 동쪽에 있는 에돔과 모압도 정복하고 암몬 자손을 복종시킬 것입니다(14). 그때 하나님은 권능의 손으로 유프라테스 강을 마르게 하십니다. 대로를 만드십니다. 흩어진 백성들이 돌아오도록 하십니다(15,16).

 

우리나라도 남북이 갈라진지 75년이 되었습니다. 남북이 총부리를 겨누며, 핵으로 위협하는 상황이 오래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한반도에 이러한 대적과 위협이 사라지고 평화가 이루어지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나라의 정치적 갈등이나, 빈부간의 갈등, 세대 간의 갈등도 다 에브라임과 유다의 갈등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갈등이 모두 사라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남북이 정치적으로 통일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법이나 제도가 바뀐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모든 반목과 갈등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서 해소될 수 있습니다. 열방의 모든 영혼들이 만민의 기치로 선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때 해결됩니다.

 

우리 하나님이 결국 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일하십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 날에 우리 하나님께서 대로를 만드시고 열국 백성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십니다. 온 세상이 사랑과 평화의 나라, 영화로운 땅이 될 것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비전을 충만히 허락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만민의 기치로 세우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각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나아가 사죄의 은총을 덧입고 우리가 섬기는 캠퍼스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나라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제사장 나라가 되어 민민 구속 역사에 귀히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