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봄맞이 수양회 제 1 강
`청년아 일어나라
말씀 / 누가복음 7장 11-17절 요절 / 누가복음 7장 14절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맨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안녕하세요 여러분. 좋은 저녁입니다. 벌써 2025년이 된 지 두 달이 지났습니다. 새해가 시작되고 기쁨으로 살고 계신 분들이 계실 것 같습니다. 주님 안에서 그 기쁨이 오래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슬픔이 가득한 분이 계시다면,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위로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이 메시지를 통해 우리의 삶이 예수님 안에서 회복되길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11절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예수님께서는 바로 나인으로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는 나인으로 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나인에 가시기 전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 계셨습니다. 거기서 한 백부장이 사람을 보내 자신이 아끼는 종을 살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종을 고치기 위해 가십니다. 그러나 그 백부장은 예수님이 집에 오는 것을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아마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고 예수님이 위대한 능력자 이신 걸 어렴풋이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집에 직접 오지 말고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간청합니다. 예수님이 말씀만으로 자신의 종을 살릴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말대로 말씀으로 그 하인을 고쳐주십니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는 나인이라는 성읍으로 가십니다. 여기서 ‘나인’은 ‘기쁨’, ‘즐거운’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름과 다르게 성읍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한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외아들이었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습니다. 왜 이 아들은 죽어야 했습니까? 우리는 여러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질병에 걸려 죽었을 수 있습니다. 불량배를 만났을 수 있습니다. 갑자기 불의의 사고로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의 근본적인 이유를 말합니다. 로마서 6장 23절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죽음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죄로 인한 것입니다. 이 청년이 죽은 근본적인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청년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을 죄인이라고 말한니다. 로마서 3장입니다. 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성경은 우리가 모두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 결과로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이 사실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한번 사는 인생 본문에 나온 성읍의 이름 ‘나인’처럼 인생의 즐거움을 쫓습니다. 저는 제 인생에서 즐거움을 찾기 위해 ‘인정받는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엄청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공부하면 엄마가 엄청 좋아하고 칭찬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하다 보니 성적이 높아졌습니다. 주변에 친구들이 공부를 잘한다고 인정해 줬습니다. 그래서 더 좋은 대학교에 가고 싶었습니다. 좋은 대학교에 가면 성공하고 돈도 많이 벌 것 같았습니다.
교회에서도 순종적으로 있었습니다. 목자님들이 말씀하시면 거의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어디서든 웬만하면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받았습니다. 독립성을 낮추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인정받을 수 있는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렇게 인정을 받으며 제 즐거움을 쫓았습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즐거움은 무엇입니까? 유행하는 가요 가사를 보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제가 한번 불러보겠습니다. 한번 맞춰 보시기 바랍니다. ‘넌 내가 널 원하는 것처럼 너도 날 원하지 않니? 자기야’ ‘지금 내가 널 필요로 하는 것처럼 넌 나를 필요로 하지 않니?’ ‘잠은 내일 자고 오늘 밤은 미쳐보자’ ‘네가 해야 할 일은 그냥 나와 만나기만 하면 돼’
아파트라는 곡입니다. 저희 아버지가 가끔 안방에서 이 노래를 부르셨는데 제가 말려야 하는지 아니면 가사를 설명드려야 하는지 고민했습니다. 너무 즐겁게 웃으면서 부르고 계셔서 결국 아무 말씀도 못 드렸습니다. 세상은 이 가사처럼 짜릿하고 욕구를 쉽게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만남을 추구합니다. 거기서 즐거움을 찾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쫓는 즐거움은 무엇입니까? 안락한 삶을 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적당한 회사에 취직하고 적당한 배우자와 결혼해 안락한 삶을 살고자 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권력을 좇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돈이나 정치를 통해 사람을 휘어 잡음으로 영향력을 끼치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세상 쾌락을 즐거움 삶는 사람도 있습니다. PC방에 가서 하루종일 게임을 하면서 인생의 재미를 추구합니다. 분명 여기에도 매일 소환사의 협곡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게임이 재미있기도 하고 랭킹이나 티어가 올라가면 기분도 너무 좋습니다. 나보다 게임을 못하는 유저들을 괴롭히면서 즐거움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각자의 나인, 즉 즐거움의 성을 쌓고 그 안에 들어가서 삽니다. 우리는 잠시동안 즐겁습니다. 돈도 벌고 연애도 하고 인정도 받고 게임도 하고, 여러 즐거움을 누립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과부가 처음에는 얼마나 즐거웠겠습니까? 즐거움의 성 안에서 좋아하는 남편과 결혼해서 아들까지 낳았습니다. 이 삶이 영원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던 즐거움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가족끼리 오순도순 살거라 기대했는데 그 기대가 산산조각 났습니다. 불과 몇 년 전에 남편의 장례식을 치렀는데 이제 아들의 장례식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죽고 싶게 했습니다. 외아들이 잘 크는 게 삶의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그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여기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진정한 나인에서, 진정한 즐거운 나라에서 온 사람이 있습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나라에서 즐거움을 누리던 한 존재가 있습니다. 그분은 온전한 하나님이시지만 육체를 입고 온전한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진정한 나인을 버리고 인간이 만들어 낸 슬픔 가득한 자칭 나인성에 오셨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예수님입니다.
13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원문상으로 보면 ‘창자가 끊어질 듯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보고 사람이 당하는 슬픔 중 가장 가혹한 슬픔을 느끼셨습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 말입니다. 여기 있는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살면서 느껴본 가장 큰 슬픔보다 더 슬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아들을 잃고 울고 있는 과부를 보시고 너무나 슬프셨습니다. 그래서 다가가서 위로하십니다. “울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오늘 여기에 혹시 이 과부처럼 슬픔에 싸여 계신 분이 계십니까? 너무 마음이 괴로워서 신음조차 안 나오시는 분이 계십니까? 웃을 힘조차 없는 분이 계십니까? 정말 너무 힘들어서 주님을 찾을 힘조차 없는 분이 계십니까? 주님께서 위로하십니다. “울지 말라”. “Don’t Cry”
여기서 잠깐 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1999년에 윤문숙, 백오현 가정 사이에서 2남매 중 첫째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의 직장일로 인도에 가서 초등학교 5학년 때 돌아왔는데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해서 왕따를 당했습니다. 초등학교를 벗어나면 왕따를 당하지 않을 거라 기대했지만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상황은 많이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도와줄 사람이 없자 너무 괴로운 나머지 QT책을 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저를 괴롭히는 친구를 죽여달라고 기도했고 하루는 그 친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중 중학교 1학년 때 JBF 전국수양회에 갔는데 처음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기도회시간에 성령님께서 따듯하게 임재하셔서 저를 덮어주셨고 저는 펑펑 울며 “제 생명 드리겠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후에 삶은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 찼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이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의 눈이 너무나 예뻐 보였던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왕따 당하던 상황도 바꿔 주셨습니다. 2학기 때부터는 저를 괴롭히던 친구가 저를 괴롭히지 않았습니다. 제 슬픔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좋아지자 저는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그렇게 대학생이 되고 저는 광운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스스로 시립대학교 이하는 대학교로 안 봤는데 안 좋은 대학교에 왔다는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공부 못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공부라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러다 거의 번아웃이 올 때 즈음 기도회 시간에 하나님이 다시 찾아오셔서 “너의 생명 드리겠다고 하지 않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몇 년이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살았는데 저를 다시 찾아오셨다는 사실에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래서 다시 기쁨이 가득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부터는 하나님께서 제 죄를 드러내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저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음란물에 빠져 있던 사람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제 음란의 죄를 드러내시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여자친구와의 관계에서 음란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마음이 너무 찔렸습니다. 잠언 7장 22절을 보니 더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 젊은이가 선뜻 그 여자를 따라갔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니 마치 소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 같고” 하나님을 너무 사랑했지만 여자친구와 헤어지기 싫었습니다. 그렇다고 여자친구와의 관계 안에서 죄를 이겨낼 힘은 없었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하나님과 여자친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8개월을 헤어지지 않고 버텼습니다. 그 사이에 우울증과 공황장애까지 찾아왔습니다. 결국 헤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원망스러웠습니다. 내가 거의 1년을 이 관계만은 안 된다고, 헤어지기 싫다고 기도했는데 제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하나님이 너무 원망스러웠습니다. 동시에 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존재이며 ‘죄악 중에 태어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매일 죽여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매일 너무나 죽고 싶었고 불면증까지 생겨 잠을 못 잤는데 게임을 새벽까지 하면 지쳐서 잠잘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매일 PC방으로 가 소환사의 협곡으로 출근했습니다. 새벽에 집에 들어오면 지쳐서 잠들 수 있었습니다. 같이 게임하는 친구들과 담배도 피기 시작했습니다. 2년정도 폐인생활을 하다가 군대에 갔습니다.
전역 후 재작년 6월쯤에 저는 혜화에서 술을 마셨습니다. 저는 4년 정도 담배를 폈는데 전역 다짐으로 금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금연을 2개월 정도 했는데 술이 들어가자 담배가 너무 피고 싶었습니다. 어느 정도 취할 정도까지 마시자 절제력이 떨어져 편의점에 들어가 담배사서 폈습니다. 낮은 담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고 있었는데 너무 서러웠습니다. 스스로가 너무 역겨웠습니다. 잘 울지 않는 편인데 눈물이 나왔습니다. 너무나 서럽고 역겨워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제 왼편에 임재하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부르지도 않았지만 예수님 저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저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날 어머니에게 보낸 카톡 내용입니다.
엄마, 나는 내가 싫은데 / 하나님은 내가 마스터피스래 / 하나님 진짜 신기하지 않아/ 내 모습 그대로 사랑하신다네 예수님은 나인성에 오기 전에 가버나움에 계셨습니다. 가버나움부터 나인성까지는 40km의 낮은 언덕길입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아들이 죽기 전부터 과부의 슬픔을 아시고 위로하시러 걸으셨습니다. 아무도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청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진해서 오셨습니다. 여러분의 슬픔이 극에 달하기 전에 이미 출발하셨습니다. 그러니 울지 마십시오 여러분. 주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과부를 위로하시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가까이 가서 관에 손을 대십니다. 죽은 나사로의 이야기를 알고 계십니까? 예수님이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고 말씀하시자 나사로는 벌떡 일어나 무덤 앞을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시체를 만지거나 무덤을 만지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말씀만으로 사람을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관에 손을 올리십니다. 당시 율법을 아는 사람들은 시체나 관에 손을 대면 부정해지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걸 다 아시면서도 손을 대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청년아, 우울함 속에 죽어 있는 청년아, 중독 속에 죽어 있는 청년아, 슬픔 속에 죽어 있는 청년아, 외로움 속에 죽어 있는 청년아, 두려움 속에 죽어 있는 청년아, 쾌락속에 죽어 있는 청년아, 울분 속에 죽어 있는 청년아. 죄 속에 죽어 있는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그러자 죽었던 그 청년은 일어나 앉고 말도 했습니다. 죽은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어머니가 얼마나 좋았을까요? 정말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죄와 가까이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죄에는 마땅한 형벌이 따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 때문에 죽은 청년을 아무 대가 없이 살려주실 수 있습니까? 그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죽었던 청년이 살아나고 시간이 흐릅니다. 막이 다시 열립니다. 십자가에 한 사람이 달려 있습니다. 그 사람은 죽었던 청년을 말씀으로 살렸던 예수입니다. 그는 모든 옷이 벗겨진 채, 침 뱉음을 받으며 달려 있습니다. 옆에 있는 두 명의 강도는 그를 모욕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고통스럽게 하는 건 예수님이 우리 대신 담당해야 했던 죄인들을 향한, 믿는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모든 분노와 형벌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렇다면 그 저주는 무엇입니까? 신명기 27장 15-26절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 역겨운 우상을 만들어 숨겨 놓은 자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업신 여기는 자로, 이웃의 땅 경계석을 옮기는 자로,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의 재판을 공정하게 하지 않은 자로, 온갖 성적 도착증을 가진 자로, 이웃을 암살하는 자로, 뇌물을 받고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자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무덤 속에 들어가야 했던 사람은 청년이었지만 예수님이 대신 그 무덤에 들어가셨습니다. 청년은 율법의 저주로 영원한 지옥불의 형벌을 받아야 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형벌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죄 때문에 성읍의 이름은 즐거움이라 짓지만 슬픔만 가득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를 위로해주고 싶으셔서, 당신의 영원한 즐거움을 주고 싶으셔서 우리가 받아야 하는 형벌을 한 톨도 남김없이 받으셨습니다. 그는 다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갖고 있던 생명을 주십니다.
저는 담배를 피며 울고 있다가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한 후 성령이 내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것도 24시간 내내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제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4년 동안 피던 담배를 끊었고 게임도 끊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보던 음란물도 끊었습니다. 매일 새벽까지 보던 유튜브도 끊었습니다. 유튜브 프리미엄도 해외사이트를 통해 우회해서 불법으로 봤는데 모두 끊었습니다. 외로워서 혼자 못 있고 항상 친구들과 있었는데 주님이 함께 계시자 혼자 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방에서 혼자 있는 모습과 밖에서 사람들과 있는 모습의 차이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왜 누워있습니까? 정말 여러 가지 각자만의 이유가 있습니다. 어떻게든 이 현실을 살아보고자 알바도 하고 공부도 해서 잘 살아보려 했는데, 견디고 견뎠는데 더 이상은 못 할 것 같아서 게임을 하며 누워있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예전에는 친구들이 많으면 마냥 좋았는데, 이 우정이 영원할 것 같았는데, 한 명 두 명 떠나기 시작하면서 겉으로는 “그냥 가라, 나도 너 필요 없어.”라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답답함과 슬픔으로 누워있는 분이 계실 겁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스스로 열심히 관리하고 일도 잘 해내지만 하지만 속으로는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혀 누워계신 분도 계실 겁니다. 음란물에 중독되어 매일 음란 사이트에 들어가지만 차라리 이 모든 사실이 폭로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고통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 저도 여러분을 다 공감하지 못하지만 여기 그 슬픔을 공감하고 계신 분이 계십니다. 여러분의 눈물을 닦아주고 기쁨을 회복시켜 주기 위해 오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진실로 여러분을 공감하십니다. 여러분을 그분과의 관계 속으로 초대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말씀하십니다. 이분이 여러분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십니다.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새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다 같이 요절말씀 14절을 읽고 기도하겠습니다.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맨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