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 16강
16장은 일곱 대접 재앙의 내용들과 그 결과를 보여줍니다. 인은 한 번 떼면 원상복구가 안 됩니다. 나팔도 한 번 불면 그 소리를 주워 담을 수 없습니다. 대접도 한 번 엎으면 내용물은 쏟아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 누구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심판이 의롭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올바로 해석하는 영적인 눈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는 음성과 함께 일곱 천사가 그 일을 시행하기 시작합니다. 2절. 첫째 천사가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더라고 말씀합니다. 독한 종기는 출애굽기에 나오는 10가지 재앙 중에 여섯 번째인 악성 종기 재앙을 연상시킵니다(출9:8-12). 그 악성 종기는 모든 애굽인들과 특히 모세를 훼방하던 애굽의 요술사들에게 크게 임했다고 나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을 심판하신 것인데, 본문에 보면 이 대접 심판이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임한 것으로 나옵니다. 일곱 대접 재앙은 일곱 인 재앙, 일곱 나팔 재앙의 재앙들이 반복되고 심화되는 것이지만 특히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세력에게 집중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3절. 둘째 천사가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죽은 자의 피 같이 되어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고 말합니다. 이는 출애굽기 열 가지 재앙 중 첫 번째 재앙(출7:14-25), 그리고 두 번째 나팔 재앙(8:8,9)을 연상시킵니다. 두 번째 나팔 재앙에서는 바다 생물의 삼분의 일이 죽는 것으로 나오는데 여기선 모든 생물이 죽습니다. 모든 생물이 죽는다는 것은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4절. 셋째 천사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었습니다. 바다도 피가 되고 강과 물 근원도 피가 됩니다. 물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인류의 젖줄입니다. 문명의 사대 발생지라고 하는 메소포타미아, 애굽, 인더스, 황화 등 어느 한 곳도 물과 떨어져서 발생한 곳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든 생명의 공급원들을 다 차단하십니다. 저희 젊은 시절에는 달동네에 단수가 잘 되어서 물동이를 지고 아랫동네에까지 내려가서 구청에서 지원 나오는 트레일러에서 물을 길어다가 먹은 적이 있습니다. 며칠 동안 단수가 되는데 아랫동네에 트레일러가 왔다는 방송이 나오면 부리나케 집에 있는 모든 그릇들을 다 동원해서 물을 길어오러 뛰어 내려갔는데 그렇게 사는 것이 고달팠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집의 보일러가 고장이 나서 이틀 동안 영하 15도의 냉골에서 잠을 잔 적이 있습니다. 가스레인지와 커피포트에 물을 데워서 세수를 한 일이 있는데 20여 년 전 이런 식으로 겨울을 보내던 장막생활이 생각났습니다. 생명의 공급원들이 끊어지면 사는 게 괴롭습니다.
그런데 5절을 보면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니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다섯 째 인을 떼실 때에 순교를 당한 영혼들이 자신들의 억울한 피를 언제나 갚아주실 것이냐고 부르짖는 내용이 나왔습니다(6:9,10).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 주어지고 있는 재앙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피를 묵과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십니다. 예수님도 눅18장에서 불의한 재판관이 말한 것을 들으라고 하시며 하물며 밤낮 부르짖는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않으시겠느냐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종말의 재앙은 신실한 당신의 종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며 구원역사의 다른 모습입니다.
7절. 이번엔 제단이 천사의 말에 제청을 하는데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참되고 의로운 일임을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의 구원은 좋아하면서 심판에는 거부반응을 나타내는 분들이 있습니다. 구원의 복음만을 강조하고 심판의 복음을 약화시키는 것은 결국 복음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삼 세트에 걸쳐서 재앙을 얘기하고, 반복해서 그 재앙을 의롭다고 하는데 누가 이것을 가볍게 여길 수 있단 말입니까?
8절. 넷째 천사가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웁니다. 마치 불꽃에 기름을 부으면 그 불꽃이 화마가 되어서 재산에 큰 손해를 끼치듯 해가 권세를 받아 사람들을 태워버립니다. 태양은 인간들의 좋은 친구였습니다. 태양빛에 온기를 느끼고 건강을 되찾고 물건이 소독이 되었습니다. 태양이 하루라도 비추지 않는다면 우리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태양이 사람들을 태우는 용광로가 되어버렸습니다. 친구에서 revenger(복수자)가 되었습니다. 9절을 보면 사람들은 크게 태워짐을 당했습니다. 전신 3도 이상의 화상을 당했습니다. 인간이 당하는 고통 중에 화상의 고통이 가장 크다고 합니다. 그런데 태양이 친구에서 복수자가 되는 것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고통 속에서도 악만 남았지 회개하는 겸손한 마음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큰 고통이 사람을 하나님께 무릎 꿇도록 만든다는 말을 하지만 반드시 다 그런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고통의 때에 회개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만 할 수 있는 은혜요 성령의 역사입니다.
지금까지 본 네 가지의 대접 재앙은 자연계에 임한 재앙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인 재앙, 나팔 재앙과도 거의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다섯 번째 재앙부터는 재앙의 구체적인 타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거스르던 사탄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향해서입니다. 10절. 다섯째 천사가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며 천하를 통치하던 짐승의 보좌에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쏟아집니다. 아무도 그 짐승의 보좌를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사람의 생존이 그 보좌에 달렸다고 생각되었었습니다. 그런데 그 위로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집니다.
그러자 그 나라가 곧 어두워졌습니다. 출애굽기의 아홉 번째 재앙(출10:21-23), 그리고 네 번째 나팔 재앙(8:12)을 연상시킵니다. 어두워지면 힘을 못 씁니다. 짐승은 그가 통치하는 사람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에 의해 표를 받고 상거래를 하던 사람들이 그의 도움을 받지 못하자 극심한 어려움을 당합니다.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 정도입니다. 마치 고용주에게 노예계약을 맺고 정기적으로 마약을 공급받아 그 힘으로 살던 사람이 더 이상 공급을 받지 못하자 고통스런 금단 현상이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때서야 짐승이 주는 안전과 혜택이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회개하고 짐승을 떠납니까? 11절.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며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않습니다. 화상을 당해 죽을 지경이 되고 고통스러워 혀를 깨물 상황이 되어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삶을 돌이키지 않습니다. 자살폭탄 조끼를 두르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처럼 심판으로 달려가는 길에 브레이크를 걸지 않습니다. 11장에서 등장했던 두 증인의 증거와 순교를 통해서는 회개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여기선 없습니다.
이를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재앙이 극심해 진다고, 당하는 고통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하나님을 인정하거나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더 핏대를 세우며 하나님을 비방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 말세가 될수록 그런 사람이 더욱 증가될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말 안 듣는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징계를 크게 내려주시도록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다른 차원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이 이루어지는 거룩한 선물입니다. 작은 재앙에도 하나님께 두 손을 들며 회개할 마음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12절. 여섯째 천사가 이번엔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았습니다. 여섯 번째 나팔 재앙에서도 유브라데 강이 언급되었습니다. 유브라데는 로마와 파르티아 제국이 접하는 곳이며 세계적인 전쟁이 벌어질 도화선이 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큰 강에 대접을 쏟으니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 되었다고 말합니다. 과거 한국전쟁 때에 압록강이 얼어서 중공군 30만 명이 일시에 남하하여서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렸었습니다. 강물이 마르면 많은 수의 병력 이동이 수월할 것이고 그러면 전쟁이 더 커질 것입니다.
13절. 요한이 보니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옵니다. 개구리는 성경에서 더러움을 상징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열 가지 재앙 중에 두 번째 재앙이 개구리 재앙이었습니다(출8:2-6). 개구리 같은 더러운 영이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이는 사탄이 마지막 때에 모든 거짓말과 감언이설로 사람들을 속일 것을 말합니다. 참고로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라고 말하는데 13장에 짐승의 표를 받게 했던 두 번째 짐승을 ‘거짓 선지자’로 보기도 합니다. 그 더러운 영들은 귀신의 영인데 그들이 하는 일이 무엇이냐면 14절을 보면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는 일입니다. 이는 사탄과 그 졸개들이 왕들의 마음에 거짓된 확신을 심고 충동질을 하여서 전쟁을 하도록 부추긴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두고 세대주의자들은 사탄이 전 세계 강대국 지도자들을 미혹하여서 제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마지막 날에 벌어질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계시록에서 인간끼리의 전쟁을 묘사하는 것은 진짜 전쟁이지만 사탄이 개입되는 전쟁은 영적 전쟁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본문도 말세에 벌어질 가공할만한 영적 전쟁을 가리킨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듯이 영적 전쟁이 육신의 전쟁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참혹합니다.
14절을 다시 보면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이란 표현이 나옵니다. 이는 종말에서도 끝날, 마지막 심판과 재림의 날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의 재앙과 심판은 아직 벌어지지 않은 미래적인 심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재앙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섞여 있었습니다. 예언은 반드시 앞으로 벌어질 미래적인 일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종말의 심판도 예수님의 초림 이후로 벌어지는 심판이지 결코 미래적인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다섯 번째 대접 재앙부터는 미래적인 일로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말세가 될수록 세상의 지도자들은 사탄이 심는 거짓말에 잘 속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해하는 전쟁을 일으키는 일도 불사합니다. 마치 거라사 광인이 자기를 돌로 찍듯이 말입니다. 과거 히틀러는 인종 우생학적인 잘못된 생각으로 유태인 육백만을 죽였습니다. 모택동 또한 부르주아에 대한 잘못된 생각으로 삼천 만이 넘는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세계대전이 김정은의 오판으로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 IS가 테러로 세계를 이슬람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귀신이 심는 생각일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종말로 갈수록 더 극심해질 것입니다.
15절. 이 말씀은 재림하실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종말은 예수님의 재림을 향해 더 가깝게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질 때 도둑처럼 갑자기 오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종말의 때엔 벼락치기 신앙생활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평소에 깨어서 자기 옷을 지켜야 합니다. 고대엔 겉옷이 가장 귀중한 재산이었습니다. 잠을 잘 때 겉옷을 잘 지키지 않으면 도둑이 이것을 훔쳐갔습니다. 잠을 자면서도 한쪽으로는 깨어 있어야 했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은 내 영적 생명이고 믿음입니다. 이것을 잃으면 벌거벗고 다니는 것이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삶을 살아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늘 이를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밤이 지나고 낮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자”고 말했습니다(롬13:12-14).
16절. 세 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고 말합니다. 아마겟돈은 ‘므깃도의 산’이란 뜻입니다. 전에 세대주의자들은 이곳이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가 만나는 전략적 요충지이며 그곳은 넓은 평야지대라 많은 병력이 집결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하며 세계 3차 대전이 발발할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므깃도는 구약에서 싸움이 많이 벌어졌던 곳이며 백성들이 피눈물을 많이 흘렸던 곳입니다(삿5:19, 슥12:11). 소아시아 일곱 교회 성도들이 므깃도를 떠올릴 때 구약에서 벌어졌던 많은 싸움의 역사가 생각났을 것이며 마지막 때에도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공포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곳은 악인들의 집결지이며 하나님이 최후의 심판으로 모든 악한 세력을 파멸시킬 것을 상징하는 장소입니다.
17절. 일곱째 천사가 대접을 공중에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고 ‘되었다’ 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여기서 ‘공중’은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이 거하는 그의 처소입니다. 공중에 쏟았다는 것은 허공에 쏟았다는 것이 아니라 사탄에게 쏟았다는 것이며 그의 운명이 임박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되었다’는 것은 ‘성취되었다’, ‘완성되었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종말의 재앙과 심판이 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18절. 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가 있고 큰 지진이 있는데 얼마나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온 이래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고 말합니다. 이런 천재지변 현상은 일곱 번째 나팔 재앙 때에도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위엄을 가공할만한 천재지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세의 때에 이 땅에 임하시는 하나님을 세상은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20년 전에 일본 고베에서 큰 지진이 일어나 수 만가구의 집들이 부서지고 수 십 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학자들에 의하면 지층 밑에 있는 멘틀이 0.5센티 움직였다고 합니다. 0.5센티에 지상에서는 난리가 나는데 하나님이 본격적으로 지구를 흔드시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간이 땀 흘려 세운 모든 문명의 금자탑들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19,20절.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이 무너진다고 말합니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으로 여겨졌던 큰 성 바벨론도 무너지는 데 하나님 앞에서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기억하신 바’ 된다는 것은 좋게 기억해 주신다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악행을 분명히 기억해두었다가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비방한 것을 기억하십니다. 그를 대적한 것을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학대하고 피를 흘리게 한 것을 기억하십니다. 모든 일과 역사의 결국은 선악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에게 달렸습니다. 이제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가 없습니다. 현재 태평양의 섬들이 가라앉고 일본이 가라앉는다고 말하는데 그 날에는 모든 섬들도 없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세워진 모든 산들도 사라질 것입니다. 언제 그랬느냐 싶은 날이 올 것입니다.
21절. 또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내렸습니다. 한 달란트는 약 60킬로그램입니다. 직경 2,3센티의 우박이 떨어져도 차지붕이 뚫립니다. 60킬로그램이면 호박만한 돌들이 총알 같은 속도로 떨어지는 것인데 남아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때도 역시 사람들을 회개하지 않습니다. 우박의 재앙 때문에 하나님을 비방합니다.
모든 생물이 죽고 생명의 근원이 차단되고 불에 태워지고 전쟁이 일어나고 지진이 나고 우박이 내려 세상은 더 이상 회복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재앙을 당한 세상은 수 십 번 총알세례를 받은 시체처럼 되었습니다. 앞으로 살펴볼 17-20장의 내용은 다섯 번째부터 일곱 번째 대접 재앙을 보다 자세히 서술한 내용입니다. 바벨론이 어떻게 멸망당하는지, 그리고 사탄과의 마지막 싸움이 어떻게 벌어지는지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은 구원만 다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심판도 다 이루시는 분이란 사실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을 다 마시기까지 심판을 성취하십니다. 둘째, 재앙이 회개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세 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오히려 그들의 완악함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란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도둑 같이 재림하실 것이기에 깨어 우리의 믿음과 순결을 지켜야 합니다. 어떤 분은 신자와 세상 사람의 차이가 ‘word’를 사랑하느냐 ‘world’를 사랑하느냐, 한 끝 차이라고 말합니다. 무너지고 사라질 세상이 아니라 영원토록 있을 말씀을 사랑하며 종말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