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 22강
설렘과 두려움으로 시작했던 계시록 특공대가 드디어 마지막까지 왔습니다. 사도 요한의 서신이며 성경에서 마지막을 차지하는 매우 중요한 책이면서도 신비적이고 상징적인 언어들이 많아 읽고 나누기를 꺼려했던 말씀, 그래서 많은 이단들에 의해 훼손이 되었던 하나님의 말씀, 우리가 이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안고 계시록 앞에 섰었습니다. 그리고 예언자적 사명을 품고 계시록 본문에 빠져 달려왔습니다. 하나님이 요한에게 일곱 교회에게 전하라고 하신 말씀의 핵심이 무엇인지 22장 마지막 장을 살펴보며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계시록을 깊이 알면 알수록 하나님이 만드신 천국이 지리적이고 물리적인 장소로서의 천국과 좀 관계가 멀다는 사실에 실망을 합니다. 과거 8,90년대에 퍼시 콜레 박사의 ‘내가 본 천국’이란 간증책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저도 눈에 보이는 듯한 그의 생생한 간증에 빠졌고 천국은 그런 곳이구나, 비단옷을 입고 황금길을 걸으며 궁궐 같은 크기의 내 집이 마련된 곳, 그래서 이 땅에서 늘 전세로 사는 서민들에게 위로가 되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천국은 ‘네 마음속에 있느니라’ 하셨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심으로 우리가 어디로 가야 천국이 아니고 오히려 회개하면 주어지는 것이 천국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물리적인 장소로서의 천국을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퍼시 콜레 박사가 말한 것보다 더 찬란하고 영광스런 천국을 소망합니다.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도 만들지 말라고 하신 것이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으로 하나님을 규정짓는 것이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처럼 인간의 머리에서 나오는 천국에 대한 어떠한 상상력도 심히 미천하고 미비하다고 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했지만 천국은 ‘어떤 장소에 들어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처함’이 핵심입니다. 이 점을 전제하며 본문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라고 말합니다. 수정 같은 맑은 생명수의 강! 마시면 생명을 얻는 강물이 새 하늘과 새 땅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는 가장 먼저 창2장의 에덴동산에서 흐르던 강물을 연상시킵니다.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던 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라는 이름의 강들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겔47장에 나오는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강이 된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본문의 생명수의 강은 근원지가 어디라고 합니까?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근원지가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입니다. 하나님과 어린 양을 개별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한 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결국 에덴동산에서의 강이나 에스겔에서의 성전물의 근원지가 전부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2절. 이 물이 길 가운데로 흐릅니다.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도 동산 중앙에 생명나무가 있었습니다. 그 나무는 열두 가지 열매를 맺고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한다고 말합니다. 에스겔 성전에서 흐르던 강물 좌우편에도 항상 잎이 시들지 않고 열매가 끊이지 않는 나무가 자라고 그 잎은 약재료가 된다고 했습니다(겔47:12). 우리는 요한이 천국을 묘사하는 방식이 철저히 구약 의존적인 것을 보게 됩니다. 그에게 있어 천국은 에덴동산이며 에스겔이 환상 중에 봤던 성전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예언을 하고 환상을 봐도 그것이 이미 예언된 성경 말씀의 경계를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봅니다. 신구약 어디에도 없는 내용을 가지고 와서 이것이 천국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3절. 그 땅에는 다시 저주가 없습니다. 저주가 없다는 것은 저주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으셨고 그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지켜서 여기까지 왔으니 다시는 저주가 없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고 그의 종들이 그를 섬깁니다. 천국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중심에 둔 곳입니다. 화려하고 영원한 생명이 있는 곳이 천국이라는 말보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중심에 계신 곳이 천국이라는 말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곳입니다. 혹자는 천국이 시종 드는 천사들로부터 왕 같은 대접을 받는 곳이라고 하는데 천국은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곳입니다. 죄의 노예가 되어 죄를 섬기던 사람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섬기니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4절.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입니다. 저는 과거 충신시장 입구에서 서울시장 유세에 나섰던 고 노무현 대통령과 악수하던 때를 잊을 수 없습니다. 유명 연예인을 길에서 보기라도 하면 사진을 찍고 SNS에서 난리가 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보다니요? 누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까? 보면 죄악 된 우리는 감당할 수 없어서 죽었습니다. 유일하게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던 모세의 얼굴조차 거기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광채 때문에 백성들은 차마 볼 수 없어서 모세는 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려야 했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봅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 곧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나는 영원히 당신에게 속했습니다”를 의미합니다. 엄마 품 안에 안긴 아기가 가장 행복하듯 하나님 품에 안긴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요?
5절. 다시 밤이 없습니다.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습니다.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하나님 안에서 세세토록 왕 노릇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결론입니다. 20:10에서 사탄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유황불 타는 못에서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이것과 완전한 대조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던 세력은 유황불 못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을 것이고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세세토록 왕 노릇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에덴동산에 두셔서 만물을 다스리는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을 사탄이 들어와 어그러뜨렸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창조질서도 무너지고 인간은 진노의 심판 아래 처했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뒤틀려진 그 세계를 바로잡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옛 예루살렘이 하지 못한 일을 새 예루살렘인 교회 공동체를 통해 하시며 처음 창조의 목적을 회복하십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어그러뜨렸던 사탄과 그 추종자들을 영원한 심판으로 던져 넣으시고 에덴동산에서의 첫 창조의 목적을 우리들을 통해 온전히 이루십니다. 실패가 없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6절.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본 일곱 인, 나팔, 대접 재앙과 용과 짐승과 음녀와의 싸움, 이 모든 것이 진행 중이며 또 속이 되어질 일들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사탄이 멸망하며 하나님의 백성이 승리한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이것을 일곱 교회 성도들에게 알려주고자 천사를 보내시고 요한을 예언자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7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을 하루처럼 여기시는 그 분에게 성도들의 기다림이 아주 적은 시간임을 의미합니다. 속히 온다는 것은 지체하지 않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늘 자신의 재림에 대해서 한 밤 중에 들이닥치는 도적처럼 표현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벼락치기 신앙생활로 준비할 수 없습니다. 그 예가 노아의 때 홍수 심판입니다. 노아의 가족 외에 한 사람도 방주에 들어간 사람이 없다는 것은 평소에 준비하지 않으면 아무도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평소에 예언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교회에 주신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 8절에서 요한은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라고 했습니다. 증인선서를 하면서까지 절대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0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하십니다. 누구나 보고 듣고 읽고 알고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길이 만민 앞에 열렸습니다. 때가 매우 촉박하여 한 사람을 갖고 티격태격할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11절처럼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자기 갈 길을 자신이 가는 것이고 그것에 대해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12절에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라’고 말씀합니다. 행1장을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여 승천하실 때 제자들이 하늘을 빠끔히 쳐다보자 두 천사가 나타나 말을 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1:11)” 이렇게 오실 것이며 예수님이 주실 상이 있어서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은 만유가 회복되는 날이며 우리가 인생의 최종적인 상을 받는 날입니다. 이것이 확실함을 보증하신다는 의미에서 13절의 말씀을 21:6에서와 같이 반복하십니다.
14절.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자신의 행실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늘 적시며 깨끗케 함을 의미합니다. 결국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습니다. 앞에서 보았던 그 찬란한 예루살렘 성, 열두 문, 열두 천사, 열두 진주, 열두 기초석, 온갖 화려한 것들로 꾸며진 그 성에 들어갑니다. 천국 백성 공동체, 천상의 교회의 일원이 됩니다. 15절.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을 좋아하여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을 것입니다. 사실 성밖에 있을 곳도 없죠. 이미 다 유황불 못에 던져졌을 테니까요.
이 모든 것은 요한이 본 환상이고 요한의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그것은 전부 예수님으로 인해 벌어진 일들입니다. 집필을 요한이 했지만 원래 저자는 예수님이란 말입니다. 8절이 요한의 보증이었다면 16절은 예수님이 친히 보증하시는 말씀입니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예수님이 요한을 통해 요한계시록이란 편지를 쓰게 하신 이유는 교회들을 위해서였습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서나 정감록 같은 것을 읽으며 세상의 종말을 알고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 쓴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그의 택하신 교회들이 종말의 때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고자 쓰신 것입니다. 아직 16장부터의 재앙들은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 대부분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다시 한 번 인생들을 초청하십니다. 17절.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하십니다. 그 옛날 이사야가 패역한 백성들을 초청하던 음성이 생각납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 간절히 부를 때 와야지 튕기다가 나중에 구원의 문이 닫힌 다음에는 어떤 하소연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아닌 자신을 겸손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목마르고 돈 없고 힘없고 패역한 나 자신을 인정하고 그 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18,19절은 이 요한 계시록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최고의 권위를 갖기 때문에 그 어떤 사람도 더하거나 뺄 수 없음을 경고합니다. 20절.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Surely I come quickly. Amen. Even so, come, Lord Jesus.)” 속히 오신다는 것을 세 번째로 말씀하시자 요한은 ‘당연히 그렇게 하셔야지요.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의 느낌으로 말합니다.
이제 계시록의 마지막 절이며 신약의 마지막 절인 21절입니다. 우리가 많은 성경구절을 암송하지 못한다 해도 창1:1과 계22:21만 암송하면 성경 전체를 안다고 과장해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21절.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을 에덴동산의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사탄 때문에 죄와 죽음의 종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벗어나 에덴으로 회복하려면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됩니다. 거룩한 144,000이 되는 길도 예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되고 많은 재앙과 유혹 속에서 이기는 자가 되는 길도 예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됩니다. 내가 지금까지 온 것이 주 예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되었던 것처럼 앞으로의 인생도 주 예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안 됩니다. 내게 지금도 아니 앞으로도 영원히 필요한 것이 단 하나 있다면 그것은 주 예수의 은혜입니다. 밧모섬의 차갑고 어두운 지하 감옥,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그곳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환상을 보고 일곱 교회의 현실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며 계시록 편지를 썼을 요한을 생각해보십시오. 주 예수의 은혜가 있다면 이 차갑고 어두운 감옥도 천국이고 주 예수의 은혜만 있다면 아무리 현실이 어려워도 이기는 교회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 요한에겐 있었습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아멘!
지난 22번의 강의를 종결짓고자 할 때 어떤 말로 매듭을 지을 것인지 고민이 됩니다. 첫째, 우리는 승리한 교회이면서 동시에 싸우는 교회임을 명심합시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인을 받고 144,000이 된 거룩한 성도들이면서 동시에 용과 짐승의 위협 속에서 환란을 치루는 교회입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지만 구원의 완성을 위해 달려야 하는 성도들이라는 말이 이와 비슷한 뜻입니다. 이를 ‘이미(already)’ 와 ‘아직(not yet)’ 사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신학적으로 표현합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을 확신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방만하게 살아서는 안 되고 두렵고 떨림으로 이기는 자가 됨으로서 이 축복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했습니다. 적진은 이미 초토화되었습니다. 그러니 더욱 힘껏 무기를 들고 앞으로 나가 싸웁시다!”
둘째, 종말의 재앙의 주권은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것이고 이 모든 재앙은 교회를 잘 예비 된 신부요 왕 노릇을 할 자들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교회를 탄생시키시고 양육하시며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되기까지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손길은 천사들도 보기를 원하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 종말의 때에, 또 내게 닥치는 어려운 일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나를 거룩한 신부요 처음 창조 때 두셨던 창조의 목적을 회복시키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인내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우리는 ‘마라나타’ 신앙으로 살아야 함을 명심합시다. ‘마라나타’는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의 아람어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에 세 번이나 ‘내가 속히 오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바라는 때에 오지 않으시고 내가 필요로 할 때 오지 않으셔도 우리는 그 마음을 바꿔서는 안 됩니다. 이수일을 기다리는 심순애의 마음이 김중배의 다이아몬드에 넘어가서는 안 되는 것처럼 반드시 지체하지 않고 다시 오실 주님을 향해 일편단심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무리 종말을 얘기해도 우리가 계시록의 종말적 재앙을 다 겪으며 휴거되며 세상을 떠날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 전에 우리는 이미 이 세상을 떴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라나타’를 외치며 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다른 데에 눈을 돌리며 두 집 살림을 해도 될 만큼의 여유로운 삶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마라나타의 신앙으로 살 수 있도록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