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호세아 특공대 1강
음란한 이스라엘,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
말씀/호세아 1:1-3:5 요절/호세아 2:19,20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인간에게 많은 죄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마디로 한다면 하나님을 남편으로 섬기는가 하나님 외의 것을 남편으로 섬기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여러 가지로 비유하여 표현합니다. 목자와 양, 아버지와 아들, 왕과 백성 등입니다. 호세아서는 특히 남편과 아내로서 그 관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계시록은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신랑과 신부로 표현합니다. 신랑과 신부, 남편과 아내, 이는 인간관계 중 가장 깊고 오묘한 관계입니다. 바울도 부부관계를 두고 말하기를 ‘크도다 이 비밀이여’ 하였습니다. 다섯 번의 호세아서 특공대를 통해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면서 남편이신 주님을 향해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있는지 생각해보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1강은 하나님이 호세아를 부르셔서 고멜을 아내로 얻게 하시는 장면입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의 수많은 패역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영원한 남편이 되고자 하는 당신의 인애를 보여주십니다.
I. 음란한 아내를 취하라(1:1-2:1) 1장 1절을 보면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시절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BC 750년 전후로 활동했으니 북이스라엘 멸망 직전까지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여로보암 2세 당시 북이스라엘은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대외적으로 잘 나가면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당시 남유다의 왕이었던 요담이나 히스기야는 매우 신앙적인 왕들이었습니다. 저자는 간혹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을 비교함으로서 형제 국가 사이이지만 전혀 다른 길을 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호세아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처음으로 호세아에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고 하십니다. 첫 말씀치고는 너무 파격적입니다. 일단 위로와 격려, 소망과 비전을 주신 후에 부담스런 말씀을 주셔야 할 것 같은데 처음부터 매우 부담스런 말을 하십니다. 음란한 여자란 아무 남자에게나 몸과 마음을 주는 행실이 음란한 여인을 가리킬 수도 있고 신전에서 일하는 여사제를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들도 신전 의식 후에는 성적으로 음란한 짓을 하였으므로 어떤 식으로 해석해도 무방합니다. 호세아가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을 것을 보면 그는 행실이 깨끗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을 때 주위에서는 어떤 눈으로 보겠습니까? 요즘 공인들이 성적인 일탈로 이미지가 한 번 추락하면 회복되기가 매우 힘듭니다. 선지자 노릇을 해야 하는 호세아에게 있어 이는 장래를 생각할 때 매우 순종하기 힘든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북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떠나 우상을 섬겼습니다. 어느 한 사람도 음란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매춘 행위를 하면서도 문제의식이 없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호세아가 음란한 여인과 결혼을 하면 매우 이상하게 쳐다볼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자신들이 얼마나 정상에서 벗어나 이상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인지 가르쳐주시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또한 호세아가 음란한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도록 이렇게 하셨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대언은 입술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아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어떻게 순종했습니까? 3절을 보면 이에 그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맞이 하였더니 고멜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그는 왜 내가 그렇게 결혼해야 하느냐고 그 이유를 묻지 않았습니다. 왜 나만 그렇게 힘든 삶을 살아야 하고, 오해받는 삶을 살아야 하느냐고 하소연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음란하기로는 첫째가는 여인인 고멜을 취했습니다. 고멜이 임신했다는 것은 호세아가 형식적으로 순종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순종하여 아내로 맞이하고 사랑하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감정적으로 끌리지 않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립서비스이거나 법적인 내용이 그렇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고멜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행함과 진실함이 따르는 진짜 사랑입니다.
호세아와 고멜 사이에서는 세 명의 자녀가 연달아 태어납니다. 첫째의 이름을 이스르엘로 짓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르엘은 하나님이 심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녀라는 뜻도 되지만 여기선 이스르엘 골짜기를 의미하는 이름입니다. 그 골짜기에서 미디안 군대가 초토화 된 일이 있습니다. 사울도 거기서 죽었고 이세벨도 거기서 죽었습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들의 비참한 말로를 보여주는 곳이 이스르엘 골짜기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북이스라엘을 이렇게 폐할 것을 첫째 아들을 통해 나타내십니다. 둘째의 이름은 로루하마라는 이름의 딸입니다. 이는 긍휼이 여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로암미인데 이는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치시고 그들과의 관계를 끊겠다는 식의 이름들입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남유다에서는 이사야라는 선지자가 있었고 그도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짓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아이의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남유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징표를 주셨다면 북이스라엘에게는 그 반대의 징표를 주셨으니 참으로 북이스라엘은 딱합니다.
그렇게 딱해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남편 되신 하나님 앞에서 음란하게 행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집안일을 잘 못할 수도 있습니다. 자식을 잘 못 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외간남자를 남편과 함께 하는 침대로 데려올 수는 없습니다. 그 상황에서 남편은 질투하고 분노해야 마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긍휼히 여기지 않고 내 백성이 아니라고 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본심은 아닙니다. 사랑이 없다면 분노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의 마음을 돌이키고자 하십니다.
10,11절과 2:1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원래의 계획은 이것입니다. 그들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처럼 셀 수 없게 되고 그들을 향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남유다의 후손들과 북이스라엘의 후손들이 함께 모여 다시 돌아올 그 날을 계획하십니다. 그때는 로암미에서 암미(내 백성이라)로, 로루하마에서 루하마(긍휼히 여기리라)로 부르게 될 것입니다.
II. 내가 네게 장가들리라(2:2-3:5) 그런데 현재의 형편은 여전히 음란합니다. 그 백성의 음란함이 고멜과 그 세 자녀의 음란함과 같습니다. 2절을 보면 너희 어머니와 논쟁하고 논쟁하라고 말합니다. 세 자녀는 고멜의 세 자녀가 왜 우리가 이런 수치스런 대접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지 하나님에게 따져 묻는 형국입니다. 하나님은 너희 어머니인 고멜에게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내게 묻지 말고 고멜에게 물어보면 잘 알 것이란 말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그들의 조상에게 물어보면 알 것이고 그들의 삶을 돌아보면 알 것이라는 말입니다. 음란과 음행이 문제입니다. 그것을 속히 제하지 않으면 벌거벗겨 내어 쫓겠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음란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음란한 자식들입니다.
고멜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은 어떤 짓을 저질렀습니까? 5절을 보면 자식을 임신하고서도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습니다. 자식을 임신했다는 것은 호세아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이고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넘치는 사랑을 받았고 그 증거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남자를 좇아갔습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라고 말하는 장면이 5절 중간에 나옵니다. 사실 누가 사랑했습니까? 호세아가 사랑하고 하나님이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당연하게 여기고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남자들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가 생각하는 사랑이 무엇입니까?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고 했다는 데 이런 것들을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물론 중요한 것들이지만 이런 물질과 양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다 표현됩니까? 그리고 이것들이 그가 좇는 남자들이 준 것이 맞습니까?
아닙니다. 지금의 남편이 준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가 남자를 좇아가는 길을 가시로 막습니다. 담을 쌓아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합니다. 아무리 따라가도 미치지 못하게 되고 찾아도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제야 본 남편을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을 얻을 줄 알았는데 얻지 못하고 인생의 낭패를 당하고서야 남편 곁에 있었을 때의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을 알게 됩니다. 그가 먹고 힘을 내었던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남편이 주었던 것입니다. 그가 바알을 위해 사용한 은과 금도 남편이 준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모르고 사랑하는 자가 주었다며 따라가는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의 남편 되심을 드러내십니까? 9-13절입니다. 내가 내 곡식을 익을 계절에 도로 찾는다고 하십니다. 새 포도주도 맛 들 시기에 찾을 것이고 내 양털과 내 삼도 그렇게 찾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열매가 맺을 만하면 그것을 전부 다른 사람들의 손에 빼앗기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사사 기드온 시절에 이스라엘이 밀과 포도를 수확할 시기가 되면 미디안에게 다 탈취를 당했습니다. 아무리 수고해서 열매를 맺어도 그것을 다 다른 사람들이 맛보게 하십니다. 이것이 징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남편 되심을 드러내시는 사건들입니다. 그는 수치를 당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이준 것으로 여겼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황폐화되어 들짐승들의 차지가 됩니다. 그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사랑하는 자를 따라가서 남편을 잊어버리고 향을 바알에게 사르며 섬긴 시일대로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14절부터는 다시 남편의 아내를 향한 긍휼어린 행동입니다. 철딱서니 없이 외간남자를 좇아가다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내 것마저 잃어버리고 수치를 당한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합니다. 포도원을 다시 줍니다. 그 조상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섬세하게 인도하신 것처럼 그렇게 섬겨주고자 하십니다. 16절을 보면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남편이지 바알이 아닙니다. 바알은 주인이란 뜻입니다. 주인은 종을 함부로 대합니다. 많은 식량을 줄 것처럼 나를 따라오라고 하고서는 아무 것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수치를 당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용하는 주인이 아니라 아내 자체를 사랑하는 남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해 바알이라 불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 바알을 섬기는 것도 우상숭배이지만 하나님을 바알처럼 여기는 것도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제한을 시키는 것도 우상숭배이며 하나님에게서 현실적인 유익만을 구하려는 시도도 우상숭배입니다. 오직 남편이 줄 돈과 금은보석과 자동차, 아파트만을 보고 결혼을 했다면 이것은 음란한 짓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남편과 아내로서의 순수한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18절을 보면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는다고 하십니다. 이는 자연 생태계가 이스라엘에게 재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막아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막아주지 않으시면 인간은 자연재해 앞에서 무력합니다.
하나님이 때로는 치기도 하시고 때로는 달래기도 하시며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19,20절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하나님은 장가들고자 하십니다. 이는 남편의 아내를 향한 적극성입니다. 자격이 없어 보이는 우리를 향해 적극적으로 장가들고자 하십니다. 장가들어 영원히 살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에게는 그 백성을 아내로 부르신 것에 대해서 조금도 후회가 없으십니다. 장가를 드는데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장가드십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공의와 정의가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남편으로서 양식을 공급하고 생명을 보호하는 도리를 다합니다. 아내도 남편을 향한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 해야 합니다. 그것이 공의와 정의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남편은 아내의 허물을 계속 감당해주며 회복시키고자 합니다. 이것이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장가드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이야말로 참 남편임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은총과 긍휼을 호세아에게 어떻게 알려주십니까? 3장 1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그 신들에게 드린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하십니다. 외간남자를 사랑하는 아내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너는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 고멜을 사랑하라고 방향을 주십니다. 고멜은 3명이나 자녀를 낳았습니다. 호세아의 위로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을 좇아서 떠났습니다. 자기에게 온갖 양식을 주지도 않고 피해만 보게 하는 그를 좋다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은 열 다섯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그를 사가지고 데려와야 했습니다. 한 사람의 목숨 값의 반 이상을 주고 아내를 찾아와야 했습니다. 아내가 잘못했고 아내를 꼬신 그 남자가 불의함에도 불구하고 돈은 호세아가 내야 했습니다. 이것이 속전입니다. 예수님은 죄에 눈이 멀어 사탄의 종이 된 우리를 위해 도리어 자기의 목숨을 속전으로 지불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속전은 아내를 그 남자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의미와 함께 이제부턴 남편에게 온전히 속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호세아는 음란한 아내를 위해 자신의 전 인생을 드렸습니다. 모든 손해를 감수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아쉬운 말을 합니다. 3절을 보면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고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고 말합니다. 이를 통해 고멜은 남편 호세아의 진정한 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돌아와서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백성이 될 것입니다.
호세아는 장차 이 땅에 오실 메시아의 그림자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 인생을 향한 당신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는 자격이 안 되는 음란한 여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결혼했고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럼에도 분수를 모르고 다시 사랑한다고 생각한 남자들을 찾아 떠났습니다. 호세아는 다시 타이르고 격려하여 데려왔습니다. 그럼에도 고멜은 다시 떠나갔습니다. 이번에는 속전의 대가를 치르며 그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를 통해 끊임없이 배반하지만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의 형상이십니다. 우리도 때로는 물질이, 자녀가, 학업이, 직장이 내게 먹을 것을 준다고 생각하여 의지하였습니다. 우상을 숭배했고 영적 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 길을 막기도 하셨고 열매를 가져가기도 하시는 공의와 정의로 그 사랑을 나타내기도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영접하길 기도합니다. 또한 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여러 번 하나님을 떠나는 영혼들을 은총과 긍휼로, 내가 손해보고 내가 피해보는 속전 행위를 치르면서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