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5강
참된 예배
말씀 / 요한복음 4:1-26
요절 / 요한복음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
여러분, 행복하세요? 어떤 분은 얼굴이 다림질한 것처럼 쫘악 펴져있고 행복해 보입니다. 다른 분들은 좀 지치고 피곤해 보이고 얼굴에 근심의 주름이 있어 보입니다. 사람의 행복에 중요한 것은 뭘까요? 명예, 권력, 부일까요? 니모데모 말씀 통해 그런 것이 아니라고 이미 배웠습니다. 어떤 사람은 행복한 삶의 조건에 배우자를 꼽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도 아님을 알려 줍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행복의 조건은 예배입니다. 오늘 이시간 사람의 행복에 예배가 왜 중요한 지 배우고자 합니다. 예배란 무엇이며, 어떻게 예배를 드릴 때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지 잘 배울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님께서 아셨습니다. 세례 하면 요한이었는데, 예수님이 세례요한의 세례사역을 능가한 것입니다. 그런데 내막을 보면 세례요한은 세례를 혼자 베풀고 예수님은 주로 다수의 제자들이 베풀었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제 세례요한보다 예수님을 더 주목했습니다. 이것을 아신 예수님은 모든 것의 중심지인 유대 땅을 떠나 한적한 갈릴리 지역으로 가서 거기서 사역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보통 유대에서 갈릴리 지역으로 갈 때는 요단강 동편으로 가서 주욱 올라가다가 다시 요단강 서편 갈릴리로 들어가는 루트를 사용합니다. 그 이유는 유대와 갈릴리 중간에 있는 사마리아 지역을 부정하게 여기고 위험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4절을 보면,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해서 갈릴리로 가고자 하셨습니다. ‘하겠는 지라’는 말씀에는 예수님의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위험하고 부정하게 여기는 지역에 가고자 하신 것입니까? 이것은 사마리아 지역에 예수님이 만나 섬기고 구원해야 할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하지 않으셨습니다. 훗날 선교명령을 내리실 때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 1:8).
예수님이 도착하신 곳은 사마리아의 수가란 동네였습니다. 그곳은 야곱이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웠습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준 땅은 세겜 땅입니다. 세겜은 아주 비옥한 곳으로 야곱이 빨리 하나님의 명을 따라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발걸음을 멈추고 땅을 사서 정착하려다가 불미스런 일을 당했던 곳입니다. 후에 야곱은 사랑하는 요셉에게 그 땅을 주었고 요셉의 뼈가 이곳에 묻힙니다.(수 24:32)
6절을 보면, 수가에 야곱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야곱의 우물은 야곱이 이 지역에서 살면서 자신과 자신의 아들들과 가축들을 먹이기 위해 팠던 우물입니다. 예수님은 여기까지 걸어오느라 너무 피곤하고 지쳐 우물곁에 털썩 주저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초이전부터 계셨던 로고스 이셨지만 인성을 입으셨기에 우리랑 똑같은 피곤과 목마름을 느끼셨습니다. 예수님이 수가 성 우물가에 도착한 시간은 여섯 시 곧 우리 시간으로 정오였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 때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보통 여인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물을 길으러 오곤 하였는 데 이 여자는 혼자 온 것을 볼 때 사연이 있는 여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여인에게 직접 말을 거신 이유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기 때문에 예수님과 여인은 단 둘이서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목이 말라 물을 얻어 마시고자 하는 마음도 있으셨지만 이 여인의 영혼의 갈증을 아시고 그녀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수를 주시고자 대화를 시도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요청에 대한 이 여인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9절 말씀을 여성분들이 읽어주시겠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이 말은 예수님의 요청을 탐탁지 않게 여기며 차갑게 거절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거절하는 이유에 대해 저자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상종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상종이란 서로 따른다, 친하게 지낸다는 말인데 상종하지 않는 다는 것은 그 반대로, 이들의 반목은 기원전 10세기에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갈라질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기원전 8세기에는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점령되면서 사마리아 지역은 혼혈정책의 대상이 되었고 유대인들은 이때부터 사마리아인들은 민족의 순수성을 잃었다고 보았습니다. 기원전 6세기에는 남유다 백성들이 포로에서 귀환하여 성전을 지을 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전을 같이 짓자고 하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인이나 다름없다고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기원전 5세기에 사마리아 사람들도 사마리아에 따로 성전을 세웠습니다. 기원전 128년에는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에 가서 성전을 파괴하고 불태우고 제사장들을 죽이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이 같은 민족이었으나 서로 적대시하게 된 내력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자기들을 멸시하고 같은 민족으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을 좋아할 리 없었습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영적으로 도와주고자 선의로 접근했으나 차가운 반응을 보일 때 어떻게 하기 쉽습니까? “됐다. 내가 뭐 아쉽냐” 이런 마음으로 대화를 그만두기 쉽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 여인과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가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물과 그녀에게 말을 걸고 있는 자신이 어떤 분인지 관심을 갖도록 도우셨습니다. 누구나 선물을 좋아하고 여성들은 더욱 그런데, 귀가 솔깃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곧 예수님이고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를 말합니다. 생수(living water)는 ‘살아있는 물’ 혹은 ‘살아있게 하는 물’로서 물리적인 물이 아닌 다 죽어가던 영혼도 살게 만드는 영혼의 생수를 뜻합니다.
예수님이 갑자기 물을 달라고 하시더니 이젠 역으로 자신이 ‘생수’를 주시겠다고 하니 여인은 의아했습니다. 예수님이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지 정확히 알 수가 없어 질문합니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 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삽나이까?”(11)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두레박이 없습니다. 야곱의 우물은 30미터 깊이이고 물은 적어도 20m 아래 있는 데 무슨 수로 물을 길어 생수를 준단 말입니까?
여인에게는 야곱과 야곱의 우물물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12) 야곱의 우물은 1,700년 된 우물입니다. 1,700년 동안 마르지 않고 생수를 제공했기에 대단한 우물입니다. 이만한 샘을 어디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분이길래, 또 대체 어디서 이 우물물보다 좋은 생수를 주신단 말입니까?
이에, 예수님은 야곱의 우물보다 월등히 나은 자신의 우물물을 소개하십니다. 13,14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야곱의 우물물은 그 물을 길어 마시면 잠깐 시원하지만 다시 목이 마릅니다. 그 이유는 마신 물이 다 배출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동이를 가지고 다시 우물을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어떻게 다릅니까?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마시게 되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그것을 마시는 사람 속에 들어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우물)’로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면 그냥 물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우물을 마시는 셈이 됩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주시는 물과 ‘사람 속에 생기는 우물’은 무엇을 말할까요? 이것은 생명의 말씀과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신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영혼의 갈증이 근본적으로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상황과 조건에 좌우되지 않는 내면에 평강과 만족과 기쁨, 든든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개인차는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한 다음에도 여전히 세상의 우물을 기웃거립니다. 또한 왠지 답답하고 만족이 없고 피곤하고 짜증이 나고 기쁨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 안에 있는 우물을 잘 활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7:38절을 보면,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이라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심령 깊은 곳에서 강같은 만족과 기쁨과 평강이 흘러 나온다는 것입니다. ‘강같은’이란 만족과 영향력의 정도를 뜻합니다. 어떤 사람의 심령에서는 청계천 수준의 만족과 기쁨이 흘러 나옵니다. 어떤 사람의 심령에는 찔끔찔끔 흘러내리는 수돗물 같은 수준의 만족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심령은 꽉 막힌 수도처럼 아무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처럼 같은 성령, 다른 삶을 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영생의 샘물을 꼭 잠가두어 불신자나 다를 바 없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죽지 않을 만큼만 영생수를 취하고 있진 않습니까? 예수님을 만나고도 이 우물, 저 우물 다른 우물을 파고 있진 않습니까? 아예 세상 우물속에 빠져 있진 않습니까? 예레미야 선지자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이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 2:13,14) 터웅(터진 웅덩이)을 찾으니 얼마나 허무하고 힘이 빠지겠습니까? 우리가 이제는 내 안에 있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우물물’을 막지 않고 수도꼭지를 틀어 우리 안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오게 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구체적으로 말씀과 기도를 가까이 하는 것이 수도꼭지를 뜨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들은 사마리아 여자는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라고 예수님이 주시는 물에 대한 소원을 피력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왜, 갑자기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신 것일까요?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통 지고 가도록 혹은 생수를 같이 마시도록 함입니까? 남편문제가 여인이 영생수를 맛보지 못하게 하는 문제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영혼의 갈증을 남편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그녀가 근본적으로 목마른 인생을 사는 이유였습니다.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자 여인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이것은 자신의 치부를 가리는 말이었을 수도 있고 진실한 영혼의 고백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말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녀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친정아버지처럼 자상하셨습니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예수님은 그녀의 삶의 이력을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한마디로 그녀의 삶은 남편 찾아 삼만 리였습니다. 더 나은 남편을 찾아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었습니다. 그녀의 남편 바꾸기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지금 그녀는 6번째 남자를 사귀고 있습니다. 그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이유는 사귄 지가 얼마 안 되어서 이거나 결혼하면 실망하기에 결혼을 추진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은 대표성 있는 사람들을 주인공들로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다 얻고 성공의 정점에 있는 사람을 대표합니다. 5장에 나오는 38년 된 병자는 정말 깊은 절망가운데 누워있는 사람을 대표합니다. 그러면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은 어떤 사람을 대표하고 어떤 간접 체험을 제공합니까? 그는 율법사회에서 남편을 3번도 아니고 5번 바꾸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남편 바꾸기는 해볼만큼 해본 사람입니다. 남편 바꾸기의 달입니다. 그녀의 삶이 주는 메시지는 세상에 어떤 배우자도 참 만족을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이야기는 당연한 이야기 입니다. 영혼의 갈증을 어떻게 사람이 채워줍니까? 영혼의 갈증을 남편이 해결해 준다면 그것은 삽겹살을 많이 먹으면서 영혼이 만족스럽게 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영혼은 돼지고기를 한 점도 먹을 수 없습니다.
여자는 예수님이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주님을 영적 통찰력을 가진 선지자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있던 영적 고민을 꺼내 질문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배라는 단어가 여기 등장하여 본문에 10번이나 나옵니다. 이를 볼 때 우리 인간내부 가장 깊은 곳에는 예배의 desire가 있으며 예배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목마름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이며 우리가 가장 만족스런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영혼의 소유자이고 그 영혼은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란 무엇입니까? 원어의 뜻은 ‘엎드려 절하는 것’입니다. 대상을 높이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영어로는 worship 인데 이 말은 worth + ship으로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입니다. 예배는 인간이 우주와 자신을 지으신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높이고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는 행위입니다. 이 예배는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의 문제입니다. 예배가 사람의 영혼의 갈증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진정으로 참 만족을 누리게 합니다. 한마디로 예배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우물역할을 합니다.
여인은 예배의 장소문제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유대인들은 그것을 부정하였고, 얼마나 그리심 산 예배를 부정적으로 보았는 지, 그리심 산에 와서 사마리아인들의 성전을 파괴하고 불태우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사마리아 사람으로서 예배장소에 대해 고민할 만합니다. 예배 장소에 대해 오늘날도 반드시 자기 교회에서 드려야 하며, 코로나 시대에도 반드시 오프라인 예배만을 드려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럼, 예배에 있어서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 대상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란 호칭은 우주와 인간의 존재의 근원이란 뜻입니다. 예배의 대상은 사람이 아닙니다. 남편도 아니며 자기 자신도 아닙니다. 누구든 사람을 높이게 되면 즉 예배하게 되면, 그때부터 심령이 막히고 영생수가 나오지 않습니다. 특히 자기를 높힐 때 그때부터 영생수 수도꼭지가 잠기게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 아버지를 가장 높이고 섬기고 교제할 때 우리 인생은 영생수가 콸콸 넘치고 행복합니다.
둘째, 예배에 있어 장소보다 구원자가 중요합니다. 21절에서 예배는 장소보다 때가 중요하다고 하셨는 데, 22절을 보면 그 때라는 것은 구원자가 오시는 때를 말합니다. 구원자는 유대인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때 이슈의 핵심은 예배를 가능하게 하는 구원자의 존재입니다. 23절을 읽겠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 아버지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릴려면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24절에도 같은 내용이 반복되어 있습니다. 예배는 열정만 가지고 드린다고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진리에 따라서 드려야 합니다. 그 성령과 진리를 따라 드리는 예배가 바로 예수님을 통한 예배입니다.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의 보혈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로 하나님 앞에 절대로 설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낡아지고 더러운 걸레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인들의 의도 대동소이하며 오히려 하나님앞에서는 더 더럽고 악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 의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의이신 그리스도만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가 참된 예배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파괴되고 예수님이 새 성전으로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이제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되었습니다. 예배에 있어서 장소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프라인에서 드리든, 온라인으로 드리든 정말 예수님을 통해 예배드리면 됩니다. 어디서든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집에서 그것이 잘 안된다면 코로나 상황이지만 현장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23b를 보십시오. 아주 중요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참된 예배는 인간을 만족시키는 동시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말씀을 맺으면서, 우리가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기를 기도합니다. 예배는 목숨보다 더 귀하며 인간의 인간다움의 핵심이며 행복의 비결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러 나올 때 참된 자세를 가지고 있는 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일예배가 끝나면 예배가 다 끝난 것으로 알고 한주 동안 삶이 완전히 흐트러져 삽니다. 그러나 참된 예배는 주일예배가 끝난 다음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이 생활예배입니다.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가장 높이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과 교제하는 삶을 삽니다. 그럴 때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흘러 넘침을 경험합니다.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칩니다. 외부 상황과 조건이 안 좋은데도 내면에서는 그럴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바쁘고 피곤해도 지치지 않고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맛보는 조에가 넘치는 삶을 삽니다. 우리 모두가 참된 예배를 드림으로 ‘솟아나는 영생의 샘물’을 맛보고 더 나아가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여인은 그리스도가 오시면 모든 것, 특히 예배에 대한 확실한 것들을 알려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그 그리스도이심을 밝히셨습니다.
결론입니다. 우리의 현재의 삶이 어떻습니까? 터덜터덜 야곱의 우물가로 걸어 나왔던 사마리아 여인과 같습니까? 영생수가 솟아나고 생수의 강이 흐르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참된 예배를 회복하므로 생수의 강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