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요한복음 제 6 강
말씀을 믿고 가더니
말씀/ 요한복음 4:27-54
요절/ 요한복음 4: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이번에 청년비전스쿨을 하면서 우리 청년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가 무엇인지 물어보니 그 중에 하나가 장래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고민이 되고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보이는 세상이 수시로 변하니 답이 안 나옵니다. 우리를 불안케 합니다. 우리가 보이는 것에 휘둘려 살면 이처럼 불안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삶에 대해 제시해 주고 있는데, 그것은 말씀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가지고서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고 하십니다.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이 병에 걸려서 분명히 죽어가고 있는데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하시고 실제로 말씀을 믿고 갔더니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까? 말씀을 믿고 가는 자입니다.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자가 기적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믿음의 눈이 뜨여지길 원합니다.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 우리 구주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기를 기도합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마을로 먹을 것을 사러 갔던 제자들이 돌아왔을 때 예수님은 여자와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 남자인 예수님이 생전 처음 보는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시는 것은 당시 율법 사회의 통념으로 매우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존경하는 제자들은 차마 물어볼 수 없었죠. 그런데 갑자기 그 여인이 물동이를 우물가에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가기 시작하였습니다. 100미터 선수가 달리듯이 전력질주하여 마을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보기에 참으로 이상한 사건이었습니다. 여하튼 제자들은 자신들이 가져온 음식을 자랑스럽게 예수님께 내놓았습니다. “랍비여 잡수소서” 예수님이 기뻐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은 ‘혹시 누가 음식을 갖다 드렸나? 사마리아 여자가 먹을 것을 주었나?’ 생각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자신이 말하는 양식이 무엇인지를 제자들에게 알려주십니다. 다 같이 34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 세상 일보다 하나님의 역사를 섬길 때 더 힘을 얻는다는 뜻으로 간단히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는 좀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양식을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표현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의 계급장을 떼고 보냄 받은 ‘종’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행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따라 행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뜻대로 행하며 자기의 명예를 얻음으로 기분 좋아합니다. 자기의 일을 하고 자기의 목적을 이루는 것을 최고의 양식으로 삼습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실상은 자기 뜻대로 행하며 자기 뜻을 이루고자 애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자기의 명예를 멀리하셨습니다. 자기가 작아지더라도 오직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며 하나님의 명예가 높아지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기쁨과 힘을 충만히 얻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기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되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을 양식으로 삼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을 최선을 다해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돕는 과정에서 여러 번의 위기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냉소적으로 대하고 비교하고 영적인 말씀을 육적으로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이 때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포기치 않고 인내하시며 끝까지 도우셨습니다. 그녀가 진리를 깨달아 거듭나기까지 도우셨습니다. 실제적 성공을 이루셨습니다. 한 여인이 진리를 알고 그 마음에 빛이 임하고 새 인생을 살게 된 것을 보았을 때 예수님은 더 없는 행복과 힘을 얻으셨습니다. 우리도 그러하지 않습니까? 내가 말씀으로 돕던 사람이 주일예배에 나오고, 더 나아가 믿음의 가정을 이루고, 거기에다 선교사로 파송될 때 얼마나 기쁘고 행복합니까? 그동안의 모든 수고가 눈 녹듯 녹아 내립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종도 자기 주인의 아들 이삭의 혼사를 온전히 이룰 때까지 앞에 놓여진 진수성찬을 먹지 않은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온전히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온전히 이루도록 사람들을 돕는 것이 중요합니다. 복음역사에는 항상 위기가 있습니다. 중간에 그만두면 실패감과 함께 생명의 열매를 얻지 못합니다. 갈6:9절에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인내로 온전히 이루면 생명의 열매도 얻고 더 없는 힘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35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당시, 밀 추수까지는 약 넉 달이 남았습니다. 이것이 보이는 세상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는 이미 추수할 때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사마리아 선교는 멀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방 땅과 같았습니다. 그리심 산에서 잘못된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너무나 타락하여 다섯 번이나 결혼하는 여자가 있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추수할려면 아직 멀었고 적어도 넉 달은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 달은 삼 세 번이니 소망이 있지만 넉달은 소망이 없습니다. 이렇게 사마리아를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하십니다. 지금 추수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추수하는 것이 너무나 긴박하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코로나로 인해 농촌에 일손이 부족하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일손이 모자라 제 때 추수하지 못하면 그동안 애써 키운 작물들을 다 그냥 버려야 합니다. 추수를 다음으로 미루었다가는 알곡이 다 땅에 떨어져 썩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땅을 반드시 통행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까? 내일 인생을 비관하여 자살하여 죽을지도 모르는 한 여인을 가장 먼저 타겟 삼았는지 모릅니다. 일부러 제자들을 다 보내시고 여인과 단 둘이서 집중하여 일대일 말씀공부를 하고자 의도했는지 모릅니다. 이제 예수님의 수고로 인하여 여인은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열정적이고 확신에 찬 전도자가 되어 물동이를 버려둔채 동네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마치 추수하기 위해 밭을 향하여 달려가는 콤바인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추수하게 될 사마리아 땅에 대한 비전으로 충만하셨습니다.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섬기는 이 시대, 그리고 성대, 한성대, 서울대 의대, 국민대, 상명대, 외대가 어떤 모습으로 보이시나요? 아직 추수할 때가 아닙니까? 이방화되어 영적인 관심이 없나요?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하나님의 은혜가 지금 부어지고 있습니다. 구원의 날이 지금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후로부터 모든 시대는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희어져 추수하게 된 영혼들이 보입니다. 가족가운데서 아직 구원받지 못한 영혼이 있습니까? 직장 동료나 후배, 캠퍼스 학생들, 나와 관계성을 맺고 있거나 일상사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이 우리의 전도 대상입니다. 안타까운 영혼들의 탄식 소리가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나를 추수해 주세요~’ 어떤 분이 아침마다 기도하면서 이렇게 기도한다고 합니다. “주님, 오늘도 한 건 하게 해 주십시오.” 여기서 한 건은 전도를 말합니다. 준비된 영혼을 만나게 해 달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루를 시작할 때 드려지는 기도에 이런 기도가 있습니까? 이런 기도를 드린다면 그 사람은 주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루에 한 건을 못하더라도 일주일에 한 건은 해야 하지 않을까요?
36절을 봅시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추수에는 씨를 뿌리는 작업과 거두는 작업이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뿌리고 그 열매를 내가 거두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37절에 보면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고 했습니다. 내가 뿌리는 씨앗을 다른 사람이 거둘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심은 것을 내가 거둘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뿌린 씨가 언제 자랄지, 누가, 어디서 거둘지 모릅니다. 우리는 소망가운데 복음의 씨를 뿌릴 뿐입니다. UBF에서 뿌렸는데 지역교회에서 열매를 거둔 경우도 있고, 지역교회에서 뿌렸는데 우리 UBF에서 거두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의 기쁨이 있고, 열매를 거둘 때의 기쁨이 있습니다. 다 귀한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다 같이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UBF 한 목자님이 연구 발표를 하였습니다. 우리 모임에서 한 사람이 목자로 서기까지 7명의 선배 목자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추수 역사는 동역의 역사입니다. 때로는 씨를 뿌리는 자로, 성장하도록 돕는 자로, 훈련관으로, 위로자로, 추수하는 자로 각자 쓰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추수하게 되지만 그들이 직접 뿌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세례요한을 포함한 이전 전도자들이 뿌리고 심은 것을 그들이 거두는 것입니다. 저는 대학시절, 전도를 많이 했습니다. 첫 번째로 복음을 전한 사람은 남승찬이라는 친구였는데 제가 복음을 듣고 거듭난 후 감격하여 그 친구에게 달려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저는 수업이 없을 때면 캠퍼스 이곳 저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등학교시 버스의 맨 뒷좌석에 일부러 앉아 옆에 앉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곤 했는데, 믿겠다고 하여 버스안에서 영접 기도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을 말씀으로 돕게 되었는데, 제가 졸업할 때는 모두 떠나고 제자로 남은 열매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저는 치과의사가 되었지만 행복하지 않았고 그동안 헛수고한 것 같았고 실패의식 속에서 힘들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고 창12:2 말씀으로 다시 힘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보니 그 때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전도했던 과 동료중에 현재 교회를 다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첫 전도했던 친구는 나중에 UBF에 와서 믿음의 가정을 이루고 목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전에는 어떤 성형외과의사로부터 한통의 전화가 왔습니다. ‘형, 나야 성원이 문성원, 나 기억나?’ 저는 속으로 ‘기억이 안나는데~ 누구지?’ 생각했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35년전 제가 자기를 성경공부 시켜주었다는 것입니다. 현재 사랑의 교회에 다니고 있는데 자기를 도와주었던 나를 잊지 못하여 수소문하여 전화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인터넷으로 이 분의 이름을 검색하여 사진을 보니 어렴풋이 생각이 났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역사는 이처럼 장소와 시대를 넘어 동역하는 역사요,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일에 참여한 우리 모두는 다 같이 그 기쁨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 거두지 못할지라도 소망가운데 열심히 복음의 씨를 뿌려야겠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여자의 말이 그가 내가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의 부끄러운 과거까지 말하며 감격가운데서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녀의 확신에 찬 증거에 동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40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유대인인 예수님이 사마리아 동네에 가서 그들의 집에 머문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꺼이 그들에게 가시고 이틀을 머무셨습니다. 머무시며 그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인해 믿는 자가 더욱 많아졌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사마리아 여인의 간증을 통해 예수님을 믿었지만 이제는 직접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진실로 예수님이 세상의 구주이신 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에서 기적을 하나도 베풀지 않으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43절부터는 예수님께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에서 이틀을 머무시고 갈릴리로 향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증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향인 갈릴리에 이르자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언 듯 보기에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과 다르게 보입니다. 예수님이 말실수하셨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실상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명절 때 예루살렘에서 하신 일, 즉 행하신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의 영접은 요1:12에 나오는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참된 영접이 아니라 구원과 관계없는 가짜 또는 짝퉁 영접이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가짜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유익을 얻어내기 위해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한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자기 맘에 안 들면 언제든지 예수님을 떠날 수 있고 예수님을 배척하고 박해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과 연합할 수 없습니다. 나중에 보면 그들 중에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던 자들도 있지 않았습니까?
4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예수님이 지난 번 첫 번째 기적을 베푸셨던 가나에 다시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왕의 신하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여기 왕은 갈릴리의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를 가리킵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이니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그런 아들이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34km를 달음질하여 왔습니다. 자기 아들의 병을 제발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였습니다. 얼마나 절박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48절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니라” 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이 말은 ‘표적과 기사를 보는 것에 네 마음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표적은 사람들의 주의를 예수님께로 이끌게 합니다. 그러나 표적 자체가 믿음을 주는 것이 아니죠. 표적 신앙은 자기의 요구대로 무엇인가를 체험하기 원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자기 중심적입니다. 표적 신앙은 예수님 인격에 관심이 있지 않고 그 능력에 관심이 있습니다. 표적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하면 정말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한 것이 됩니다. 한마디로 ‘꽝’입니다. 예수님께서 표적을 나타내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발견하여 알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를 믿어 영생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최종 목적입니다. 참된 믿음은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왕의 신하가 이러한 참된 믿음을 갖기 원하셨습니다. 왕의 신하는 다급하여 예수님을 재촉했습니다.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 오소서” 자기 집에 와서 안수를 하든, 치료를 하든, 무언가를 해 주길 바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실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꿈쩍도 안합니다. 50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표적을 보고자 왔는데 보여주지도 않고 가라고 하니 이 얼마나 열 받을 일입니까? 왕의 신하가 계속하여 표적 신앙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아니 좀 같이 가서 고쳐 달라니까~. 그냥 가라뇨? 말이 됩니까?’ 따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왕의 신하가 어떻게 합니까? 말씀만 듣고 그냥 갑니다. 순종하여 갑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나죠? 가는 도중에 종들을 만났습니다. 아이가 살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정말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아이가 낫기 시작한 때를 물어보았습니다. 어제 일곱시에 열기가 떨어졌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네 아들이 살이 있다’ 말씀하신 그 때 인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왕의 신하는 ‘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다’ 말씀하신 그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되었습니다. 죽어가는 자도 살리시는 생명의 주요, 시공간을 초월하는 말씀의 권세자 이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와 그 온 집안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아마 왕의 신하는 자기 아들이 죽을 병에 걸렸을 때만 해도 ‘우째 이런 일이 우리 가정에 벌어졌을꼬? 지지리도 운이 없네’ 불행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아들이 죽을 병에 걸린 것이 복이었습니다. 만약 아들이 죽을 병에 걸리지 않았었더라면 남부러울 것이 없는 고관대작이 목수인 예수님을 찾았겠습니까? 예수님께 와서 애걸했겠습니까? 그 앞에 무릎을 꿇었겠습니까? 무엇보다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고 영생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큰 복을 받은 것입니까?
우리 삶속에서 일어나는 고통스러운 일들도 오히려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를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지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믿고 모든 일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인내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믿음을 체험하는 좋은 기회로 삼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표적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이요 축복임을 보여줍니다. 본문은 ‘표적과 기사를 보는 것’과 ‘말씀을 믿는 것’과 대조되어 나옵니다. ‘百聞不如一見’이란 말이 있습니다. 직접 보는 것이 그만큼 강렬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가치관은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seeing is believing)’ 입니다. 그런데 성도에게는 보는 것보다 더 강렬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believing is seeing)’ 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5:7에서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 했습니다. 또 예수님도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은 보이지 않으나 진리입니다. 영원합니다. 확실하게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말씀에 기초한 믿음이 참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며,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게 하며,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여 가능하게 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의 진리들이 참으로 맞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말씀을 따라 인생을 살아가게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을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게 하며 인격적이며 친밀한 관계성을 맺도록 해 줍니다. 이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신 첫 번째 표적과 두 번째 표적을 행하셨는데, 이 두 표적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두 표적 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창조의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자를 통해 능력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물을 항아리에 채우라”,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하신 주님의 말씀에 하인들이 순종하였을 때 물이 포도주로 변하였습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이 말씀을 왕의 신하가 믿고 순종하여 갈 때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나 죽어가던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에 순종하여 나아가는 것을 요구하십니다. 말씀을 믿고 순종해서 나아가면 죽어가는 자도 살아납니다. 아직 때가 아닌 것 같지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는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나가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양을 만나게 됩니다.
결론입니다. 주님은 2천년전 하셨던 말씀을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십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주님의 말씀이기에 시공간을 초월하여 현재에도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믿고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예수님의 인격과 사랑을 깊이 알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