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요한복음 7강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말씀/ 요한복음 5:1-47 요절/ 요한복음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외면하는 곳으로 가십니다. 그곳에서도 가장 비참한 가운데 있는 한 병자를 만나주십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우리나라에서도 추석이나 설같은 명절이 되면 전국민이 이동합니다. 유대인들도 명절이 되면 전국에 있는 유대인들, 재해외 유대인 동포들까지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양을 준비하여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양을 깨끗하게 씻고 Sheep Gate - 양문을 지나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베데스다는 ‘베트 헤세드’ 자비의 집이라는 뜻인데 이곳에 사람들이 쉴 수 있는 행각, 그러니까 벽이 없이 기둥과 지붕만 있는 건물 다섯 개가 있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이 행각 안에 각종 병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그들은 맹인, 다리 저는 사람, 사지가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는 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이 좋은 명절에 왜 이렇게 행각에 모여 있는 것입니까? 본문을 보면 그것은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을 휘젓는데 가장 먼저 들어간 환자는 어떤 병이든지 낫는다는 전설같은 신화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즘 청년들도 비트코인에 투자해서 5만원이 50만원이 되고 50만원이 500만원이 되었다는 전설같은 신화를 붙들고 있습니다. 어떤 청년은 매달 10만원씩 투자해서 복권을 삽니다. 제가 대충 계산을 해 보았는데 로또의 확률이 800만분의 1이니까 매달 10만원씩 100년을 사면 한 번 당첨될 확률이 대략 1.5% 정도 되었습니다. 매달 100만원씩 100년을 사면 15% 정도 됩니다. 이 정도면 거의 로또에 당첨되는 것은 전설이나 신화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인구가 5천만명이 되다보니 로또에 당첨되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습니다. 분명 신화같은 이야기인데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 기록된 이 사건이 늘상 있는 일이었다면, 그러니까 천사가 종종 자주 내려왔다면 아마도 성경 이외에 다른 문서에 그 기록이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를 볼 때 그러한 사건은 정말 로또 당첨처럼 사람들의 뇌리에 잊혀질만하면 기적처럼 일어났던 일로 보입니다. 본문의 베데스다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에릭 프롬이 일찍이 그의 저서 ‘건전한 사회(The sane society)’에서 갈파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는 베데스다 연못가처럼 병든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병든 사회입니다.
오늘날 이 사회는 어떤 점에서 병이 들었습니까? 에릭 프롬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 사회는 사람 자체가 목적이 되지 못하고 수단화됨으로 병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재능을 가진 영재가 태어나면 국가는 영재의 그 재능을 세계무대에서 국가의 위상과 힘을 키우는 수단으로 생각하고 대우합니다. 이것은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능을 가진 자녀가 태어나면 부모는 그 자녀를 자신의 명예와 영광과 영향력을 확대해줄 하나의 도구로 생각합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이 사회가 병이 든 것은 우리 마음에, 또 우리 사회에 하나님이 차지해야 할 부분을 나의 자아로 대체한 것이 그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기독교 교리문답을 보면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두신 뜻을 이루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첫 인류인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나의 자아가 위치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습니까? 모릅니다. 그리고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에 관심이 있습니까? 나의 자아가 무한히 확장되고 나의 영향력이 무한히 커지는 것에 있습니다. 나의 존재 이유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내가 영광받고 존귀함을 얻고 내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기쁨과 즐거움과 쾌락과 만족을 다 누리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병이 무엇입니까? 영어로는 disease인데 이것은 무언가 불편한 상황입니다. 우리 몸의 각 기관들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선을 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킬 때 그것이 곧 가장 편안한 상태이고 건강한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간에 있는 세포는 반드시 간에만 있지 쓸개로 가지 않습니다. 우리 속담에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한다는 말이 있는데 만약 간 세포가 쓸개로 갔다가 위장으로 갔다가 한다면 난리가 날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만약 배에 간 세포가 증식하여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배에 특수 보호장치를 하여 간을 보호해야 할 것입니다.
병중에서도 암이 무서운 것은 암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으면서 무한히 그 힘과 영향력을 확대하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암은 본래 분명 우리 몸의 일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무한한 자기 확장을 시도합니다. 세포는 본래 자기 복제와 분열의 과정을 거친 후 스스로 소멸해야 하는데 이 암세포는 소멸을 거부합니다. 계속하여 자기 복제를 하고 궁극적으로는 온 몸을 전부 암 세포로 뒤덮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병든 자아는 바로 이 암세포와 같습니다. 병든 자아는 결코 만족함이 없습니다. 평생 돈 걱정 없이 먹고 살만큼 돈을 벌었음에도 불구하고 불법 땅투기 등 온갖 편법과 방법을 동원하여 돈을 벌기 원합니다. 권력을 가져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더 큰 권력을 갖기 원하며 온갖 불의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권력을 자녀들에게 물려주기 원합니다. 이를 통해 자아의 무한한 확장을 시도합니다. 건강한 자아는 자기가 지켜야 할 자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병든 자아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선을 넘어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 합니다. 영적으로 볼 때 병든 자아는 암에 걸린 것과 같습니다. 육신의 암의 경우 타협이란 없습니다. 암이 내 몸에서 완전히 사라져야 합니다. 그래야 완치입니다. 병든 자아도 마찬가지입니다. 타협이란 없습니다. 병든 자아는 죽어 없어져야 합니다. 병든 자아가 죽고 주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또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는 신화같은 대박의 환상을 심는다는 점에서 베데스다 못가와 같습니다. 과거 제가 학생이었을 때에는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에 합격하면 병든 자아가 나음받을 수 있다는 전설같은 환상이 있었습니다. 요즘에는 그런 환상이 많이 깨진 것 같습니다. 얼마 전 고려대 동아리 방에 40대 아저씨가 몰래 동아리방에서 게임을 하다가 발각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누구냐고 묻자 동아리 선배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달아났습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먹다남은 돼지족발과 깻잎이 발견되었습니다. 나중에 잡고 보니 동아리 선배는 아니었지만 정말 고려대 선배였습니다. 취업도 안되고 백수생활하다가 갈 곳이 없자 모교인 고려대를 찾아가 한 동아리 방에 몰래 들어가 거기서 숙식을 하며 게임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현실을 볼 때 명문대 간다고 삶이 바뀔 수 있다는 환상은 정말 많이 무너진 것 같습니다. 대신 개인 유투브 방송을 잘 해서 인기를 끌면 대박을 칠 수 있다는 환상이 새롭게 생겨났습니다. 요즘 먹방 방송이 큰 인기인데 호리호리한 아가씨가 나와서 산더미같이 많은 닭튀김, 떡볶이, 돼지족발, 삼겹살을 콜라와 함께 하나도 남김없이 먹어치우는 방송입니다. 이렇게 먹고 살이 찌면 곧바로 인기가 하락하기 때문에 살이 찌지 않기 위해 열심히 운동을 합니다. 그리고 또 먹방을 방영합니다. 또 먹방을 한 달에 한 두 번 하다말다 하면 금방 인기가 하락하기 때문에 일주일에 몇 번 씩 꾸준하게 정기적으로 먹방을 해야 합니다. 먹방을 할 때마다 다시 산더미같은 닭튀김, 떡볶이, 돼지족발, 삼겹살을 콜라와 함께 앉은 자리에서 다 먹어치웁니다. 이렇게 해서 유명 유투버가 되면 한 달에 수천만원의 수입을 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주식 투자나 비트코인에 투자해서 대박을 치면 인생역전을 할 수 있다는 전설같은 환상이 있습니다. 한 청년은 직장 대출을 최대한 받아 주식에 투자했습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전세금을 빼서 월세로 전환하고 그 돈으로 또 투자했습니다. 그는 직장생활하면서 근무 중 수시로 자기가 산 주식이 올랐는지 떨어졌는지 체크합니다. 비트코인에 투자한 경우 주식보다 세 배, 네 배 더 자주 사고 팔기를 반복하면서 온 신경이 거기에 가 있도록 만듭니다. 현대 사회는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인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누구나 대박을 칠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누구든지 대박을 치기만 하면 인생역전을 하고 병든 자아가 완전히 나음받을 수 있다는 환상을 심습니다.
5-7절을 보십시오.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 된 한 병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언젠가 나도 대박을 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슴에 품고 무려 38년을 베데스다 연못가에 머물렀습니다. 아마 밤에는 가족들의 도움으로 집으로 가서 자고 아침 일찍부터 출근하여 해가 질 때까지 근무한다는 마음으로 베데스다 연못가에 출퇴근했을 것입니다. 그 세월이 벌써 38년이 지났습니다. 현재 시점에서 38년 전이면 1983년입니다. 전두환 대통령 제 5 공화국 시절이며 82년에 태어난 김지영이 2살 되었을 때입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 자리에 매일 출근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본문의 병자는 그 오랜 세월 대박을 칠 환상을 가슴에 품고 베데스다 연못가에 오늘도 누워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를 주목하여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병이 매우 오래된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 사람이 지금까지 이 자리에 누워있는 것은 당연히 낫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낫고 싶지 않다면 38년 그 긴 세월 동안 뭣하러 이 힘든 곳에 누워 있었겠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이 이런 질문을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베데스다 연못의 전설이 심어주는 환상이 아닌, 그의 눈 앞에 계신 예수님이 그를 낫게 해 주실 수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병자는 무엇이라 답하였습니까? 그는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간다고 하였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가 심어주는 환상의 특징이 바로 이것입니다. 딱 한 가지, 그 뭔가가 결여되었기 때문에 내가 대박을 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이템을 잘 못 잡아서, 혹은 너무 정직하게 이 사회가 정해놓은 룰과 규칙을 지키려 했기 때문에 대박을 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법을 잘 아는 사람, 여러가지 편법에 대해 잘 아는 사람, 소프트웨어의 빈구멍처럼 이 사회의 구조적 약점과 헛점을 잘 아는 사람의 도움과 조언을 받을 수만 있다면 나도 대박을 칠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합니다. 8-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예수님은 이런 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예수님은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혹은 그를 번쩍 들은 후 다리를 주물러서 펴 주지도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에게 말씀만을 주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예수님은 그에게 무슨 실제적인 도움을 주시는 대신 말씀만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포인트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근본적으로 자선 단체가 아닙니다. 친목 단체도 아니고 심리 상담소도 아닙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말씀을 주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신기하게 속에서 생명의 기운이 생겨납니다. 내 스스로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팔과 다리가 움직이고 스스로 일어날 힘을 얻게 됩니다. 스스로 일어날 뿐만 아니라 자기의 자리를 들고 걸어가게 됩니다. 히브리서 4:12절은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뼛속 뇌속 더 나아가 정신과 영혼까지 스며듭니다. 요즘 뇌에 대해서 깊은 연구를 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뇌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뇌는 몸에 있는 여러 장기들 중에서 하나의 장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위를 잘 관리해주면 위 건강이 좋아지고 기능이 좋아지는 것처럼 뇌도 하나의 장기이기 때문에 잘 다루고 관리를 해주면 그 기능이 극대화된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연구에 의하면 왜 사람이 게임에 중독되는지 잘 이해가 됩니다. 게임을 하면 뇌는 그것이 게임이라는 것을 모른다고 합니다. 게임을 하면서 게임 캐릭터가 절대 죽으면 안된다는 메시지를 뇌에 자주 반복해서 보내면 뇌는 이것을 실제 생과 사가 오가는 전쟁 상황이라고 인식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온 몸에 아드레날린 호르몬을 분비시키고 온 몸의 신경과 근육을 최고의 긴장 상태로 유지하도록 온갖 신호를 보낸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의 자아는 이것이 단지 게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반면 내 뇌와 나의 온 몸은 이것을 생과 사가 오가는 전쟁이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게임의 즐거움과 중독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내 몸과 뇌는 전쟁을 하는 중인데 내 자아는 이것이 단지 게임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이러한 상황을 즐기는 것입니다. 얼마 전 성경을 필사하기 좋은 책을 출판하는 분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백혈병을 앓다가 기적적으로 나았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딸의 병과 또 아들이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사건을 계기로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반면 딸은 가난한 가정 형편으로 인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사업을 시작했는데 사업이 너무 잘 되어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어느날 어머니는 딸의 옷장사가 망하기를 기도했습니다. 옷장사가 다 망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6개월만에 그 잘되던 옷장사가 망했습니다. 딸은 어머니의 기도를 알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옷장사를 폐업하고 남은 돈을 전부 하나님께 감사헌금으로 드리고 새롭게 하나님의 자녀로 새 출발했습니다. 그때 시작한 것이 성경을 공책에 베끼는 필사였습니다. 그런데 필사하다보니 뭔가 불편하여 필사하기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해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를 적용한 책을 출판하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그 책으로 성경을 필사한 수많은 분들의 삶이 변화되었다는 간증을 듣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반복하여 읽고 또 필사하여 베껴쓰는 것이 큰 효력이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뇌가 같은 내용이 반복하여 들어오면 아 이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구나 생각하고 장기 기억 장치에 저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반복하여 읽고 베껴쓰고 암송하면 뇌는 이것을 가장 중요한 정보로 인식하여 뇌의 가장 깊숙한 곳에 저장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때마다 생각이 납니다. 내 마음과 내 영혼이 이 말씀을 기억합니다. 특히 결정적으로 중요한 순간에 번뜩 떠오릅니다. 이것이 말씀이 내 육체와 혼과 영혼을 꿰뚫는 과정을 나름대로 과학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은 이 세상의 지혜도 아니고 사람의 생각도 아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말씀 자체에 힘과 능력과 생명력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 동안 내 뇌리 속에 깊이 박혀있던 편견, 불신의 생각, 세속적이고 세상적인 가치관을 마치 무우를 썰듯이 썰어버립니다. 그리하여 순전한 믿음의 생각, 성경적인 생각을 하도록 만듭니다. 의존적이고 무기력한 삶을 살던 사람이 자립적인 인생을 살도록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청년들이 예수님의 말씀,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병든 자아가 나음을 받고 각자 자기의 자리를 들고 가는 자립적이고 힘찬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목자님들은 양들을 도울 때 그의 알바 문제를 도와주거나 인간관계 문제를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외 여러가지 실제적인 문제를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양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우리 목자님들이 각자 맡겨주신 양들이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깊이 돕는 봄학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한편 예수님이 본문의 병자에게 말씀을 주신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가 안식일 날 자리를 들고가는 ‘일’을 했다고 불평했습니다. 누가 이런 짓을 하도록 시켰느냐고 추궁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자기에게 말씀을 주신 분이 누구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예수님인 것을 알고 예수님이라고 알렸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일지라도 우주만물을 주관하고 섭리하는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을 본받아 안식일일지라도 병으로 누워있는 자를 일어나도록 하십니다. 19-29절에서 예수님은 본문에 병자에게 하신 일이 장차 예수님이 하실 더 큰 일의 예표임을 말씀하셨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5절은 지금까지 살펴 본 요한복음 5:1-9절 사건에 대한 해설입니다. 본문의 병자가 38년이나 누워있었다는 것은 그가 거의 시체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런 그가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걷게 되었습니다. 이와같이 그 영혼이 병든 자, 죽은 자와 다를 바가 없이 살아가는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살아나게 됩니다. 사람이 가진 여러 감각들 중 듣는 감각이 가장 사람의 생각과 마음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합니다. 예전에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 중 가수 이문세는 밤의 교육부 및 문화부 장관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큰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당시 청소년들은 라디오를 통해 오직 소리로만 들으면서 굉장한 정서적 문화적 교육적 영향을 받았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얼굴이 세모이고 턱이 주걱턱처럼 나왔다는 친구들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을 들었을 때 제 영혼은 수치심과 모멸감으로 고통하였습니다. 또 초등학교 3학년 때 제가 민첩하게 대처하지 못해 막내 동생이 교통사고로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 너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마음에 깊은 슬픔과 아픔을 주는 존재라는 내 내면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을 들었을 때 제 영혼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게 되었습니다. 이런 저에게 어느 날 주님의 따스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의 외모와 상관없이 너는 나의 가장 사랑하는 자녀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너의 부모에게 아픔과 슬픔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영원한 기쁨과 복을 가져다주는 복의 근원이라는 주님의 생명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 음성을 들었을 때 죽어가던 제 영혼은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생명력과 기쁨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남은 제 삶은 기간에도 날마다 날마다 이 주님의 생명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여기 모이신 모든 분들, 유투브로 이 메시지를 들으시는 모든 분들도 세상이 주는 죽음의 음성을 듣지 말고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30-47절에서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의 증거를 믿지 않는 이유가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모두 병든 자아를 가지고 있습니다. 병든 자아가 나음받는 길은 세상에서 대박을 치는 것이 아닙니다. 병든 자아가 나음받는 길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병든 자아가 나음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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