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7강
용서하라
말씀 마태복음 18:15-35
요절 마태복음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하나님이 가장 관심 가지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실까요? 답은 용서이고 용서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느 정도 용서하기를 바라실까요? 그런 용서를 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15-20절은, 다른 사람의 죄를 반드시 권고할 것을 가르치고, 21-35절은 다른 사람의 죄를 반드시 용서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형제가 죄를 범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서 형제란 신앙생활 하는 동료를 뜻합니다. 먼저, 죄를 범한 그를 방치하면 안 됩니다. 죄를 범한 경우에 그를 권고해야 합니다. 권고라는 말은 노출시키다, 빛을 비추다란 뜻인데, 죄를 일깨워주는 것을 말합니다. 죄를 방치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에게 좋지 않습니다. 계속 쓸모없는 죄의 열매를 맺고 교회공동체에도 나쁜 영향력을 미칩니다. 따라서 그의 죄문제를 반드시 일깨워주고 그가 그런 삶을 살지 않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잠언에서는 문제나 죄를 지적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했고 항상 좋은 말만 하는 사람은 그 영혼에 올무를 놓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잠 27:6, 28:23). 요새 우리는 서로서로 좋은 말들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치부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반드시 권고를 해야 합니다. 권고할 때 당장은 싫어해도 나중에는 감사하며 진정한 사랑을 느낄 것입니다. 물론 최대한 지혜롭고 겸손하게 권고해야 할 것입니다.
권고를 하되,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할까요? 나는 그가 잘못했다고 판단하지만, 사실관계는 다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사적으로 둘만 대화를 해야 합니다. 그가 오해받은 경우 해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설령 그가 잘못을 했더라도 한 인격체로서 그를 보호하고 존중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적할 때 그 사람이 그것을 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가 그 권고를 받아들이고 회개한다면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는 정말 진실하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진리에 속한 사람이며 무한히 성장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발견한다면 교회는 돌덩이 사이에서 금덩이를 발견한 것처럼 귀한 소득을 얻은 것입니다.
만일 그가 죄가 명백함에도 권고를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2-3명의 증인이 같은 말을 하여 그 권고가 객관적인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2-3명이 같은 말을 해도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교회에 말해야 합니다. 교회가 권고해도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겨야 합니다.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긴다는 것은 교제를 중단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가 자중하며 자신을 깊이 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돕는 것이며 또한 교회도 그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함입니다. 죄를 짓고 안 짓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회개를 하면 그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끝내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다면 그는 진실한 성도요 교제의 대상이 아님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의 치리를 우습게 여깁니다. 하지만 교회의 권위는 하나님이 보장하신 것으로 교회가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으며, 교회가 풀면 하늘에서도 푸십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 권한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됩니다. 그 권한을 신중하게 쓰는 것은 합심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2-3 사람이 모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반드시 그들과 함께 하사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며 어려운 문제도 풀도록 도와주십니다.
고전 5장에서 사도바울은 교회를 순전하고 거룩한 공동체로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깨어서 누룩 없는 떡처럼 교회의 순전성과 거룩성을 잘 지켜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21-35절은 죄를 범한 형제들을 왜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듣다가 자기에게 죄를 범한 형제가 떠오른 것 같습니다. 그는 도대체 그런 사람을 몇 번이나 더 참고 섬겨야 하는 지 답답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남자답고 충성스러워 허물지고 연약한 사람들을 참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배웠기에 7번까지 용서해 주면 용서의 최대치가 될 것이며, 그 정도면 예수님도 놀라시며 엄지 척을 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랍비들도 최대 용서치를 3번 정도로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곱 번이 아니고 무려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자적으로는 490번이지만 7이나 70이 모두 완전수이기 때문에 반복하여 끝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니 일곱 번을 일흔씩 번 하라니” 베드로는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신앙생활은 끝없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직 몰랐고 그저 주님께 충성하는 것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기가 막혀 하는 베드로에게 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무한히 용서해야 하는 가를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어떤 임금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종들과 결산을 하는데 문제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무려 일만 달란트라는 거액의 손실을 왕에게 입힌 사람이었습니다. 일만 달란트가 어느 정도의 금액입니까? 한 달란트가 6천 데나리온으로 노동자 6,000일 품삯이니, 일만 달란트는 6,000 만 일 곧 노동자 20만년 품삯입니다.
왕은 추상같은 명령을 내려 그 자신과 아내와 자식들과 소유를 다 팔아 그 빚을 갚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엎드려 절하면서 자신의 허물을 참아주시도록 간구하며 자신이 최선을 다해 갚아보겠노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말뿐이지 어떻게 그 많은 금액을 갚겠습니까? 그 액수는 일생 갚아도 결코 갚을 수 없는 천문학적 금액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임금님은 어떤 조치를 내렸습니까? 그를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주며 그 빚을 다 탕감해주었습니다. 그는 아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임금님,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백골난망,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연신 조아리며 궁궐을 나섰을 것입니다. 그의 두 눈에는 감격의 눈물이 흐르고 마음은 임금님의 은혜에 대한 감동으로 가득찼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큰 탕감의 은혜를 받은 관리가 궁궐을 나가자마자 길거리에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곧 1,000만원을 빚진 사람을 만났습니다. 1,000만원은 노동자 4개월 월급으로 작은 빚은 아닙니다만 그가 탕감 받는 액수에 비하면 비교가 안 되는 작은 금액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어떻게 다루었습니까? 자신보다 60만분지 1의 작은 빚을 진 동료의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윽박질렀습니다. “야 이 무책임한 인간아! 빌릴 때는 언제고 아직까지 돈을 안 갚아 이 사기꾼, 도적놈아.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한 줄 알어, 어, 알아 몰라” 길거리에서 사람 목을 잡고 다그치는 것은 비인격적인 것을 넘어 인격모독적인 행위입니다. 그는 동료인 자신에게 엎드려 참아달라고 간구하는 동료를 감옥에 처넣어버렸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동료들은 보다 못해 사람이 어쩜 저럴 수가 있는 지 싶어 동영상을 촬영해 왕에게 카톡으로 보내주었습니다.
그 카톡을 보신 임금님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그리고 즉시 그를 소환하여 그를 책망했습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그리고 탕감을 무효로 하고 그 빚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처넣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거나 들을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가장 많이 드십니까? 참 어이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어쩜 사람이 저럴 수가 있는 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로 하나님이 보실 때 그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 것을 보실 때 하나님은 “그 놈 참, 어이없네” 하십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가 하는 가장 어이없는 짓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상의 이야기를 하신 예수님은 이렇게 교훈하셨습니다. 35절입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상의 비유와 예수님의 교훈을 종합해 보면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시는 것이 사실상 성경의 주제입니다. 십자가는 성경의 핵심인데, 이 십자가의 핵심메시지는 용서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용서를 모르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며 예수님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생들을 끝없이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고 계십니다. 용서란 원어로 보면 ‘풀어주다’는 뜻인데 하나님은 우리를 미움의 감옥에서 날마다 풀어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행한 일을 보면 하나님은 그 다음날 햇빛을 거두시고, 공기를 거두시고 비를 주시지 않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기억의 감옥에서 풀어버리시고 새날의 햇빛과 물과 공기를 주시고 새 생명을 향유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우리를 몇 번이나 용서하셨을 까요? 하나님의 끝없는 용서는 지구와 인류의 오늘이 있게 하였습니다.
자비로우시지만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의 천문학적인 죄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기도를 하시고 “다 이루었다” 하시며 운명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상업적 용어로 “빚을 다 갚았다” 는 뜻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갚아도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다 탕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죄인으로 자기발견이 안되면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한 백 데나리온 쯤 용서받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자기발견이 제대로 되면 정말 나는 천문학적인 빚을 진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내 죄는 머리털보다도 더 많고 땅의 모든 티끌보다 더 많습니다. 주님이 이런 나의 죄를 용서하셨기에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문제가 얼마나 우리 삶에 가까이 있습니까? 우리는 멀리 있는 알카에다나 북한 지도자나 일본수상을 미워하고 소수민족을 괴롭히는 중국, 러시아 지도자를 미워하기도 합니다. 혹은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 정당 사람들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미움은 우리를 괴롭히고 병들이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가까운 사람들과 삶속에서 겪는 용서치 못한 문제가 우리에게 실제 문제가 됩니다. 남편과 아내는 가장 가까운 사이지만 애증이 교차합니다. 대부분의 자녀들은 부모님에 대한 미움을 품고 살아온 라이프스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들에게 자녀들은 “너 때문에 내가 제명에 못살 것같다”고 말하는 미움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요새 부모는 그런 말을 하면 자녀들이 집을 나간다고 할 까봐 속으로 끙끙 앓기만 하여 더 속이 썩습니다. 교회에서도 동역자 간에 미움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용서하지 못하는 문제는 수은독처럼 조금씩 우리안에서 쌓여서 우리를 죽일 수도 있습니다. 소화불량이나 체증이나 신체의 질병을 가져올 수도 있고 심하면 암에 걸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기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할 때 독이 빠집니다.
다시 요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타인에 대한 용서가 구원의 조건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나 행위가 믿음을 증명한다는 말처럼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가 여부는 내가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했는가의 증명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면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진정한 용서를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이란 증거입니다. 즉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니 그는 구원을 못받은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요 신앙척도가 되는 셈입니다.
용서문제가 구원과 관계되고 심각하다고 해서 우리가 용서를 억지로 할 순 없습니다. 억지로 용서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우리도 진정한 용서가 주는 자유함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마음으로부터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첫째, 불쌍히 여길 때 가능합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깊이 이해하고 그 입장에 선다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 사람들 가운데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들을 이해하고자 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들도 자신의 아버지들로부터 살갑게 대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대가족을 부양하며 가난한 시대를 살며 일하느라, 그랬을 수 있고 또 유교문화에서 자라 권위적이고 수평적 친구관계같은 부모자식관계를 이룰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몰라서 그랬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입장과 시선으로만 상대방을 바라보면 다른 사람을 끝내 판단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지만 이해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자신의 삶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눈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경우 하나님의 섭리 편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자 자신의 삶에 악역을 했던 사람들을 다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TV나 영화에서 악역한 사람들을 길거리에서 보고 “저 나쁜 놈” “저 죽일 놈”이라고 미워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을 유독 미워하는 사람은 이처럼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크게 보는 눈을 길러야 합니다.
셋째로, 나를 용서하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가 작지 않을 지라도 나의 천문학적인 죄의 빚을 생각하면 조족지혈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눈이 뒤집혀 분노의 종이 되기도 하고 깨끗하게 용서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어떨 때 용서하기 힘든 가요? 반복하여 허물을 보일 때 입니다. 발달장애아들은 1,000 번을 이야기해야 한 가지 행동이 바뀔까 말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앞에서 발달 장애 아동들과 같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얼마나 반복해서 같은 죄를 지었을 까요? 예컨대 저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하나님을 실망시키는 죄를 범했으니 하나님은 지금껏 저를 수십 만 번 용서하신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졌던 사람은 은혜를 기억하는 데 금붕어 아이큐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잊어먹는 데 금붕어 아이큐를 가지신 분입니다. 어제까지 원수였는데 오늘 또 모든 혜택을 아낌없이 쏟아 붓고 계시지 않습니까? 정말 속도 없는 분 같습니다. 발달 장애아들의 부모들은 그들이 계속 반복해서 같은 짓을 해도 그것을 다 잊고 다음날 자녀를 처음 본 것처럼 그들 섬겨야 하는 데 그와 같습니다.
용서는 원어로 ‘놓아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겉으로만 용서한다고 하고 사람을 마음의 미움의 감옥에서 놓아주지 않는 것은 본문에서 말하는 마음으로부터 용서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미움의 끈을 싹둑 잘라서 그와 나 모두를 진정으로 자유케 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온전히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억울함과 정의의 실현 문제 때문입니다. 피해자인 나는 용서하고 그는 멀쩡하다면 너무나 억울하고 손해의식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서하긴 하되 뒤끝을 남깁니다. 그런데 이런 용서는 역시 마음으로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용서는 50점짜리 용서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용서는 심지어 정의실현도 넘어서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용서는 그를 포용하고 축복하는 것까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용서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굿바이 하고 그와 결별을 선언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내 양을 먹이라 사명을 맡겨주셨습니다. 자신이 피로 사신 양떼들을 위임하셨습니다. 그를 축복하고 그를 믿어주고 그의 미래에 소망을 두셨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에게 감동이 되었고, 베드로의 마음에서 모든 죄책감과 상처가 사라지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셨습니다. 완전한 용서를 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용서 했어, 하지만 너와는 끝이야” 이런 자세는 주님이 원하시고 보여주신 마음으로부터 용서가 아닙니다. 마음으로부터 용서는 상대방을 포용하고 신뢰하고 소망을 두는 것으로 완성됩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용서도 넬슨 만델라의 용서도 그러하였습니다. 넬슨 만델라는 자신을 27년간 감옥에서 괴롭혔던 간수들과 교도소장을 상징적으로 대통령취임식 자리에 초청했으면 교도소장은 오스트리아 대사로 발령 내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괴롭힌 사람들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용서하고 선행을 행한다고 해서 그가 반드시 변화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다른 사람을 포용하며 축복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베드로가 용서에 대해 질문했다는 것이 이 본문이 베드로에게 주는 메시지이며 결국 요한복음 21장의 베드로를 용서하신 주님과 연결된다고 보여집니다. 베드로는 요 21장에서 정말 주님의 진정한 용서를 맛보고 감동했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이란 바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배우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벧전 3:8,9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여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는 미워하지 않을 뿐아니라 축복하는 용서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는 적극적인 용서가 우리의 부르심의 목적이며 축복된 삶임을 말했습니다. 우리가 용서해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인 용서를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용서는 좋지만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이 용서입니다. 용서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만져주십니다. 그래서 신기하게 용서할 마음이 생깁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그런 마음 주시면 손양원 목사님의 용서도, 넬슨 만델라의 용서도 가능합니다. 베드로가 말한 축복하는 용서도 가능합니다. 용서의 비결은 기도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용서를 위해 다른 무엇보다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는 기도를 많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일생 모든 관계와 삶을 통해 용서를 배우며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을 깊이 배워 나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