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마태복음 28강
영생을 얻으려면
말씀/ 마태복음 19:1-22
요절/ 마태복음 19: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실제적인 문제인 결혼 문제와 재물 문제, 또 영생의 기쁨과 확신에 대한 말씀을 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영생의 기쁨과 확신을 누리는 저희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님 일행이 유대 지역에 이르렀을 때 일단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와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은지 질문했습니다.
저자는 이 질문의 의도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함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 이혼 문제에 대한 논쟁의 핵심은 신명기 24:1-2절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데 있었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여기에서 논란이 되는 부분이 “수치되는 일”에 대한 해석의 차이입니다. “수치”란 단어는 원문상 “벌거벗음(nakedness)”인데 샴마이 학파는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성적 불륜에 해당하는 일로 보았습니다. 이에 비해 힐렐 학파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보고 아내로서 부적절한 점, 혹은 행실로 폭넓게 해석하였습니다.
또한 힐렐 학파는 “남편이 아내를 기뻐하지 아니하면”이라는 표현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떤 이유든 남편이 아내를 더 이상 기뻐하지 않으면 이혼사유가 되었습니다. 미쉬나에 보면 아내가 접시를 더럽혀도 정당한 이혼사유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버전으로 한다면 남편이 아침에 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설거지가 미처 잘 되지 않아 접시에 고추가루가 묻어있거나 밥알이 눌어붙어 있으면 1차 경고를 하고 그것이 3회 이상 반복되면 삼진아웃 제도가 적용되어 바로 이혼이었습니다. 또 목소리가 너무 커도 이혼사유가 되었습니다. 그 기준은 이웃집에서 부인의 목소리가 들릴 정도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힐렐 파에 서 있던 아키바라는 랍비는 남편이 지금 아내보다 더 참하고 예쁜 여자를 만나 현재의 부인이 더 이상 남편에게 기쁨을 주지 못하면 이혼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기뻐하지 아니하면”이라고 했기 때문에 어떤 사유든 부인이 남편에게 기쁨을 주지 못하면 정당한 이혼 사유가 되었습니다.
당시 주류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힐렐 학파의 견해를 따랐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을 시험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복잡한 신학적 논쟁에 끌어들이고 그의 주장에서 허점을 찾고자 하였습니다.
4-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바리새인들은 신명기 24:1절에 대한 각 학파의 주장과 그 반론에 대해 여러 자료를 잔뜩 준비해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전혀 생각지 못한 창세기 말씀으로 답변하셨습니다. 창세기 1:27절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2:24절을 보면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두 말씀을 연결하여 결혼에 관한 세 가지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것입니다. 남자가 같은 남자와, 혹은 여자가 같은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며, 하나님이 만드신 결혼제도에서 근본적으로 어긋나는 것입니다.
둘째, 결혼은 한 몸을 이루는 관계입니다. 창세기 2:24절에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에서 합한다는 표현은 원문상 ‘다바크’입니다. 이 표현은 구약 성경에서 뼈에 힘줄이 꽉 달라붙은 것처럼 욥의 살이 뼈에 달라붙은 경우(욥 19:20), 큰 바다 괴물인 리워야단의 비늘처럼 인간의 힘으로 떼어내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욥 41:17), 룻이 그의 시어머니를 붙쫓아 시어머니와 함께 유대 땅으로 돌아가기로 하나님 앞에서 굳게 결심한 경우(룻 1:14) 등에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는 결혼이 둘이 한 몸을 이루는 유기적인 연합이며 그 무엇도 나눌 수 없는 하나됨임을 의미합니다.
셋째, 결혼의 주관자는 하나님입니다. 근본적으로 결혼 제도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이 결혼 제도 안에서 결혼한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주관 아래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사람의 뜻이나 계획에 의해 이혼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의 많은 결혼에서 하나님이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인간의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했으나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경우 얼마든지 이혼할 수 있고, 심지어 참된 사랑을 위해 이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랑은 결혼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성경도 그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태초에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입니다. 또 결혼 제도를 통해 둘이 한 몸을 이루도록 하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많은 젊은들이 결혼 생활 가운데 사랑, 특히 에로스적인 사랑과 느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로 인해 사랑이 식었다고 느껴지면 이혼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둘이 나뉘어질 수 없는 한 몸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2장에서 한 몸과 지체의 비유를 하였습니다. 손과 발이 서로 심하게 다툴 수 있습니다. 발이 손에게 말합니다. “나는 지저분한 냄새나는 양말을 신고 발냄새와 무좀을 견디며 개고생하는데, 손 너는 사람들하고 악수하고 손으로 상도 받고 진기한 것도 만져보고 폼나고 광나는 일은 다 하냐” 비난합니다. 그런가 하면 손은 머리에게 말합니다. “머리야, 나는 이렇게 설거지하느라 손에 습진이 생기고 여러 일을 하느라 관절이 다 아프고 죽겠는데 너는 가만히 앉아서 일만 시키느냐” 이렇게 티격태격 싸웁니다. 그러나 그들이 서로 다 한 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난을 멈추고 서로를 아껴주게 됩니다. 머리는 손에게 좋은 습진약을 사서 바르도록 말해주고 발은 손이 기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열심히 걸어 이동해 줍니다.
부부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서로 나의 행복과 기쁨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또 언제든지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상대방과 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쉽게 이혼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나눌 수 없는,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한 몸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깊이 인정할 때 서로 아껴주고 사랑하게 됩니다.
7-9절을 보십시오.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그러면 “신명기 24:1절에서 모세가 이혼 증서를 주어서 아내를 버리라고 명령한 것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따져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신명기 말씀이 이혼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그들의 완악함에 대한 허락의 말씀임을 지적하셨습니다. 곧 이혼을 결심한 경우 이혼증서를 써 주어 아내가 재혼할 수 있도록, 아내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여자를 보호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단 음행의 경우에는 이혼사유가 됩니다. 음행은 그 음행을 범하는 순간 상대방과 새로운 한 몸의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때 이전의 한 몸의 관계는 깨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음행의 경우 이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음행 이외의 다른 사유로 이혼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간음죄를 짓는 것이 됩니다.
창세기 6장을 보면 노아시대 때 홍수심판을 불러온 계기가 된 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결혼 제도가 무너진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자기의 감정과 안목의 정욕을 따라 자유롭게 결혼하고 이혼하였습니다. 그 결과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졌습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없이 시집가고 장가갑니다. 그리고 이혼합니다. 결혼의 중심은 ‘나’이며 나의 감정과 행복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자기 중심적, 인본적 결혼관은 반드시 노와 시대와 같은 사회의 타락을 불러오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옵니다. 우리가 이런 시대 가운데 하나님이 주관자가 되시고 서로를 한 몸으로 인식하고 아끼고 사랑하고 섬기는 아름다운 믿음의 가정들이 많이 서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결혼이 그렇게 엄격하다면 결혼과 이혼으로 인해 간음죄를 짓게 되느니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우리는 2천년 전 시대 분위기 가운데 제자들이 선생이요 주가 되시는 예수님께 매우 공손한 자세를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의외로 당시 제자들은 자기 하고 싶은 말 있으면 거리낌없이 막 하는 분위기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매우 친절하게 결혼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에 대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곧 태어날 때부터 고자인 경우가 있습니다. 또 사람이 필요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든 고자도 있습니다. 왕궁에서 숙식하며 일해야 하는 내시의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그런가 하면 천국을 위해 스스로 결혼을 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머더 배리 선교사님이 이 경우에 해당합니다. 그는 젊은 시절 몰려드는 한국 대학생들에게 영어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다가 결혼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90이 넘은 지금까지도 대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는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서 특별히 아름다운 헌신입니다.
13-15절에서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 안수해주시고 기도해주시기를 요청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왜 애들을 데려왔느냐고 꾸짖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이 이런 어린 아이의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그들에게 안수해 주셨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다른 성경을 보면 그는 전도유망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는 마태복음 8:19절에서 예수님께 나온 한 서기관을 연상시킵니다. 그 때 서기관은 예수님께 청년과 비슷한 말을 하였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제가 따르겠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마태복음 8장에서 서기관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통해 예수님으로부터 배워 세상에서 유명한 위대한 랍비가 되는 꿈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세상에서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외롭고 힘든 길이 될 수 있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의 서기관에 비해 본문의 청년은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가졌습니다. 먼저 그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선생님은 아람어로 랍비입니다. 랍비는 일반 사람들이 잘 모르는 지식을 전수하는 자입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일반 사람들이 잘 모르는 지식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 지식은 영생에 대한 지식입니다. 원문상 영생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영원한 생명, eternal life입니다. 다른 하나는 참된 생명, true life입니다. 청년이 둘 중 어떤 것을 의미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둘 다 의미했을 것입니다. 다른 성경을 보면 그는 관리였습니다. 그러니까 공무원이었습니다. 또 22절을 보면 재물이 많은 부자 청년이었습니다. 오늘날 버전으로 말한다면 그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현금 수십억에 강남에 있는 빌딩을 물려받은 부자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안정된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가진 재산으로 일하지 않고 놀고 먹으며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실하게 공무원 생활을 한 것을 볼 때 그는 그 시대에 보기 드문 훌륭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그의 삶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한 가지 깊은 영혼의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영생에 대한 갈망이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청년들은 극심한 경제적인 어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들은 오늘날 버전으로 한달간 열심히 알바해서 100만원만 벌어도 너무 행복했습니다. 그 돈으로 꼭 갖고 싶었던 노트북이나 핸드폰, 또 입어보고 싶었던 옷 하나만 사도 너무너무 행복했습니다. 또 안정적인 공무원은커녕 어디 작은 회사에서 인턴으로 뽑혀도 행복했습니다.
이에 비해 본문의 청년은 돈에 대한 염려와 걱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했습니다. 사고싶은 것이 있으면 마음껏 사고 돈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마음껏 할 수 있었습니다. 또 공무원으로서 받는 월급이 큰 돈은 아니었지만 그 일을 하면서 무언가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기 만족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고 있지만 오늘날 표현으로 그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무언가 공허했습니다. 이상하게 돈으로 할 수 있는 것보다 돈으로도 할 수 없는 것들이 자꾸 생각나 그를 괴롭혔습니다. 예를 들어 늙고 병드는 것은 돈으로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돈을 보고 따르는 친구가 아닌 나를 정말 나 그대로 받아주고 좋아해줄 수 있는 진실한 친구는 돈으로 얻을 수 없었습니다. 알바해서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사는 그 시대 청년들이 가난하지만 정말 자기 진심을 털어놓는 친구들이 있는 것이 부러웠습니다. 그는 돈많은 부자들을 납치하여 거액의 보상금을 노리는 이들로 인한 염려 때문에 결코 마음놓고 한적한 곳에 여행을 갈 수 없었습니다. 그가 부자인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염려로 인해 푸른 하늘 시원한 가을 공기를 맡으며 산책도 마음껏 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큰 그의 저택 안에서만 애완견과 함께 산책할 수 있었습니다.
또래 친구를 사귀고 싶어 같은 부자 청년들을 만나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든 것을 돈과 외모, 얼마나 희귀하고 비싼 옷이나 사치품을 가지고 있는지로 평가하는 지독한 속물 근성을 가지고 있었고 순수함이나 진실함이란 눈꼽만큼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또 그들은 은밀히 외국에서 밀수입해온 마약을 같이 즐기자고 청년을 유혹했습니다.
부자 청년들에게 질린 그는 모든 연락을 끊고 혼자 지냈습니다. 그러한 삶 가운데 느낀 그 외로움, 그 공허함, 그 결핍감을 그는 영생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했습니다. 그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무언가 특별히 선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그것을 질문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예수님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어떤 특정한 선한 일을 행해야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선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안에 영생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청년은 어느 계명인지 여쭈었습니다.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십계명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본문에서 청년은 그 말씀을 자기가 지켰다고 하였습니다. 정말 지켰을까요? 산상수훈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 계명을 정말로 지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상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단지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해서 지킨 것이 아닙니다. 이 계명을 진정으로 지키는 것은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고 살인하는 죄를 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실제 간음을 행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 속의 음란한 생각을 회개하고 여자를 대할 때 친 자매와 같이 순결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청년은 당시 일반적인 바리새인들이 생각하고 가르치던 수준에서 십계명의 말씀을 지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수준에서 계명의 말씀을 지켰을 때 청년의 마음에 전혀 영생의 기쁨이나 확신이 없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예수님은 산상수훈 강화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온전하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태리에서는 지금도 장인들이 있어서 가방이나 기타 제품을 만들 때 일체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수작업을 하여 제품을 만든다고 합니다. 장인들은 여러 제품을 만들며 그 크기나 모양 등에 있어서 획일적이지 않고 다양한 수제품을 만듭니다. 어떤 것은 크고 화려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작고 수수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장인의 손길이 들어간 제품은 모두 장인의 진품입니다. 장인의 기술과 정신이 그 제품 안에, 그 제품의 바느질 한땀 한땀 안에 전부 다 녹아 있습니다. 이와같이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을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그 손으로 빚으신 하나님의 작품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장인의 그 위대한 장인 정신이 작품 안에 녹아들어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생이 그의 안에 스며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청년을 돕기 위해 그가 온전하기 원한다면, 그가 진정 하나님의 영생을 소유하기 원한다면 그가 가진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가 그에게 있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난 후 와서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다’라는 단어가 첨가되어 있습니다. 곧 그의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 중 헤롯의 정치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소유로 예수님 일행을 헌신적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모든 청년들에게 주신 보편적인 말씀이라기보다 영생의 기쁨과 확신을 주기 위해 본문의 청년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칼빈도 그렇게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청년이 영생의 기쁨과 확신을 얻기 원하는 것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그러나 청년이 영생의 기쁨과 확신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제거해야 할 장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청년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은 재물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현재 청년은 자기 안에 재물을 사랑하는 강한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이 보실 때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하신 마태복음 6:24절 말씀이 이 청년에게 정확히 해당되었습니다. 사실 이는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합니다. 예수님보다, 영생보다 더 사랑하는 무언가를 내려놓기 전까지는 결코 예수님을 온전히 따를 수 없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청년은 그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 치루어야 할 현실적인 대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에게는 현금으로 수십억원이 있습니다. 또 강남에 빌딩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순종하기 위해서는 수십억원의 현금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기부해야 했습니다. 빌딩도 기부해야 했습니다. 기부한 후 어떻게 되는거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는 여느 청년처럼 가난한 자가 됩니다. 단 돈 백만원이 없어서 한 달 내내 알바를 해야 합니다. 결혼할 경우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합니다. 이전에 사람들은 그가 가진 돈을 보고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습니다. 나이많은 이들도 그의 앞에서 허리를 숙이고 그에게 존대말을 하며 그를 존중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돈없는 그를 무시하며 함부로 대할 것입니다. 돈많던 시절처럼 행동했다가는 그들이 욕설을 하고 때릴지도 모릅니다. 결혼한 후 그는 아빠는 돈도 못 벌고 뭐했어 원망하는 자식들의 원망을 듣게 될 것입니다. 부인에게 고급 옷 한 벌 사주지 못하는 아쉬움을 늘 갖게 될 것입니다. 이제 평생 화장실이 두 개 있고 정원이 딸린 집에서 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이처럼 돈이 없어 무시당하고 불편하고 힘든 삶을 살 것을 생각할 때 끔찍했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영생을 얻기 원했습니다. 사실 영생을 위해서라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깟 이 세상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 옳았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어 당할 현실적인 어려움을 생각할 때 도저히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근심하였습니다. 본문에서 근심했다는 표현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리라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이 보였던 바로 그 반응이었습니다. 청년의 마음에 정말 엄청난 번뇌와 고민이 임하였습니다. 그는 고개를 떨군채 아, 아 장탄식을 쏟으며 예수님 반대편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만약 우리도 예수님께 나아가 영생의 기쁨과 확신을 얻기 원한다고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어라 말씀하실까요? 내 자신도 모르고 있던 영생보다 더 강한 열망, 아니 욕망으로 붙들고 있는 그 한 가지를 팔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 한 가지가 무엇일까요? 사람들의 인정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성공일 수 있습니다. 자아 실현일 수도 있습니다. 이상적인 멋진 배우자와 결혼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본문의 청년처럼 현실적인 편안함과 안정감을 가져다 주는 돈과 재물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정말로 그것을 팔아야 하기 직전까지 자기가 그것을 붙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것을 말씀 앞에서 정말로 그것을 팔아야 하는 순간이 될 때 비로소 자기 안에 그런 욕망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은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팔았습니까? 영생을 얻기 위해 죽을 것 같은 번뇌와 고통이 있었지만 결단하고 판 것이 있습니까? 혹은 과거에는 팔았지만 지금 현재 다시 팔아야 할 것이 있지는 않습니까? 이 시간 생명의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고 영생을 위해 한 가지를 팔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온전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안에 영생의 기쁨과 확신이 넘치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