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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0년 마태복음 29강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태복음19:23-20:16)2020-09-27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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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29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말씀 / 마태복음 19:23-20:16

요절 / 마태복음 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오늘 말씀은 부자와 먼저 된 자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입니다. 우리가 부자이든 가난하든, 언제 부르심을 받았든지 신앙의 간절함, 감격을 늘 유지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예수님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하셨습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말은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위험한 고위험군 직업이 무엇입니까? 대통령입니다. 그 자리에 올라갔다가는 십중팔구가 제대로 퇴임할 수 없습니다. 하야하거나 죽거나 감옥에 가야 합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가장 고위험군 신분은 부자입니다. 왜냐하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힘듭니까? 부자는 심령이 부요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을 의지하며 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물질이 주는 만족 때문에 영적 만족을 구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너무 좋기 때문에 하나님나라를 사모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대부분의 부자들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부자가 되기를 바란다면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합니다. 천국에 못 들어가도 되는 지, 아니면 생명 걸고 물질 신을 숭배하지 않을 영적 내공, 영적 가치관을 가지든지 말입니다. 여러분, 실망하셨습니까? 부자 되어도 됩니다. 다만 영적 가치관과 영성을 갖추면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쇠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습니다. 부자에 대해 동경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부자가 그렇게 영적으로 위험하다니 놀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말씀을 듣고,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자가 되고자 하는 것 같은 데, 그러면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26b)” 구원의 역사를 주도하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면 낙타가 영적 다이어트를 해서 자기를 비워 공기처럼 만들어 바늘구멍을 쏙 통과합니다.

 

어떤 사람은 부자인데도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물질을 나누는 삶을 삽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면 부자뿐 아니라 판사나 검사나 의사여도 영적 가치관으로 무장되어 열심히 주님을 섬깁니다. 문 엘리야 목자님은 뛰어난 학자나, 영어교수가 될 수 있었지만 풀타임사역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제임스 목자님도 뛰어난 경영가로 세상에서 인정받을 수 있지만 소자 하나를 섬기는 목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 종로 UBF에 나오는 모든 분들이 다 자신의 소중한 것을 팔고 주님의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날을 뒤돌아보면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나 싶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바로 바늘귀를 통과한 낙타들입니다.

 

이 시대 젊은이들이 힘든 제자의 길을 걷는 다는 것은 바늘구멍을 통과하듯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제자양성에 많이 실패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운데 물질과 정욕의 유혹을 이기고 주님이 제시한 좁은 문, 좁은 길을 걷고 있는 형제자매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구원의 역사를 비관적으로 보지 않고 소망가운데 섬길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자신과 사도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는데 그 보상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확실한 보상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되면 통치자가 되어 세상을 다스리게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새로운 세상이란 궁극적으로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세상이 새롭게 된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때 사도들은 세상을 다스리는 왕같은 존재가 됩니다. 그들이 세계사를 바꾸며 주도합니다. 또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집과 가족과 전토를 버린 자는 여러 배를 받고 영생을 상속합니다. 주님을 위해 가족을 버린 사람들은 영적 가족을 얻게 하십니다. 부동산은 설령 많이 소유하지 못한다하더라도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며 진정한 이 땅의 주인으로 살게 하십니다. 무엇보다 영생을 상속했으니 세상의 것들을 소유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그들에게 경계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첫째로 자기 의와 보상 심리를 내려놓게 하십니다. 둘째로 교만과 자족, 매너리즘을 극복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교훈을 위해 비유를 드셨습니다.

한 집주인이 포도원을 경영했습니다. 그는 이른 아침에 장터에 나가 일군들을 모집했습니다. 이른 아침은 오전 6시인데 미리 나와 있는 부지런한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주인은 그들을 일꾼으로 고용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고용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감사했을 것입니다. 고용에 대한 불안과 걱정 없이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주인은 오전 9시에도 장터에 나가 봤습니다. 그랬더니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인은 이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며, 적절한 품삯을 약속했습니다. 주인은 정오와 오후 3시에도 장터에 나갔습니다. 그랬더니 놀고 있네” PC방에 젊은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주인은 그들도 역시 자신의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오후 5시에도 장터에 나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아직도 빈둥거리며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주인은 그들을 보고 책망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종일토록 놀고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6). 이렇게 말한 주인은 사람이 빈둥거리며 사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소중한 인생을 놀며 허비하는 것을 보면 너무나 안타까워하십니다. 일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사는 사람을 백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육 간에 백수로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일을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의 포도원에서 일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 보실 때 일생토록 놀고 서 있는 사람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서 있느냐(6)” 주인의 안타까운 질문에 그들은 무엇이라 대답했습니까? 우리를 품꾼으로 써주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놀고 싶어 노는 것이 아니라 실업률이 높고, 일자리가 없어 어쩔 수없이 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주인은 그들도 자신의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고용해주신 주인에 대해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포도원에 들어가 열심히 일했을 것입니다. 본문의 주인은 정말 고용의 황제요, 백수들에게 구세주와 같은 분이었습니다.

 

저녁 6시가 되었습니다. 주인은 청지기에게 품삯 계산을 해주도록 했습니다. 보통은 먼저 온 사람들부터 품삯을 주는 데 이 주인은 반대로 나중 온 자들부터 주었습니다. 청지기는 오후 5시에 와서 1시간 일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 즉 노동자 하루 품삯을 주었습니다. 하루 노동시간이 12시간이었으므로 1/12 데나리온만 줘도 되는 데 이는 파격적 조치였습니다.

 

이것을 본 먼저 온 사람들은 자신들은 더 받을 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청지기는 먼저 온 자들에게도 한 데나리온만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주인을 원망하며 말했습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그들의 말은 일견 맞는 말 같고 정당한 불평 같습니다.

 

이에 주인은 유독 불평과 원망이 많은 한 사람을 바라보며 말합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13b-15)

 

주인은 그에게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주인은 먼저 부른 사람들과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나중 온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판단으로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자기 돈을 가지고 주인은 맘대로 할 권리가 있습니다. 또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비유를 끝내면서 예수님은 이런 교훈으로 마무리 하셨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리라”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된다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첫째, 사람이 신앙생활에 있어 자기 의, 공로의식, 보상심리 등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온 자들이 수고를 많이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수고는 포도원에 부르심을 받은 은혜가 있었기에 가능합니다. 주인이 부르지 않았으면 그들은 아예 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불러준 주인의 은혜가 크고 결정적입니다. 크기로 하면 그 은혜가 태산 같고 그들의 수고는 태산에 붙은 먼지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아 쓰임 받는 것을 크게 여기며 이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은혜신앙입니다. 이 반대는 자기 의를 붙드는 공로신앙입니다. 자기 의, 공로의식, 보상심리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자꾸 다른 사람과 비교합니다. 특히 자신보다 더 늦게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나, 더 일을 적게 한 사람이 더 많은 축복을 받은 것으로 보일 때, 힘들어하고 신앙생활에 대해 회의하고 하나님을 향해 유감을 품습니다. 이런 공로신앙을 가진 사람은 항상 자기 의로 충만하고 마음에 감사가 부족하고 얼굴은 항상 찡그리고 있습니다. 이들이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공로신앙을 내려놓고 대신 은혜신앙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들은 태산 같은 주님의 은혜를 붙들고, 먼지 같은 자기 의, 공로의식, 보상심리와 같은 것들을 털어버려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사도바울은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은혜의 큼과 자기 공로의 작음을 잘 알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항상 감사가 넘치는 신앙생활을 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가 부르심 받은 것을 감사하고 쓰임 받은 것을 감사하고 영생을 얻은 것을 감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기 의와 공로의식, 보상심리를 깨시려고 종종 서열파괴, 공로파괴적인 조치들을 하십니다. 나보다 더 못해 보이는 사람들이 더 축복을 받도록 하십니다. 이런 것을 인간적인 눈으로 보고 부당하고 공정하지 않다고 접근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헛된 자기 의와 공로의식과 보상심리를 깨시려는 것으로 알고, 오히려 그런 것들을 털어버리는 계기로 삼으며 더욱 은혜신앙위에 굳게 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 중요한 것은 봉사한 시간이 아니라 질입니다. 일찍 온 사람들은 부르심 받은 감격을 잃어버리고 매너리즘, 형식주의가운데 빠져 기계적 충성, 질 낮은 봉사를 하였던 것 같습니다. ‘종일 수고하였다’ ‘견뎠다는 표현을 보면 그들이 별로 기쁘지 않게 일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늦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감사한 마음, 죄송한 마음으로 먼저 온 사람들보다 몇 십 배 열심히 일했으며 기쁨이 충만했던 것같습니다.

 

본문에서 먼저 된 사람들은 모태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2세들, 초등학교 때나 청소년 때 부르심을 받은 사람, UBF의 경우 대학교 1학년 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들 중에 신앙생활을 마지못해 하거나 매너리즘가운데 기계적으로 하는 이들이 매우 많습니다. 감격도 열정도 없이 마지못해 예배드리고, 교회에 가고 인상 쓰며 억지로 봉사합니다.

 

늦게 부르심 받은 이들은 대학교 4학년 때나, 군대 마치고, 혹은 졸업 후에 학사 때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혹은 죽기 직전에 병걸려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이들은 간절합니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주의 일을 합니다. 사도바울은 12사도보다 늦게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빚진 자의 심정으로 더욱 충성하였습니다. 그래서 정말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고 더 많이 열매 맺었고 기독교회사에서 가장 큰 자가 되었습니다.

 

이상의 이야기는 어떤 부르심이 더 낫다는 것이 아닙니다.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가운데 인격적으로 이루어졌기에 모두 베스트입니다. 사무엘, 다윗, 다니엘 등 대부분의 주의 종들이 일찍 부르심을 받았고 예수님의 사도들도 모두 젊은 날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일찍 부르심을 받아 영적 가치관을 체계화시킬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고 주님의 포도원에서 열매를 많이 맺었습니다. 늦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장점은 세상을 경험하고 왔기에 어떤 말씀을 보아도 절절하며,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의 일을 할 때 시간을 10, 100배 귀하게 사용함으로 일의 총량은 먼저 온 자들보다 오히려 더 많습니다.

 

요는 어떤 마음, 어떤 자세로 주님의 부르심을 감당하는 가입니다. 감격과 감동으로 하루하루 부르심을 감당하면 그가 먼저된 자이든, 나중된 자이든 상관없습니다. 그가 나중된 자이기에 그런 감격이 있다면 그는 복된 사람입니다. 먼저 된 사람이지만 그런 감격을 유지하고 있다면그는 더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감격과 즐거움으로 주님의 부르심을 감당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감격과 즐거움을 유지하면서 우리가 신앙생활하고 주의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게 가능할까요? 사도바울은 지나간 일은 잊어버리고 항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푯대를 정하고 살았습니다. 그럴 때 그는 죽을 때까지 소원과 열정을 유지하고 끊임없이 성장하는 기쁨과 감격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김형석 교수는 102세가 되었는데 아직도 배우고 성장하는 기쁨이 있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4,5장을 보면 믿음의 선진들이 900 세 정도를 산 것으로 되어 있고 그중에 에녹은 가장 짧은 365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하루하루가 주님과 동행하고 영적 성장을 이루었기에 그의 삶은 365일처럼 짧게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감격과 즐거움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럴 때는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자 하는 피나는 투쟁도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실패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간을 잘못 쓰기 때문입니다. 결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시간을 절제해서 쓰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인데, 본성대로 살면 시간을 절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잠언기자는 절제하는 사람은 성을 빼앗는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남에게 전파한 뒤에 자신이 버림받을 까봐 처절한 자기와의 싸움을 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자기와의 싸움을 달리기와 권투에 비유했는데 향방 없이 달리지 않고, 허공을 치듯 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시간을 가장 잘 쓰는 것은 어떻게 쓰는 것입니까? 성경공부와 기도에 쓰는 것입니다. 영원히 남은 주의 일에 쓰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제의 실패를 만회하도록 삶의 단위를 하루씩 허락하셨습니다. 어제 실패했으면 오늘 다시 일어나 잘 하면 됩니다. 우리는 종말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종말의 징조들이 있습니다. 사실상 우리는 언제 역사와 인생의 마지막 종소리를 들을지 모릅니다. 코로나 기간에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목회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꽤 많은 나이였지만 이 땅에서의 삶의 계획이 더 있었는데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한 유명한 기독실업인은 앞으로 귀하게 쓰임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분이었는데, 61세인데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어리석은 부자에게 오늘 밤에 그 영혼을 도로 찾겠다고 하면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12:20,21).

 

그러니, 우리는 매일 오후 5시에 부르심 받아 마치 1시간 남은 사람들처럼 주의 일에 집중하는 것이 적절한 태도입니다.

 

 

결론입니다.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될 자가 많습니다. 우리가 자기 의를 내려놓고 은혜신앙으로 충성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이제 오후 5시에 부르심 받아 1시간 밖에 일할 시간이 없는 사람들처럼 주의 일을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이번 추석명절에도 우리가 이런 심정으로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리고 가을학기 영혼의 추수를 위해서 애쓸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