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31강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말씀 마태복음 21:23-46
요절 마태복음 21: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오늘 말씀은 성전개혁에 분노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의 권위를 따져 묻자, 예수님이 그들을 상대하신 후, 비유를 통해 그들의 문제를 지적하시며 그들이 당할 심판을 경고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과 더 나아가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를 빼앗기고 다른 열매 맺는 백성들이 그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과 선민 이스라엘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왜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깁니까? 우리가 본문을 통해 종교지도자들과 이스라엘의 문제를 깊이 돌아보고 우리도 깊이 회개하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성전개혁을 하시고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실 때였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자신들이 유대나라에서 최고의 영적 권위를 지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들이 허락한 성전 매매상들을 책망하고 쫒아낸 것으로 자기들의 권위가 크게 손상되고 자기들의 치부가 드러났다고 생각하며 분노했습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의 질문에 답을 하면 자신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 지 대답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무엇입니까?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왜 이런 질문을 하신 것입니까? 세례요한도 예수님처럼 사람이 부여한 권위로 일한 분이 아닙니다. 그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일했습니다. 예수님도 요한처럼 모태로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으며, 누구의 지시나 방향을 받지 않고 광야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을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예수님을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느냐하고 같은 맥락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그들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25b-27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앞에 어떻게 대답할 지를 궁리했습니다. 세례요한의 권위가 하늘로부터 라고 대답하면 왜 그를 믿지 않느냐고 지적을 받을 것이고 세례요한의 권위가 사람에게서 라고 대답하면 세례요한의 권위를 깊이 인정하고 있는 대다수의 백성들로부터 큰 비난을 받을 까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우리가 알지 못하겠노라” 곧 “모르겠다” 는 청문회에 나온 사람들이 많이 쓰는 대답을 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진리보다는 자신들의 유불리에 따라 반응하는 이들로 진실한 대화를 하기 힘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이들에게 대답이 무의미하기에 예수님은 자신도 무슨 권위로 일하는지 대답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배웁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영적 권위가 사람이나 기관이나 조직에서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관이나 조직이 어떤 것을 검증하고 막나가는 것을 방지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기관이나 조직이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고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내적 확신을 가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도바울은 부활의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깊이 인정하지 않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고 그 길을 갔습니다. 우리 모임도 평신도선교기관으로 초기에 무슨 권위로 성경을 가르치느냐고 비판을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사모님들이나 학생들이 가르칠 때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성경공부에 많은 성령의 역사와 열매가 있자 이제는 한국교회가 인정하는 모임이 되었습니다. 선교사파송으로는 한국 1위의 기관으로서 권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역으로 모임의 권위에 기대는 또 다른 우를 범해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나의 부르심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평가받을 그날을 바라보며 충성하는 성경선생, 목자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이 옳다면 권위나 타이틀을 문제삼지 않고 그 말을 들어야 합니다. 사두개인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의 행위가 옳은 지 그른 지 보다 무슨 권위로 그런 행동을 하는 지를 따졌습니다. 누가 말하든지, 설령 어린아이가 말한다 하더라도 그 말이 옳으면 그것을 수용해야 합니다. “네가 뭔데, 네 나이가 몇인데,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하기보다는 말 자체를 놓고 곰곰이 생각해 보고 그 말이 옳다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쉽진 않지만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다윗도 나단 선지자의 뼈아픈 지적을 받아들였쟎습니까? 우리가 권위주의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같은 형제자매로서, 누구의 말이든 잘 듣고 회개하는 종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진실하지 못하고 정치적인 종교지도자들과 대화를 중단하셔야 하나 이들을 섬기고자 하는 사랑과 심정으로 계속 말씀하십니다. 세 가지 비유를 통해 그들의 문제를 가르쳐 주시고 그들이 회개하도록 끝까지 도우십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두 가지 비유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비유는 두 아들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라 하자 맏아들은 “가겠나이다.” 대답만 잘한 후에 실제는 가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둘째 아들은 싫다고 한 후에 뉘우치고 갔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예수님은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했냐고 종교지도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둘째이니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종교지도자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세리와 창녀들은 세례요한의 영적 권위를 인정했지만 종교지도자들은 끝내 세례요한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의 경우, 끝까지 뉘우쳐 믿지 않았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여러 가지 이유로 잠깐 진리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자존심이 상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에 속한 사람은 끝내는 뉘우치고 복종합니다. 하지만 악한 마귀에 속한 사람은 끝내 뉘우치지 않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끝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둘째로, 종교지도자들은 겉으로는 말은 번지르게 하지만 실제로는 삶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은 사람앞에서 하는 신앙생활, 진실되지 못한 신앙생활이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은 세리와 창기들보다 먼저 되었으나 나중될 것이며 심지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도 못할 것입니다.
다음은 유명한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입니다. 33절을 보십시오.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산울타리와 포도즙 짜는 틀과 망대를 만들었습니다. 울타리와 망대는 포도원 시설이 매우 좋고 지킬 가치가 있으며 규모가 크다는 것을 뜻합니다. 주인은 이 최고의 포도원을 만든 다음 어떻게 했습니까? 땅 한 평도 없는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습니다.
땅이 없는 농부들이 이렇게 잘 만들어진 포도원을 많지 않는 세를 주고 경작하게 되었다는 것은 횡재수준의 은혜를 입은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포도원 주인은 바로 옆에 살면서 소작농들을 닦달하지 않고 자유롭게 농사지을 수 있도록 타국으로 갔습니다. 소작농들은 주인의 은혜에 감지덕지하면서 “감사합니다.”를 연발했을 것입니다. 주인이 타국에 간 후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편지들을 쓰기도 했을 것입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열매 거둘 때가 가까이 왔습니다. 주인은 세에 해당하는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냈습니다. 농부들은 그 종들을 주인이 온 것처럼 환영하고 감사하며 잘 대접해야 했습니다. 시원한 음료수는 기본이고, 식사도 대접하고 하룻밤 묵고 가도록 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포도원에서 나온 열매 중에 최고의 열매들을 골라 세를 준비하여 종들의 손에 들려 보내야 했습니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약속한 세가 1/10이더라도, 2/10, 3/10으로 넘치게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이 어떤 어이없고 황당한 짓을 했습니까? 35절을 보십시오.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농부들의 만행이었습니다. 그들은 한둘이 그런 것이 아니라 작당하여 대부분의 농부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농부들이 왜 이렇게 변했을 까요? 이는 그들이 처음에는 주인의 은혜에 감사했지만 차츰 열매와 포도원에 대한 욕심이 들었고 주인에게 열매를 바친다는 것이 너무 아깝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인에 대한 감사를 잃었습니다. 오히려 주인에 대한 원망이 생겼습니다. 주인이 아무것도 안하면서도 악덕기업주처럼 세를 착취해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열매와 포도원에 대한 욕심 때문에 당연히 세를 바쳐야 하는 청지기의 자세를 잃어 버렸습니다.
주인은 이렇게 자기들의 신분과 정체성을 잃어버린 농부들에게 처음보다 많은 종들을 다시 보내어 어찌하든지 주인과 청지기의 바른관계를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들은 똑같았습니다. 이에 주인은 어떤 결정을 내립니까? 37절을 보십시오. 자기 아들을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기대감을 표시했습니다. 보통 아들은 아버지와 얼굴이 닮습니다. 그러니까 아들을 보면 아버지를 기억하고 정신을 차릴 수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주인은 농부들에게 마지막까지 소망을 두고 어찌하든지 바른 관계성을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사실상 아들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주인은 아들보다 농부들을 더 사랑하는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주인의 놀라운 인내와 사랑에 농부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들은 아들을 보자 “상속자니 자 죽이자!” 라고 했습니다. “상속자니 자 공경하자!” 가 아닙니다. 상속자니 죽이면 포도원이 자기들의 것이 되지 않겠는 가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주인의 사랑과 인내와 소망을 짓밟고 배은망덕을 넘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짓을 했습니다. 그들은 어리석게도 주인의 사랑과 인내를 오판했습니다. 자신들의 교만과 악행에도 직접 오지 않는 이유는 주인이 노쇠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그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끌고 나가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그들의 포도원에 대한 탐욕은 결국 주인의 아들을 죽이는 데 까지 발전했습니다. 이상이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여기까지 이야기하신 다음에 종교 지도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40) 종교지도자들은 대답합니다.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41)
이상의 비유는 넓게는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는 우리 인생들의 어리석고 악한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좁게는 하나님이 맡기신 축복과 은혜를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만을 위해 쓰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종교지도자들의 문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포도원을 경작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 정욕을 채워줄 우상을 만들고 자기만족과 욕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이방인들과 똑같이 살았습니다. 이런 그들을 깨우치고 돌이키고자 하나님은 많은 선지자들을 보냈지만 그들을 싫어하여 그들을 때리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회개치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어떻게 되는 지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42-4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 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은 마침내 하나님이 보내신 그 아들 예수님까지 배척하고 죽입니다. 예수님은 시편 118:22절에 예언된 대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되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됩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은 집을 건축할 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초석이며 기준석이며 벽과 벽을 연결하는 연결석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와 부딪히는 자를 산산조각 내는 심판석이 되십니다. 이는 유대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지만 하나님이 예수님을 부활시켜 하나님의 구속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분이 되게 하심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어, 예수님은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기고 다른 ‘열매 맺는 백성’이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이 예수님의 말씀은 역사상 그대로 성취됩니다.
이상에서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포도원 주인에 해당되시는 하나님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며 그에게 순종하지 않고 자신들이 삶의 주인이 되어 자기만족과 욕심만을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하나님은 이제 영적인 축복을 ‘제 때에 열매를 바치는 사람들’에게 넘기십니다. 제 때에 열매를 바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새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어찌하든지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이 보내신 에수님을 영접하고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이들입니다.
이 말씀대로 선민 이스라엘은 영적 축복을 상실했습니다. 축복중의 축복은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입니다. 에서는 자기 정욕을 따라 산 결과 영적 장자권을 상실하며 나중에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지만 그것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은 최고의 축복이며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은 최고의 불행입니다.
이상에서 하나님께 쓰임받으려면 삶에 대해서 청지기적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참고로 청지기란 위탁관리인을 의미하는 한국적인 말인데, 한자로 廳直이입니다. 언제든지 대기하고 서 있다가 주인의 부름을 듣고 봉사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헬라어로는 ‘오이코노모스’로 주인을 대신하여 집을 다스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청지기 자세는 하나님이 높이 평가하고 가장 기뻐하시는 자세중 하나입니다.
예전에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내 인생은 나의 것입니까? 하나님이 나의 정욕만을 위해 사는 생명을 언제든지 가져가 버릴 수 있습니다. 이번 주 젊은 중년의 나이에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유투브로 보았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은 등산을 좋아하고 유머감각도 좋고 잘 생긴 남자였습니다. 한 사람은 TV에 나왔던 요리 전문가 여성이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은 이혼하고 아들과 함께 사는 미모의 여성이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이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날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명을 자신의 뜻대로 컨트롤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셨다가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에 거두어 가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앞에서 그 뜻대로 살았는 지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생명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물질도, 가정도, 배우자도 아이들도 그렇습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 자신과 우리가 가진 것을 사용하길 원하십니다. 또 이런 자들을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 청지기적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저는 가장 청지기 자세가 훌륭했던 분을 모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십보라와 목가적인 가정을 이루고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 목동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에게 그의 삶을 애굽선교사로 내어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랬을 때 그는 자기를 부인하고 그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그는 부담스런 애굽 왕 바로에게 10차례나 도전하라는 방향에 자기를 부인하고 순종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가나안 목전에서 작다면 작은 모세의 허물을 잡아서 “너는 그 땅에 들어가지 말라, 너는 바라만 보고 죽으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때 그는 모든 것을 여호수아에게 위임하고 느보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그동안 40년 이상 감당한 사역을 미련없이 내려놓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맡기신 이스라엘 포도원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잠시 자신에게 맡기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주님이 요구하실 때 미련없이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청지기 자세가 되어 있는 모세를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그를 높이사 구속역사에서 불멸의 지도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 대해서, 시간에 대해서, 물질에 대해서, 직분에 대해서, 자녀와 양들에 대해서 이런 청지기 자세를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3절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열매 맺는 백성’이 차지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열매 맺는 백성이란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은 마태복음 7:19-21절에서 열매에 대해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지 울 것이라 엄중하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열매로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어 예수님은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즉 열매는 주님의 뜻에 따라 사는 순종의 열매입니다. 주여, 주여 한다고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주여 주여 주여 삼창해도 못들어 갑니다. 여러분 주여, 주여 라는 말을 많이 쓰시죠? 주여, 주여 란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무시무시한 말입니다. 주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의 생명과 시간과 물질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말입니다. 결코 함부로 쉽게 할 말이 아닙니다. 왜 주님을 주님이라고 불러놓고 주님 뜻대로 살지 않고 자기 맘대로 삽니까? 이것은 주님을 우롱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삶속에서 주님께 순종하는 삶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말만 번지르게 하고 실제로는 실제 삶에서는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자기 정욕대로 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잎만 무성하고 열매없는 무화과나무 같은 삶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그들에게 주님은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우리가 주님이라고 불렀으면 날마다 그 뜻에 순종하고 그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순종의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께 귀히 쓰임받는 개인, 공동체, 민족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이시간 우리가 청지기 자세를 기뻐하시며 우리가 자기 정욕에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께 실제 순종하는 삶을 살기 원하시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하나님께 쓰임받습니다. 우리가 어찌하든지 청지기 자세와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