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마태복음 32강
임금의 아들의 혼인 잔치
말씀/ 마태복음 22:1-14
요절/ 마태복음 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오늘 본문은 성전에서 장사꾼을 몰아내신 후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당신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가, 이런 권위를 주신 분이 누구인가 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질문에 대해 그 답변으로 주시는 마지막 세 번째 비유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새롭게 배우고 은혜받는 시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세 번째 비유에서 예수님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천국이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준비하는 어떤 임금이 처한 그런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준비하는 임금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습니까? 임금은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입니다. 그의 아들은 장차 그의 왕위를 이어받을 왕세자입니다. 임금은 그의 아들이 장차 한 나라를 다스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왕이 될 수 있도록 어려서부터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교육하였을 것입니다. 혹여나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사람들을 깔보고 괴롭히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임금 위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사랑으로 돌보는 왕이 되도록 여러모로 교육하고 훈련하였을 것입니다.
아들은 무럭무럭 성장하여 어느덧 결혼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한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 왕의 성품과 자질도 중요하지만 왕비의 성품과 자질 역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왕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은 특별히 이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던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마침내 왕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가장 적합한 왕세자비를 얻게 되었습니다. 합당한 며느리감을 얻게 되었을 때 왕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기쁨이 충만했을 것입니다. 이제 왕의 아들의 결혼식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왕은 자기의 기쁨을 잔치에 참여한 모든 하객들과 함께 나누기 원하였습니다. 2절과 3절 사이에는 대략 6개월에서 1년 정도의 간격이 있습니다. 결혼식은 하객의 수에 따라 그 규모도 달라지고 모든 준비과정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결혼식이 일단 정해지면 1차 초청장을 보내게 됩니다. 대략 이맘 때에 결혼식을 할 예정이니 참석할 수 있는지 여부를 묻습니다.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도 결혼식 때 서양식으로 초청장에 R.S.V.P.라는 표현을 종종 씁니다. 이는 Réponse s'il vous plaît 의 줄임말로 결혼식 참석 여부를 알려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알려온 이들의 수를 파악하여 그 규모로 결혼식 준비를 시작하게 됩니다. 왕은 이런 규례를 따라 초청장을 보냈고 그들 대부분은 참석하겠다고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왕은 참석자의 숫자에 맞추어 성대한 결혼식 준비를 하였습니다.
마침내 시간이 흘러 결혼식 날이 다가왔습니다. 당시 관례에 의하면 결혼식 날짜가 정해지고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을 때 초청했던 사람들에게 정확한 날짜를 알려주게 됩니다. 왕은 이런 관레를 따라 종들을 보내 그 청한 사람들에게 잔치에 오라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청한 사람들이 혼인 잔치에 오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황당이 일이 다 있습니까! 왕이 초청했는데 초청받은 백성들이 왕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혼인잔치에 오기 싫어하다니 세상에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당시 고대 사회의 정서에 의하면 이것은 왕에 대한 명백한 반역이었습니다. 왕과 왕세자를 함께 우롱하고 조롱하는 처사였습니다. 보통 일반적인 왕이라면 즉각 지엄한 벌을 내림으로 왕의 권위와 존엄함을 회복시켰을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본문의 왕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이해심과 인내심이 풍성하였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이 결혼잔치를 왕이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다해 준비했는지 잘 몰라서 그럴 수 있다고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 왕이 얼마나 이 잔치를 오랜 기간 정성을 다해 준비했는지 소상하게 알려주도록 하였습니다. 이 초청의 문구에서 왕은 “내가” 오찬을 준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왕은 신하들 중 한 사람을 결혼식 준비 위원장으로 세워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일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은 이 결혼식이 너무도 중요하므로 친히 모든 것을 준비하였습니다. 결혼식 피로연의 주메뉴는 무엇으로 할지, 결혼식을 축하하는 2부 순서는 어떻게 할지 전부 왕이 직접 챙겼습니다. 요즘 결혼식 때 피로연 뷔페 음식을 보면 값은 매우 비싸지만 사실 신선하지 않고 등급이 떨어지는 음식 재료를 쓰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왕은 모든 것을 최고급으로 준비하였습니다. 최고급 한우 요리, 신선한 고급 회, 일식과 한식, 양식을 원하는대로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하였습니다. 이 잔치를 통해 왕은 자기의 기쁨을 초대받은 모든 손님과 함께 나누기 원하였습니다. 또 2부 순서로 세계 최고의 수준을 가진 빈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단과 지휘자로 정명훈을 초청하였습니다. 또 세계 최고 수준의 성악 가수들인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를 단체로 초청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왕은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보통 잔치에서 내가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자신있게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별로 차린 것은 없지만 맛있게 드셔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임금은 자신있게 ‘내가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임금이 얼마나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아들의 혼인잔치를 세상의 그 어떤 혼인잔치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베스트로, 완벽하게 준비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다음으로 임금은 “혼인 잔치에 오소서” 말합니다. “오소서”라는 표현은 영어로 하면 “Please come”에 해당하는 매우 정중하고도 간곡한 표현입니다. 본문의 임금은 세상에 이런 임금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놀라운 겸손함을 보여줍니다. 세상에 어떤 왕이 오기 싫어하는 백성들에게 “오소서”라고 간곡하게 부탁할까요.
5-6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본문의 비유에 등장하는 임금과 그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은 정말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상식을 뛰어넘는 일이 난무합니다. 임금이 너무 겸손한 자세로 나와서 그랬을까요. 임금이 왕으로서 권위를 내려놓고 겸손하게 초청하니 초청받은 이들의 마음에 왕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마음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인간은 참 묘합니다. 겸손하게 나오면 상대방을 얕잡아보고 무시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자기가 뭔가 대단한 존재이기 때문에 상대방이 이렇게 겸손하게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본문에서 초청받았던 이들은 1차 초청을 거절했음에도 왕이 더욱 겸손한 자세로 나오니 그 교만하고 거만한 마음이 풍선처럼 더욱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들은 종들을 통한 왕의 초청을 돌아보지도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영어성경에 “But they paid no attention and went off(NIV)”로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왕이 보낸 종들을 투명인간 취급하였습니다. 왕의 종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등을 돌리고 각자 자기 볼 일을 보러 갔습니다.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차 일을 보러 가버렸습니다. 이들에게 왕을 조금이라도, 정말 눈꼽만큼이라도 존중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떤 구실이나 핑계라도 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보지도 않고 가 버림으로 왕을 멸시하는 마음을 온 몸과 행동으로 드러냈습니다.
한편 종의 말을 듣고 가버린 사람들과 달리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왕의 초청에 응하려고 남아있었을까요. 놀랍게도 그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였습니다. 종들의 수염을 뽑고 따귀를 때리며 조롱한 후에 집단 린치를 가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본문의 비유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앞둔 왕의 큰 기쁨과 설레임, 그 왕을 멸시하는 하객들의 놀라운 반응을 극적으로 대조하며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비현실적인 일이 실제 일어날 경우 사람들은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혹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라고 말합니다. 비유는 임금과 백성 사이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음을 보여줍니다.
1차적으로 본 비유는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 질문하는 종교지도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통해 천국 잔치에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하고 멸시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능력과 사역을 통해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임이 분명함에도 그에게 세례받기를 거절하였습니다. 또 예수님의 사역과 능력을 통해, 무엇보다 그가 구약말씀을 성취하는 메시야임이 분명함에도 그를 메시야로 영접하기를 거절하며 “너는 누구냐”라는 무례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너는 누구이며 너의 권위는 어디에서 왔느냐” 묻는 종교 지도자들의 무례함이 바로 본문의 왕의 백성들이 하는 행동과 같은 것임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더 나아가 본문의 비유는 하나님의 겸손한 초청을 거절하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합니다. 혼인 잔치는 최고의 기쁨의 상징입니다.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혼인 잔치는 약 1주일간 진행되었습니다. 이 기간 잔치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은 이 기간만큼은 모든 세상근심과 염려를 다 잊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며 신랑과 신부의 기쁨, 또 신랑의 부모님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참된 기쁨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인공 조미료를 만들어내듯 참된 기쁨을 흉내낸 인위적인 기쁨을 만들어냅니다. 춤추고 노래하고 놀고 먹고 마시고 게임하며 인위적인 기쁨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인공 조미료가 몸에 해롭듯 인위적인 기쁨은 영혼에 유익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해롭습니다. 이 세상에 참된 기쁨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 때문입니다. 죄로 오염된 세상에 기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기쁨을 상실한 세상에 참된 기쁨을 추시기 위해 천국 잔치를 예비하셨습니다. 천국에 참된 기쁨이 있는 것은 그곳에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죽은 다음에 가는 천국도 있지만 죄가 없는 천국의 기쁨은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메시야 예수님, 구주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죄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시고 천국 잔치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천국 잔치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복음 전파의 일꾼들을 통해 초청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비유가 가르쳐주는 중요한 사실은 이 하나님의 초청의 방식이 매우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것입니다. 비유에서 임금의 초청의 방식이 비현실적으로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만약 비유에서 종들이 칼과 무기로 중무장을 하고 겸손한 초청의 말 대신 거칠고 험한 말로 위협을 했더라면 백성들의 반응이 더 좋았을까요? 아마 그럴 것입니다. 백성들은 두려워하며 어떤 급한 일이 있더라도 다 미루고 왕의 혼인잔치에 참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면 그들이 진심으로 왕의 혼인잔치를 축하해줄 수 있을까요? 진심으로 왕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었을까요.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억지로 끌려온 것이기 때문에 마음에 없는 박수를 치고 마음에 없는 웃음을 지었을 것입니다. 임금은 그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자발적인 마음으로 와서 진심으로 왕의 기쁨에 참여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이 인생들을 천국 잔치에 초청하시는 방식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주관자이신 것과 너무도 어울리지 않게 겸손하고 온유한 방식으로 인생들을 천국 잔치에 초청하십니다. 하나님은 무서운 모습으로 각 사람들에게 나타나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위협하고 협박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온유하고 부드러운 말로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이 바로 죄인들을 천국 잔치의 기쁨에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온유하심의 표현입니다. 또한 이 말씀을 전하는 복음 전도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비유에 나오는 종들처럼 너무도 평범하고 humble 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본성이 있습니다. 뭔가 무섭게 해야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체로 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초청의 음성에 자발적인 마음으로 반응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도 성경 말씀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온유한 음성으로 우리를 천국 잔치에 초청하십니다.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우리가 이 겸손하고 온유한 주님의 초청의 음성을 듣고 “네, 주님, 제가 주님이 준비하신 천국잔치에 지금 참여하겠습니다.” 응답하는 복된 영혼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비유에서 그토록 온유하고 겸손했던 임금은 초청받은 이들이 절대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어 종들을 모욕하고 죽였을 때 진노를 폭발하였습니다. 군대를 보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동네를 불사르도록 명을 내렸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임금처럼 하나님은 한없이 자비롭고 은혜로우십니다. 죄인이 회개하기만 하면 죄를 용서하기를 기뻐하십니다. 누구든 하나님께 나아와 구하면 큰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죄가 선을 넘었을 때 진노하심으로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보존하십니다.
8-10절을 보십시오.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비유에서 임금은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합당하지 않으므로 하객이 없이 잔치를 해야 할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임금은 하객이 없이 잔치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임금은 종들을 시켜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하였습니다. 명을 받은 종들은 네거리 길에 나갔습니다. 네거리 길은 온 세상에서 별의 별 사람들이 다 모이는 곳입니다. 할 일 없이 서성이는 사람들, 세상의 죄 가운데 방황하는 사람들, 가난한 부랑자들 등 대부분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임금은 개의치 말고 모두 데려오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은 혼인 잔치가 하객들이 만장한 가운데 왕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기쁨의 잔치가 되기 원했습니다.
비유의 이 내용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통한 천국 잔치의 초청을 종교 지도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절했을 때 그 은혜가 세리와 죄인들, 더 나아가 이방인들에게 넘어갔음을 보여줍니다. 이 천국 잔치에는 신분이나 성별, 인간조건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떠한 자라도, 어떠한 죄인이라도 이 천국잔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임금이 잔치에 참여한 손님들을 보러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거기에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 결혼식장에서 입어야 하는 예복은 흙이 묻지 않은 깨끗한 옷이었다고 합니다. 밖에서 일하는 일반 노동자나 농부의 경우 옷이 흙과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런 옷은 보기에도 그렇지만 또 심한 땀냄새가 났습니다. 결혼식장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흙이 묻지 않은 깨끗한 예복을 입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흙과 땀이 범벅이 된 작업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깜짝 놀란 임금은 그에게 물었습니다. “친구여 어찌하여 자네는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는가?” 그가 왜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왔을까요? 어떤 이는 사거리 길에서 초청을 받고 곧바로 오느라 미처 예복을 입지 못하고 왔다고 그를 위해 변명을 해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혼 잔치에 예복을 입고 참여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상식이고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사거리 길에서 함께 초청받은 많은 이들이 다 예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볼 때 임금의 종들이 참석자들이 다 예복을 입을 수 있도록 광고하고 여러모로 도와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탁이 필요한 사람은 세탁을 해주고 옷이 없는 사람은 옷을 구해다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거기에 대해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왔는가 하는 왕의 질문에 아무런 답변을 하지 못한 것을 볼 때 그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전혀 변명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왜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참여하였을까요? 그는 종들이 잔치에 오라고 하니까 따라오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임금의 기쁨에 동참할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임금의 아들의 잔치를 멸시하였습니다. 그는 몸은 결혼식장에 있었으나 마음은 임금의 종들을 멸시하고 잡아 죽였던 처음 초청받은 이들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비유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어떤 사람을 가리킬까요?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을 구주로 믿는 참된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믿음이 없어도 교회에 다닐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어도 모든 교회의 모임에 참여할 수 있고 교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중심에 주 예수께서 내 죄를 대신하여 피흘려 죽으셨다는 참된 믿음이 없는 자는 예복을 입지 않고 천국 혼인 잔치에 참여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다음으로 예복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을 의미합니다. 계시록 19:8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어떤 분은 여기에서 예복이 믿음이면 믿음이고 행위면 행위이지 둘 다일 수는 없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여기에 대해 칼빈이 아주 명확한 해설을 하였습니다. 칼빈은 믿음과 행위를 분리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칼빈은 로마서를 강의할 때 칭의(의롭다 함을 받는 것)와 성화(거룩하게 되는 것)를 분리할 수 없고 둘이 하나라고 하였습니다. 칭의와 성화는 그 개념은 다르지만 둘을 분리할 수 없고 둘은 하나입니다.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을 때 그 순간 그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성도가 됩니다. 신앙생활을 잘 해서 나중에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의롭다 함을 받을 때 그는 성도가 됩니다. 칭의는 의롭다고 선포함으로 계속 유지되는 신분이지만 성도는 어제보다 오늘 더 거룩한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둘은 개념은 다르지만 분리될 수 없고 함께 갑니다.
이와같이 믿음과 행위는 분리되지 않고 함께 갑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7:16-20절에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와같이 참된 믿음이 참된 믿음의 열매를 맺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입니다.
예복에 관한 비유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 비유의 클라이맥스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반응이 중요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부르심을 거절함으로 합당한 천국 백성이 아닌 것을 스스로 입증하였습니다. 이제 그 부르심은 세리와 창기들, 또 이방인들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역시 합당한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그것은 첫째 비유에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둘째 비유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것이고 셋째 비유에서 예복을 입는 것입니다. 예복을 입는 것은 참된 믿음을 가지는 것이고 그 참된 믿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나무인가, 우리가 정말 구원받는 자인가 하는 여부는 하나님께 직접 여쭤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매일매일의 삶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우리에게 정말로 강한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정말 좋은 나무인지, 구원받을 자인지 스스로 돌아보도록 돕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 각자 자신을 돌아보고 혼인잔치에 입을 예복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종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예복을 입지 않은 자가 처할 운명은 비참합니다. 바깥 어두운 곳은 영원한 지옥을 상징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영원토록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비유의 결론으로 예수님은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구원받을 자가 의외로 적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청함을 받은 자보다는 적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교회에 다녔다고 해서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을 가진 자라면 그의 인간조건에 상관없이 어떠한 자라도 다 천국잔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천국 잔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를 초청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혼인 잔치에 오소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의 음성을 듣고 예복을 예비하여 천국잔치에 다 참여하는 복된 영혼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