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마태복음 33강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말씀 마태복음 33:15-46
요절 마태복음 33: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오늘 말씀은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연이어 예수님을 시험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질문하는 것에 대해 명쾌하고 심오한 답을 주셨습니다. 이시간 우리가 가장 큰 계명,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대해서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5-20까지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들은 바리새인들은 회개하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를 상의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앞잡인 헤롯당을 데리고 와 예수님을 상남자 나훈아처럼 거침없이 진리를 말하는 분이라고 한껏 띄워주어, 민감한 이슈에 대해 반로마적 발언을 거침없이 이야기하여 결국 헤롯당에 의해서 로마총독에게 고발되도록 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간계를 아시고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세금 낼 돈을 가져와 보이라고 하시면서 가져온 데나리온에 누구의 형상과 글이 새겨져 있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이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21b를 보십시오.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은 로마정부에 세금을 납부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대부분 바리새인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정부에 세금을 내는 것에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민족 감정으로 로마정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통치를 받는 것에 대해 선민으로서 자존심이 상하고 굴욕감을 느껴 로마에 저항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로마정부의 통치를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으로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이스라엘을 겸손케 하시기위해 로마정부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과거 바벨론에게 끌려갈 때도 민족주의적 감정으로 저항하고 대적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바벨론의 권세에 복종하도록 방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독립운동을 했던 열혈당원 시몬에게 한번도 독립운동, 민족운동, 정치참여를 하도록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회복을 묻는 제자들에게도 성령을 받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즉 복음운동, 세계선교운동을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상에서 세상나라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다면 성도는 세상정부에 협조해야 하며 세상정부가 부과한 의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성도는 모든 종류의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며 그 권세아래 있는 이로서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라는 말씀은 뒷부분에 포인트가 있습니다. 즉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보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로마의 권세도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로마황제가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 대신에 자신을 숭배하도록 요구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거부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 속해 있기에 성도는 세상나라가 하나님께 돌려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 기도제목이 바로 만유회복의 기도제목입니다. 구체적으로 성서한국, 세계선교 기도제목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이 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들이 이스라엘 포도원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것인 이스라엘 포도원에서 주인행세를 하면 안됩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잠시 맡기신 것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지 않고 하나님께 돌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하면서도 심오하고 근본적이었으며 그러면서도 바리새인들의 영적 문제까지 터치하는 성령의 검과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은 놀랍게 여기며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22).
23-33절 말씀은 이번에는 제사장그룹인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을 시험한 내용입니다. 그들은 도저히 대답할 수 없는 이야기와 질문을 만들어 가지고 예수님을 곤란에 빠뜨려 자기들의 권위를 떨어뜨린 예수님의 권위를 떨어뜨리려 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사장 그룹인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부정한 이유는 그들이 인정하는 성경인 모세오경에 부활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이유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두개인들은 내세와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이 땅의 삶이 전부인 것처럼 살았습니다. 이런 그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축복도 이 땅에서의 축복만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이 땅에서 물질과 권력과 쾌락을 많이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장사치들과 결탁하여 이권을 행사하여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기 까지 했습니다. 부활을 부정하는 그들의 소망은 근본적으로 이 땅에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은 모세오경이 말하는 형사취수제에 따라 칠 형제와 결혼한 한 기구한 여인이 부활 때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는 가 물었습니다. 이것은 부활이 있어서는 곤란하다는 논리를 위해 아마도 그들이 만든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 대답하기 난처한 질문앞에서 좀 연구할 시간을 달라고 하시지 않고 곧 바로 대답하셨습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하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예수님은 그들이 다음 세 가지를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성경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깊이 읽지 못한 결과 모세오경에서 눈씻고 봐도 부활의 진리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인정하는 모세오경 중 출애굽기 3:6절을 인용하여 부활을 증거하십니다. 32절을 보십시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하나님은 모세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고 질문을 할 때 위와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평범해 보이나 위대한 부활의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모세 당시에 모두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 당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고 이삭의 하나님이고 야곱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이 말은 그 세분이 모두 살아있고 하나님도 그들의 하나님으로 살아계신다는 의미였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믿음의 조상들은 죽어서 그들의 육체는 무덤에 묻히고 썩었지만 그들의 영혼은 살아있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으로 그들과 교제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그냥 스치고 지나갈 말씀을 가지고 부활의 진리를 입증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성경읽기를 깊이 하여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깨닫고 가르치는 성경선생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몰랐습니다. 대개 부활을 부정하는 이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안다면 죽은 자의 부활은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무에서 이 광대무변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알면 홍해를 가르는 기적도,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도, 부활도 재림도 다 믿을 수 있습니다.
셋째로, 그들은 부활이후의 세계에 대해 몰랐습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부활 때는 사람이 천사들처럼 되어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습니다. 지금은 사람이 죽고, 또 생육하고 번성해야 하기 때문에, 또 외롭기때문에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부활 때에는 사람이 죽지 않으므로 더 이상 생육하고 번성할 필요가 없고 외로움도 없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사이에 정욕도 없어지며 남녀가 결혼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그때 우리는 더 이상 누구의 아내이거나 남편이 아닙니다. 결혼관계의 특수성은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맺어진 형제자매의 관계만 남을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7 형제와 결혼한 한 기구한 여인은 더 이상 누구의 아내일까를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활이후의 삶에 대해 누가 예수님처럼 이렇게 명쾌하게 말할 수 있을까요? 공자는 그의 제자가 죽음이후에 대해 물었을 때 자신은 삶도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유일하신 분이기에 죽음이후의 세계에 대해 분명하고 명쾌하게 가르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이상에서 사람은 반드시 부활합니다. 본문에 부활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영적 부활만 언급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영만의 존재가 아니라 몸을 덧입어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모든 사람은 몸의 부활을 경험합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불멸의 몸을 덧입을 것입니다. 이 부활의 몸을 덧입는 것이 성도의 참된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소망두는 세속적인 크리스천, 현세적인 크리스천에 그치지 않고 부활이후의 세계를 믿고 소망하는 내세지향적인 크리스천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33절을 보십시오. 무리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랬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감탄할 정도로 탁월한 성경선생이었습니다. 34,35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경쟁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꼬리를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더 뛰어남을 보여주기위해서라도 다시 예수님께 도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가져온 시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36절을 보십시오. “선생님 율법중에 어느 계명이 크이니까” 율법에는 십계명을 포함하여 총 613 개의 계명이 있습니다. 248개의 하라는 계명과 365개의 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613개의 계명중에 가장 큰 계명이 어떤 계명인가를 안다는 것은 정말 율법을 해박하게 알고 율법을 꿰뚫는, 율법에 정통한 분만이 답을 할 수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번에도 율법사의 질문을 듣자마자 곧 대답하셨습니다. 37,3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예수님은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인간이 감당해야 할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 6:4,5절을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까? 우리들의 주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광대무변한 우주와 우리를 만드신 분 곧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지 않으셨으면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창조주를 사랑하는 것은 피조물인 인간에게 너무도 당연하고 가장 힘써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을 어느정도 사랑해야 합니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사랑은 마음으로 하는 것임을 알려 줍니다. 마음은 인간 존재의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빠진 사랑은 형식적인 사랑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말했지만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었습니다. 우리는 누가 무엇을 말할 때 마음없이 말하면 영혼없는 말 그만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도 형식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음으로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신명기 6:5절에는 ‘힘을 다하여’ 라고 되어 있는데 왜 예수님은 ‘목숨을 다하여’ 로 바꾸신 것일까요? 힘의 끝자락에 목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을 다한다는 것은 곧 목숨을 다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목숨을 걸고 해야 찐 사랑입니다. 신앙생활도 생명을 걸기 전까지는 장난입니다.
마지막으로,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지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이 감성이라면 뜻은 지성입니다. 즉 ‘생각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까”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까”를 궁리하는 것입니다. 연인과 부부사이에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기쁘게 할 까를 고민합니다. 그래서 상대를 위해 Suprising Event를 계획합니다. Suprising은 아니어도 나를 위한 생각이 깊은 말이나 행동을 하면 감동을 받습니다. 부부관계에서 이렇게 감동을 받으면 밥상이 달라진다는 옛말이 있었습니다. 부산에서 가장 큰 교회 목회자로 은퇴하신 한 목회자가 있습니다. 그는 서울토박이였는 데 사역지를 놓고 기도하던 중 부산에서 섬기기를 원하신다는 사인을 받았고 아무 연고도 없는 그곳으로 내려갔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고자 하는 그에게 많은 양들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그의 목회방향은 한 가지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궁리하고 그 방향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는 한국의 죠지뮬러처럼 기도응답을 많이 받으셨는데 그 비결이 무엇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무엇을 궁리합니까? 노아시대 사람들은 항상 무슨 죄를 지을 것인가를 궁리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궁리하고 실천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39,40절을 보십시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은 둘째 계명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으니’ 라고 하심으로 둘째 계명이 첫째 계명과 같은 맥락에 있고 한 덩어리이며 첫 계명 못지않게 중요함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중요한 둘째 계명은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는 열심이지만 이웃사랑에 대해서는 비중을 낮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하나님을 열심히 찾는 것은 영적 이기주의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찾는 이유가 바로 자신만 잘 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그의 신앙은 열정적이나 결국 수준낮은 영적 이기주의일 뿐입니다.
사랑이란 근본적으로 이타성이 본질입니다. 하나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찐 하나님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뭡니까?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언제든지 자기부인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셨기에 자기 뜻, 자기 원함을 부인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어느정도로 사랑해야 합니까? ‘자신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결코 쉽거나 낮은 수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앉으나 서나 자기를 생각하고 염려하기 때문뿐입니다. 자기 몸을 걱정하고 자기유익, 자기형편, 자기체면을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열등감과 자의식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남들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을 수없이 생각하며 생각에 생각을 이어갑니다. 특정한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행동 배후에는 자기애(自己愛)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만큼 이웃을 생각하고 이웃을 배려하고 이웃이 잘되기를 바라라니 이 얼마나 대단한 기준이며 확실한 방향입니까?
인간에게는 참 사랑을 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참 사랑이 뭘까요?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참 많이 합니다. 특히 남녀관계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남녀가 서로 만족을 위해 좋아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사랑이 아니라 사랑으로 포장된 이기적 정욕인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자식을 사랑하고 자기 양을 사랑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웃사랑은 확실히 사랑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존재인데,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람이 이웃을 사랑할 때 진정으로 삶의 목적을 달성하며 진정으로 삶의 만족과 가치를 느낍니다. 상계동 슈바이쩌를 아십니까?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평생을 봉사하시던 김경희 은명내과 원장께서, 향년 101세로 지난 금요일에 별세하셨습니다. 그는 평생 판자촌을 찾아 다니시며 무료진료를 하였고, 무료독서실, 무의탁노인위한 심부름 서비스, 불우한 청소년을 위한 장학사업을 하면서 2,000명의 학생을 지원했고 상계동과 노원구의 가난한 100가구를 도왔습니다. 그는 가난한 분들의 자존심을 살려 주기위해 1,000원(요새로 하면 3,000원 정도) 진료를 시행했습니다. 그는 70대 후반에 자신이 모은 53억원을 잠시 관리했던 재산을 사회에 돌려준다며 모교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기부했습니다. 죽을 때는 가난한 자들이 조문을 주저하지 않도록 하기위해 조의금을 받지 않도록 유언했습니다. 저는 이 기사를 어떤 분이 페이스북에 포스팅한 것을 보았는데, 그분은 자신도 하늘나라 갈 날이 다가오는데 자신은 세상에서 이웃을 위해서 봉사한 일이 없어서 부끄럽고 초조하기만 하다는 글을 남겼고 많이 공감이 되었습니다. 그의 글은 이랬습니다. “진짜 의사선생님! 천국에서 빛나는 면류관 받으소서... 난 뭘가지고 주님께 나아갈까? 주님앞에 부끄럽다. 주님께 가서 뭐라 말할까? 날 위해 열심히 살다 왔노라고? 날 위해서도 나태하게 살았으니 질책이나 받을까? 이제 하나씩 준비할 때인데 한심 할 따름이다.” 라고 썼습니다. 자기만을 위한 삶은 가장 부끄러운 삶을 살다 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강령이란 말은 ‘일의 근본이 되는 큰 줄거리’ 라는 뜻인데 모든 계명들이 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두 계명에 모아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핵심이 무엇인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를 알 뿐아니라 실천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만민구원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기를 사랑하기에 자기보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가 죽는 것처럼 힘듭니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배워갈 때 가능합니다. 우리가 우리 사랑의 한계를 인정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의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조금씩 배워 진정한 사랑의 사람들로 성장해서 주님앞에 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뛰어난 교수는 탁월한 질문으로 수업을 이끕니다. 41-46절은 예수님이 오히려 바리새인들에게 날카롭게 질문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에서 모순된 두 개념, 즉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면서 다윗의 주라는 상반된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지 질문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지만 신성을 가진 분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성경강의는 모든 사람을 침묵과 경이로움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날 이후로 감히 예수님께 묻는 자가 없었습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의 목적과 방향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떳떳이 주님께 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