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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3년 에스라 2강 홀로 건축하리라 (에스라 3,4 장)2023-09-2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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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가을 에스라 2

 

홀로 건축하리라


말씀/ 에스라 3,4

요절/ 에스라 4:3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지난 주 말씀은 하나님께서 바벨론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사 하나님의 약속대로 포로된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신 내용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이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중단됩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여기에는 어떤 영적 의미가 있는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1. 우선 순위 정하기(1-6)

 

1-6절까지를 읽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지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서 드리려 할새 무리가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서 아침 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켜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리고 그 후에는 항상 드리는 번제와 초하루와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절기의 번제와 사람이 여호와께 기쁘게 드리는 예물을 드리되 일곱째 달 초하루부터 비로소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으나 그 때에 여호와의 성전 지대는 미처 놓지 못한지라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 건축이라는 부품 꿈을 안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맞닥뜨린 현실이 어떠했나요? 땅은 황폐화되어 있었습니다. 건물은 다 무너지고 불타 버렸습니다. 남아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우크라이나 어느 마을과 같았습니다. 3절을 보면 무리가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하였다고 나옵니다. 주위에 있는 모든 나라가 그들을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이죠. 이제 무엇을 해야 하고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 이때 이스라엘 백성이 제일 먼저 한 것이 무엇입니까? 일단 각 성읍 연고지에 가서 정착합니다. 그리고 일곱째 달에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일곱째 달은 유대력으로 새해입니다. 그 달에 중요한 날들이 많습니다. 71일 나팔절, 710일 대속죄일, 715일부터 일주일간 초막절입니다. 그들이 모여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번제를 드렸습니다. 번제는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속죄, 헌신을 의미합니다. 남김없이 태워 드리기에 제사장 몫은 없으며 그 향기를 하나님께서 흠향하십니다. 이 제단은 그 옛날 모리아산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고자 했던 그 장소입니다. 고국으로 돌아온 이스라엘은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회복코자 합니다. 아직 성전이 건축되지 않았으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헌신과 결단을 드립니다. 하나님과 자신들과의 관계가 언약 관계인 것을 확인합니다. 자신들은 하나님만을 왕으로 모시고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합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 참된 예배에 대해 배울 점이 무엇입니까?

 

첫째,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제됩니다. 본문을 보면 2절에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4절에 기록된 규례대로’, 10절에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했다고 나옵니다. ‘내 방식대로’, ‘내 좋은대로’, ‘내 편한대로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에 부합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둘째, 참된 예배는 하나님 중심적이며 다른 사람들과 친교를 나눕니다. 이들은 주위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하였고 성전 지대가 미처 놓여지지 않았지만 먼저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되 기쁘게 드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집중했습니다. 참된 예배는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예민한 관심을 기울입니다. 본문을 보면, ‘일제히 모였다’, ‘다 일어났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함께 모여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고, 위로하며 격려하며 서로에게 힘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요즈음 가나안신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부득이한 사정이 없는 한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18:20) 하셨습니다.

 

셋째, 참된 예배는 일상적인 리듬과 특별한 리듬을 갖습니다. 이스라엘은 일상적인 리듬으로 아침과 저녁에 번제를 드렸습니다. 오늘날로 하면 우리가 아침에 일용할 양식과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무리 할 때는 하나님께 감사와 회개를 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초하루와 초막절과 같은 절기에 번제를 드렸습니다. 특별한 리듬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오늘날에는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등이 해당됩니다. 절기 예배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반복하여 기억하는 것에 있습니다. 유월절은 출애굽 사건을, 초막절은 광야 사건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반복 교육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은혜는 쉽게 까 먹습니다. 대신에 원망과 불평거리는 잘 안 까먹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이 누구신가 또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반복하여 기억하고 새기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우리 UBF에서 이 일을 하도록 돕는 것이 바로 소감 쓰기입니다. 소감 쓰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혜를 반복하여 기억하고, 회개하고 감사하고 결단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저는 소감쓰기는 특별 예배다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넷째,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야 합니다. 이들은 비록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가 아직 놓여지지 않았지만 먼저 제단을 만들고 희생 제사를 시작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게 했던 우상숭배의 죄에서 떠나겠다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만 섬기고 여호와의 임재안에 거하겠다는 각오입니다. 주님의 집을 재건하고자 그들이 돌아와 예루살렘에 모인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그들과 함께 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배가운데 주님의 영광과 임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2. 성전 재건 사역(7-13)

 

7절은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입니다. 먼저 성전에서 일한 일군들을 고용하고 필요한 재료들을 준비하였습니다.

 

성전에 이른지 이년 둘째 달에 드디어 성전 공사가 시작됩니다. 8,9절은 성전 건축의 감독자로 세운 사람들이 누구인지 나옵니다. 대표적인 두 인물은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입니다. 총독 스룹바벨은 다윗 가문의 대표로, 대제사장 예수아는 제사장의 대표로 성전 건축을 주도합니다. 이는 성전되신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전 일꾼들을 감독하는 일에 레위사람들을 세웁니다. 그들이 성전에서 실제적인 일들을 섬기기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뭘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특이한 점은 20세 이상의 레위인들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보통 25-30세까지는 견습생으로 일하다 30세부터 성전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레위인의 숫자가 워낙 적다보니 세운 것 같습니다. 우리 UBF도 초창기에는 대학생들이 요회목자도 하고 메시지도 전했죠. 요즈음 종로2부에서 젊은 목자님들이 많이 세워져 교회 일을 섬기게 됨을 인해 감사합니다.

 

건축자가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불고 레위인들은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찬송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의 징계로 바벨론 포로로 끌려 갔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사 그들을 용서하시고 고국으로 돌아와 성전 건축을 하게 하시니 너무나 감사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성전 건축 예배를 드릴 때 나이 많은 사람들이 통곡하였습니다. 왜 일까요? 과거 솔로몬 성전을 봤기 때문에 그 영광에 비교하여 너무나 초라하여 슬퍼서 울었습니다. 이렇게 된데에는 자신들의 죄가 크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가 합쳐져서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고 멀리까지 울려 퍼졌습니다.

 

성전공사가 이렇게만 잘 진행된다면 머지않아 완공이 될 것입니다. 기대가 됩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성전 공사가 중단됩니다. 그것도 15년간 중단이 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3. 방해세력 (4)

 

41,2절을 봅시다.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나옵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 땅에 사는 이웃,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합니다. “우리도 여러분들과 함께 성전 건축역사에 동참하도록 해 주십시오. 우리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이 제안에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어떻게 대답합니까? 3절을 읽습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단호하게 거절합니다. ‘홀로 건축하리라합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먼저 그 배경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B.C.722년에 멸망했습니다.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앗수르로 포로로 끌려갔고 엣살하돈이 앗수르에 있던 이방민족을 북이스라엘로 옮겨 놓았습니다. 북이스라엘이 혼혈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오면 몸만 오나요? 오면서 문화도 가져오고, 종교도 가져옵니다. 우리가 한국에 무슬림이 들어오는 것을 걱정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문화, 종교를 가지고 오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대학에 들어와서 이슬람 기도처를 마련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현재 무슬림 학생들을 위한 전용 기도실을 운영하고 있는 대학은 서울대, 경희대, 성균관대등 다수의 대학이 있습니다. 기독대학인 이화여대, 세종대에도 생겼습니다. 국민대도 무슬림 유학생들을 위한 기도실인 '사우디클럽'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습니다. 기독신학대학인 성공회대에서는 무슬림 학생 한명을 위해 무슬림 기도처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유럽처럼 지금 한국에서도 이슬람교가 조용히 그 세력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대학마다 이슬람교 동아리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할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북이스라엘도 이렇게 하여 이방 문화와 이방 종교가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섬기면서 우상도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단지 여러 신중의 하나로 보았습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된다면 어떤 신이든 상관없이 섬겼습니다. 남유다가 멸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북이스라엘을 따라 우상을 숭배하다가 멸망한 것이 아닙니까?

 

귀환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경각심이 들었을 것입니다. 사마리안인들의 제안은 옛날로 돌아가자’, ‘옛 생활로 돌아가자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멸망의 길로 직행하는 길인 것을 알기에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로 인해 귀환한 이스라엘은 혹독한 댓가를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이로부터 대적들이 성전 건축을 방해합니다. 조롱과 협박을 하여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합니다.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태클을 걸고 막습니다.

 

6절부터 23절까지는 삽입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5절 말씀에서 24절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대적들이 성전 건축을 방해함으로 어떤 결과가 발생하나요? 24절을 읽습니다.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성전 공사가 바사왕 다리오 제이년까지 중단되니라성전 공사가 중단되었습니다. 다리오 제 이년(B.C.520)까지, 15년간 중단이 되었습니다.

 

6절부터 23절까지를 삽입하여 넣은 이유는 대적들이 성전 건축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벽 건축도 방해하였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기간이 100년이나 됩니다. 특히 대적들은 세상 권력자들을 동원하여 왕에게 거짓으로 고소를 하여 방해를 하였습니다. ‘고소의 달인이 누구입니까? 사단마귀입니다. 대적의 배후에는 사단마귀가 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역사를 대적하며 방해합니다. 마귀가 어떻게 역사하는가? 우리는 분별력을 갖기 위해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앞서 하나님의 역사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연합과 거룩을 요구하십니다. 시편133편에서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했습니다. 믿는 자끼리는 동역하고 연합하라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역사 방법은 구별입니다. 그것을 거룩이라고 합니다. 빛과 어두움, 육지와 바다, 낮과 밤, 천국과 지옥은 분리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믿는자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과 구별되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마귀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방식을 사용하되 반대로 합니다. 연합하여 있는 성도들을 나뉘게 합니다. 구별되어야 할 것을 섞어 버립니다. 빛과 어두움을 섞습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을 섞어버립니다. 연합을 가장한 혼합입니다. 마태복음 13장 천국비유에서 하나님께서 밭에 좋은 씨앗을 뿌렸는데 마귀가 밤에 몰래 와서 밭에 가라지를 뿌리고 가는 것을 봅니다. 이처럼 마귀는 혼합을 시켜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어려움이 찾아왔습니다. 100년동안 대적의 방해를 받고 힘든 시기를 지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70년 포로 생활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와 성전 공사를 시작할때만 해도 하나님은 참으로 선하시고 인자하시다고 찬양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위해 살아볼려고 애쓰는데~ 성전 건축이 중단되고 대적들로부터 100년동안 방해를 받게 하시는 이 하나님은 과연 이때도 선하신가? 인자하신가? 의문이 듭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은 보통 선하다란 말을 내 요구를 잘 들어준다란 의미로 많이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선하시다이 말은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신다.’ ‘그의 뜻을 이룬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이런 의미가 더 강합니다. 하나님은 고레스 왕을 감동시켜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풀려나게 하시고 순적하게 일이 진행되도록 도와주기도 하지만, 방해받도록, 중단되도록 허용하기도 하십니다. 성전건축은 대적의 방해로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나 뒤에 나오는 에스라 5,6장을 보면,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중단된 성전 건축역사가 다시 시작됩니다. 마침내 B.C.516년에 성전이 완공됩니다. 예루살렘 멸망과 성전 파괴가 언제 일어났습니까? B.C.586입니다. 정확히 70년만에 성전 복구가 이루어졌습니다. 70년만에 돌아오리라는 그 약속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자들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십니다.(8:28) 그러므로 하나님은 항상 선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런 시련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첫째, 옥석을 가리십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분리시킵니다. 고후13:5은 말합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시련을 통해 내 안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는가를 알게 해 줍니다. 믿음이 없는 자들은 시련이 오면 그리스도를 떠나 세상으로 갈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있는 줄 알았는데 시련을 겪으면서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그런 은혜의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남는 자로 증명이 될 것입니다.

 

둘째, 믿음이 있는 자를 순전함에 이르도록 합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합니다. 욥도 시련속에서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리라고 고백했습니다.

 

셋째, 최종목적은 성전되신 예수님을 닮도록 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성전은 그의 육체를 가르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성전이 되기 위해 자기를 죽음에 내어 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예수님의 형상을 우리 몸에 새기길 원하십니다. 거듭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순간입니다. 그런데 성화의 기간은 하나님 나라 가기까지 계속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 있습니다. 져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또 다른 측면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전이 중단되게 된 결정적 요인이 무엇입니까? 귀환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홀로 건축하리라이 말이 단초가 되었습니다. 순수 신앙을 지키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일제 강점기때 일부 목사님과 성도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했습니다. 이 일로 교회가 폐쇠되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목사나 성도들은 감옥에 갇히고 고문당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반면 신사참배에 동조한 목사나 성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신사참배를 하면 교회에서 예배보고 신앙생활하는데 전혀 방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과연 어느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일까요? 한경직목사님이 1992년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우는 템플턴 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시상소감에서 이런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입니다. 일제 강점기때 신사참배에 동조한 죄인입니다. 감히 이런 상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저의 죄를 회개합니다거기에 참여하여 듣는 모든 사람이 숙연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스라엘처럼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며,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우상에게도 절하였던 조상들의 망령된 행실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를 애통히 여기며 경계하며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백성으로 살고자 해야겠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하고 손해를 보는 것을 안타까워하기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까 두려워하는 우리가 되길 기도합니다.

 

이 시대는 포스트 모던 시대입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종교 다원주의, ‘돈이 최고야하는 물질주의, ‘차별금지라는 아름다운 말로 포장하여 동성애를 옹호하고 부추키는 그러한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동성애를 미화하는 언론매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에서 자기 성 결정권이라는 미명하에 남자가 남자와 부끄러운 일을 행하고, 여자가 여자와 부끄러운 일을 행하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종로7부가 섬기는 외대 캠퍼스에서는 이미 동성애 동아리가 만들어져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어떤 교단에서는 동성애 목사를 안수하여 목사로 임명되고, 우리나라 어떤 신학생들은 동성애 퀴어축제를 지지하며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 취향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동성애자들을 사랑합니다. 그들도 구원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동성애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는 죄인 것은 분명합니다. 머지않아 동성애가 죄다이렇게 가르쳤다고 감옥에 갈지도 모릅니다.

 

거센 도전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홀로 건축하리라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고자 각오해야 합니다. 혼합주의 시대에서 우리의 순수 복음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거짓교사들로부터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합니다. 복음에는 타협이 없습니다. 변형도 안되고 첨가도 안됩니다. 마틴 루터는 세가지 슬로건을 주창하며 종교개혁을 이끌었습니다. 첫째는 솔라 그라티아(오직 은혜)입니다. 인간의 구원은 우리의 업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둘째는 솔라 피데(오직 믿음)입니다. 인간이 의롭다고 인정받는 길은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뿐입니다. 세 번째는 솔라 스크립투라(오직 성경)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분명한 답이 성경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길을 가는 우리에게 최후 승리를 주실 것을 믿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시련이 와도 능히 감당할 힘을 주십니다. 우리가 위축되지 않고 마귀를 대적하여 싸우는 복음의 용사로 살아가길 기도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8)

 

결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고,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는 삶을 살아가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