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메세지

제목2023년 부활절 말씀 제1강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고린도전서 15:1-34)2023-04-10 02:44
작성자

2023년 부활절 말씀 제 1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말씀 / 고린도전서 15:1-34

요절 / 고린도전서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Happy Easter! 우리 주 예수님의 부활을 감사 찬양드립니다! 전 세계 기독교인들은 매년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합니다. 비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까마득한 옛날에 있었던 전설처럼 받아들입니다. 부활절을 단지 종교적인 행사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전설이 아닙니다.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모든 일 중에 가장 위대하고 가장 기쁜 사건입니다. 이 예수님의 부활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각자와 상관이 없는 사건이 아닙니다. 나의 운명, 모든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는 결국 나의 부활이야기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부활장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부활과 그 의미에 대한 최초의 증언이 담겨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에 의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믿지만 자기들의 부활은 믿지 못하는 자들도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그들에게 전해 준 복음 진리를 상기시키고, 다시 한 번 부활의 복음을 영접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을 다시 한 번 확신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 복음이란

1,2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우리가 보통 복음을 전한다고 할 때에는 비신자들에게 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비신자들에게가 아니라 이미 복음을 받고 그 가운데 선 고린도교회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이는 그들이 들었던 복음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로부터 이미 들었던 그 복음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사람의 구원, 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길은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면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바울은 3,4절에서 복음이 무엇인가를 말합니다. 이는 성경 전체에서 복음에 대해 가장 간결하고 명확한 서술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이란 헬라어로 '유앙겔리온'입니다. 당시 유앙겔리온은 승전을 알리는 사람에게 주어진 상이나 그 소식 자체를 의미했습니다. 또한 로마 시대에는 황제의 즉위나 생일을 유앙겔리온이라 하여 전령관이 각 마을을 다니며 큰 소리로 그 소식을 외쳤습니다. 유앙겔리온은 영어로 Good news 또는 Gospel , 한글로는 복음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 단어를 신약성경에서 차용하여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복음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복음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론이나 선을 쌓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이론이나 사상이 아닙니다. 복음은 역사상 실존한 예수라는 분에게 일어난 한 사건을 의미합니다. 그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역사적 사건을 말합니다. 그러면 왜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까?

 

첫째, 예수님의 죽으심

예수님의 죽으심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정치적인 혁명을 일으키려다가 실패하여 십자가에 달려 처형된 그런 사고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원하지 않았지만 힘이 없어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 어떤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는데 초청 글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억울하게 죽으신 우리 예수님을 생각할 때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 뜻은 아니겠지만 마치 예수님이 의도하지 않게 잡히셔서 죽임을 당하신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억지로  또는 우연히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요, 예수님은 바로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3절은 그의 죽으심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죽으셨다고 합니까? 우리 죄, 우리 인류의 죄, 여러분과 저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셔야 되었나요? 이는 우리가 죄 때문에 죽어야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 아닙니다. 성경은 죽음이 형벌이라고 말합니다. 형벌이기 때문에 죽음은 그 누구에게도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절대로 유쾌하지 않은 일입니다. 누구나 죽음을 피하고자 하고 저항합니다.

 

또한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의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우리는 죽음이란 사람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 소멸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죽음이란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이라 합니다. 사람은 죄, 곧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으로 인해 죽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로 인해 하나님과 분리되었습니다. 분리된 상태로 세상을 살아가다가, 이 세상을 떠나면 모든 복락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운명인 것입니다. 이 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은 구주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죄는 죽음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우리 모든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대속의 죽음이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예수님에게는 잠시의 수난이었지만 결국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부활하심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의 빗장을 열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이는 인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가끔 입관예배를 섬깁니다. 입관을 하고 관 뚜껑에 못을 박을 때는 그 관 뚜껑이 사망의 빗장 같이 여겨집니다. 도저히 다시 풀 수 없는 권세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만일 죽은 자가 관 뚜껑을 부수고 일어난다면 그는 죽음을 이긴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이 무덤에서 일어나셨습니다. 무덤을 막은 무거운 돌을 밀치시고 나오셨습니다. 죽음을 깨뜨리신 것입니다. 이로써 그의 속죄 사역이 완벽히 이루어졌음을 증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인해 이제 그를 믿는 모든 자는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4:25절을 보면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합니다.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치르셨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의를 주신 것입니다. 또한 로마서 1:16절은 말합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모든 믿는 자에게"라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은 복음을 믿는 모든 자에게 예수님이 이루신 의를 전가시켜주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세상은 사는 동안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않으나 우리를 의롭다고 쳐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법적인 용어인 칭의(Justification)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주시는 의를 덧입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믿는 방법 외에 사람에게 주신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힘주어 말했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는 이 복음의 유일성을 힘주어 반복합니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1:7-9) 바울이 그들에게 전했었는데 바울이 다시 전하더라도 만일 다른 복음을 전하면 그 자신도 저주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시대가 가고 세상이 변해도 복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죄에서 구원할 수 있는 복음은 유일무이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 바울이 전해 준 복음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확신하고 복음에 깊이 뿌리 내리길 기도합니다. 복음은 기독교 신앙의 초보가 아닙니다. 복음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는 무궁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복음을 더 깨달으며 더욱 깊이 뿌리 내리길 기도합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의 확실성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기본적으로 헬라 철학의 영향권 아래 있었습니다. 헬라 철학 시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후부터 (BC 320) 신플라톤주의의 발생 (AD 200) 이전까지의 약 520년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종교의 도움을 받지 않고 세상을 이해하려고 했던 무신론적인 사조입니다. 영혼은 선하고 몸은 악한 것으로 보는 이원론적인 사조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그 감옥인 육신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죽은 자는 부활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몸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는 사실 지금도 대부분의 비신자들이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5절부터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우리는 본문을 볼 때 예수님의 부활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로 믿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을 눈으로 본 증인들이 많습니다. 5절부터 보면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신 후에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 보이셨습니다.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고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 보이셨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자기에게도 보이셨다고 증언합니다. 이 말씀에서 증인들의 몇 가지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증인들이 다양합니다. 예수님의 동생, 어부, 지식이 많은 사람, 그리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또한 증인들의 인격이 신뢰할만합니다. 사람들은 신뢰가 안가는 사람과 교제하기를 꺼려합니다. 본문에 기록된 이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변화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겸손하면서 진실된 초대교회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어디 가서 무슨 말을 해도 신뢰할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증인들을 동원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오백여 형제가 일시에 주님의 부활을 보았는데 그 중에 일부는 죽었지만 태반이 살아있으므로 내 말을 못 믿겠으면 내가 증인을 무더기로 데려오겠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부활의 증인들은 다양하고, 신뢰할 만하며, 언제라도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전해주고 기록한 역사적 사실인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안 믿는 것이 비합리적입니다.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을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4:25) 주님은 증인들의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책망하십니다.

 

둘째, 본 기록이 신약성경이기도 하지만 이는 무엇보다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의 증언입니다. 바울이라는 사람은 믿을만합니다. 왜냐하면 우선 바울은 당대 최고의 학문과 지성 그리고 논리력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울은 원래 복음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을 핍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같은 편이 얘기하면 서로 짜고 말한다며 믿지 않을 수 있지만 반대편이었던 바울이 믿고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변화되어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는 핍박자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요, 수많은 교회를 개척한 사람이요, 신약 성경 27권중 13권을 기록한 신령한 영감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같은 사람의 말을 믿지 못한다면 누구의 말을 믿겠습니까? 세상에 믿을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셋째,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2,000년 전에 누가 무슨 증언을 했을지라도 우리가 부활이 정말로 믿어지는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셔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약속하신대로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이 확실한 것으로 믿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부활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분들은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성령 하나님께서 저의 불신앙을 책망하시고 제게 생생한 부활의 믿음을 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예수님의 부활을 믿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3. 나의 부활의 확실성

이상의 바울의 증언을 통하여 고린도 성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분명한 증인들이 있었고 바울의 증언이 논리적이니 믿을 수밖에 없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거기까지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지만, "'그래서 그것이 나와 정말 무슨 상관이 있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이 문제를 다룹니다. 20,21절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잠자는 자들'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을 의미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하신 첫 열매이십니다. 구약에 보면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명령이 여러 군데 나옵니다. 하나님이 첫 열매를 귀히 여기시는 것은 첫 열매가 대표성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첫 열매는 그 이후부터 맺히는 모든 열매를 대표합니다. 나무가 사과나무인지, 배나무인지, 첫 열매를 보면 아는 것입니다. 첫 열매가 사과가 나면 그 다음부터는 사과가 맺히는 것입니다. 

 

1620 920일 영국 남부의 플리머스 항구를 출발한 배가 있었습니다. 102명의 승객과 25명의 선원 총 127 명을 태운 이 배는 11 16일 신대륙 매사추세츠 주의 케이프카드 해안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온 청교도들이었습니다. 신대륙 정착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강풍과 눈보라와 굶주림 때문에 몇 달이 못 되어 그들 중 반 이상이 죽었습니다. 그 다음해 봄에 인디언들에게 전수받은 방법으로 옥수수를 심었습니다. 가을이 되어 옥수수가 나야 되었습니다. 곡식이 나지 않으면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굶주려 죽을 상황이었습니다. 씨가 제대로 된 것인지? 심은 방법과 기른 방법이 제대로 된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곡식 열매가 나느냐 나지 않느냐는 그들에게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초조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첫 열매가 맺었습니다! 옥수수가 열렸습니다. 첫 열매를 받아본 그들은 크게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 첫 열매다!" 같은 씨를 같은 방법으로 심은 다른 열매들이 곧 나올 것을 확신했습니다. 실제로 많은 곡식이 나왔습니다. 그와 같이 첫 열매는 그 뒤에 나오는 열매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신 첫 열매입니다. 사람에게 사망이 임했던 것은 한 사람 아담의 범죄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한 사람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22절은 위대한 크리스천의 자유헌장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확실합니까? 그와 같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의 부활은 확실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부활과 영생을 얻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는 얼마나 엄청나고 흥분된 사실입니까! 사형수가 어느 날 갑자기 사면을 받은 것보다 더한 것입니다. 내가 다시는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이 믿음은 막연한 장래에 일어날 일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사는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줍니다. 나의 현재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을 정말 믿습니까? 내가 부활할 것을 분명하게 믿습니까? 나의 영원한 생명의 문제는 모든 것에 우선합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이 생명의 문제로부터 나의 모든 삶의 의미와 방향, 나의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깊이 생각해보면 이 땅에서 잘사느냐, 못사느냐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자로 사느냐, 가난하게 사느냐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공평한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늙는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늙지 않고 가난한 사람만 늙는다고 해보십시다. 억울해서 못삽니다. 제 아무리 좋다는 약을 먹고 마사지를 받아도 늙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또 한 가지는 죽음에 대한 공평성입니다. 학식이 높은 사람은 죽지 않고 배우지 못한 사람만 죽는다고 하면 너무 억울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죽습니다. 생명문제 앞에서 사람은 공평합니다. 특별한 사람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생명문제를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명문제를 크게,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다른 문제를 작게 여깁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조금 잘 살면 어떻고 못 살면 어떻습니까? 잘 입으면 어떻고 못 입으면 어떻습니까? 명예를 가지면 어떻고 못 가지면 어떻습니까? 실상 사람의 모든 수고는 그 입을 위하여 있지만 그 식욕은 차지도 않습니다. (6:7)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않습니다. (1:8)

 

저의 인생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한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2:23입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길지 않은 인생입니다. 내가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는 것,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명품을 걸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나의 목숨, 이것을 가장 중요한 것을 위해 사용하는 그것이 중요합니다. 무엇이 정말 중요합니까?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영원히 남는 가치 있는 일에 나의 고귀한 목숨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할 수 만 있으면 일분일초를 낭비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최선의 삶을 살고자 하는 강렬한 소원이 있습니다. 나의 육신의 목숨을 바쳐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그것이야 말로 지혜가 아닙니까? 가장 귀한 일에 나의 목숨을 드리는 것, 그것이 가장 귀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 가장 중요한 생명의 문제는 등한히 하고 오히려 별로 중요치 않은 시시한 문제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건강을 잃으면서까지 돈을 벌려고 합니다. 죽음을 재촉하면서까지 세상 재물과 명예를 얻겠다고 애를 씁니다.

 

제가 예전에 말기 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 어떤 선교사님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그토록 수고하여 일군 사업을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그는 말했습니다. "내가 죽게 되었는데 그것이 내게 뭐가 중요하오?" 그는 죽음이라는 문제 앞에 직면하여 정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의 문제, 그 한 가지만을 집중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일에 그다지 매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의 문제는 현실적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종말론적인 것이면서도 가장 현재적인 사건입니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만 관계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는 날마다 죽음 앞에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통스럽다느니, 평안하다느니, 행복하다느니, 불행하다느니, 명예롭다느니, 수치스럽다느니 결국에 가서 보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의 지금의 목숨으로 영원한 생명, 영원한 가치를 얻느냐 못 얻느냐의 문제입니다.

 

로마사람들이나 헬라사람 가운데 지혜로운 사람은 만나면 서로 이렇게 인사를 했습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메멘토' '리멤버(remember)'라는 말이요 '모리' '죽음(to die)'이라는 말입니다. 직역하면 '리멤버 투 다이(remember to die)'라는 말이 됩니다. '메멘토 모리'-이것이 인사였습니다. 아침인사요 저녁인사였습니다. 우리는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도 당신도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삽시다. 시편90:12은 말합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부활절에 왜 이렇게 죽음을 많이 얘기 하냐고요? 죽음을 알아야 부활을 알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모르고 갖는 부활 믿음은 이론적입니다.

 

우리의 부활신앙은 단지 부활에 대한 열망이 아닙니다. 부활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막연하게 부활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죽은 내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내가 매일을 살아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31)." 헬라어로 '카트 헤메란 아포트네스코'인데 이를 의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매일 죽으면서 삽니다." 그는 매일 죽음에 노출되어 살았습니다. 고난 많은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이 그러했습니다. 언제 죽을는지 모르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돌에 맞아 초죽음이 되었지만 옷에 먼지를 털고 일어나 다시 그 성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 고난 가운데서도 그는 전혀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감사가 넘쳤습니다. 자기를 불쌍히 여기는 자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아그립바 왕 앞에서 그는 죄수로서 쇠사슬에 묶여 있었지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26:29)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죽음이 그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담대하게 매일 죽음을 무릅쓰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인생을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도 사실 날마다 죽고 있습니다. 매일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닙니까? 언제 세상을 떠날지 한 치 앞도 모르는 우리 아닙니까? 감사한 것은 믿는 우리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상에서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죽음이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는 주님과 복음을 위해 날마다 죽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날마다 죽는 삶, 이를 마틴 루터는 '데일리 뱁티즘(daily baptism)'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데일리 다이(daily die)'라고 한 반면에 루터는 데일리 뱁티즘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이 땅에서도 날마다 죽는 비범한 삶을 살게 하는 능력입니다.

 

33,34절에서 바울은속지 말라라고 합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 부활이 없다하는 세상의 거짓말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을 때 우리는 주님 앞에 서서 결산할 때를 생각합니다. 함부로 살지 않습니다. 불꽃같은 주님의 눈을 의식하며 진실함으로 살아갑니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습니다. 우리에게 부활의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땅에서의 목숨, 이를 가장 귀한 일에 사용하는 지혜로운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