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신년 말씀 1강 산 소망이 있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라
말씀/ 베드로전서 1:1-25 요절/ 베드로전서 1:3,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오늘 말씀은 올 한해 전 세계 UBF의 방향이 되는 말씀입니다. 세계 대표이신 란워드목자님께서 지난 한해 전 세계 각 지부를 방문하시면서 UBF 선교사님들과 동역자들이 베드로 시대의 흩어진 나그네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어려움 가운데서 물질 자립과 선교사명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어떻게 격려할 수 있을까? 힘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하며 기도하던 중 본문을 올해 방향이 되는 말씀으로 잡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고난 가운데 있는 우리 성도들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주님이 주신 ‘산 소망’이 우리를 어떠한 삶으로 이끄는가? 배우길 기도합니다.
제 1장. 우리의 정체성
우리는 누구입니까?(1:1-2; 2:9,11) 베드로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밝혔습니다. 그가 성도들에게 전한 메시지는 자신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라고 합니다(1). 그들은 단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박해를 받아, 직장과 집과 나라를 두고 떠나야 했습니다. 낯선 이방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1:17; 2:11).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힘겹게 살았을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가족들과 헤어져, 생존을 위해 하찮고 궂은 일을 해야 했습니다. 언어와 문화적 장벽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불경건한 사람들로부터 차별과 끊임없는 위협을 받았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들의 상황을 잘 이해했지만, 그들을 동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가 누군가에 의해 택함을 받는다면, 매우 특별함을 느낄 것입니다.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다면 이 얼마나 특별하겠습니까? 그 택하심은 잠시 잠깐이 아니라, 영원을 위한 택하심입니다. 우연한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의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공로가 전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우리를 택하셨습니다(요15:16).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성령에 의해 실행됩니다. 성령은 부패한 세상에서 우리를 구별시키고, 하나님과의 관계속으로 이끄시며,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을 섬길 수 있도록 구비시키십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맺게된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순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뿌려진 피는 우리를 죄에서 깨끗이 씻어 예수님과 새로운 언약 관계를 맺게 하였습니다. 옛 언약에서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할 힘이 없어서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성령은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힘을 줍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함께 일하십니다. 그만큼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귀한가? 얼마나 확실한가? 얼마나 견고한 기초 위에 세워졌는가?를 말해준다 하겠습니다.
자, 우리는 하나님께 택함 받은 자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대합니까? 존귀하게 대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그네요 이상한 사람으로 대우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고, 세상의 불신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회개하는 대신 우리를 비방하고 경멸합니다. 이런 일을 당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들이 말한대로 이상하고 어리석은 사람인가? 쓸모없는 사람인가?” 소외감, 슬픔, 혼란스러움을 느낍니다.
우리 가운데 한 목자님은 대학 시절 예수님을 열심히 배우고 따랐습니다. 졸업후에는 풀타임으로 역사를 섬기다가 군대에 갔습니다. 전역한 후 취업을 하고자 많은 회사에 이력서를 냈습니다. 하지만 모두 퇴짜를 받았습니다. 경력이라곤 국민대 UBF 동아리 회장, 운전면허증, 선교사님들을 인천공항에 픽업해준 것 밖에 내세울 것이 없었습니다. 참 이럴 때 ‘내가 그동안 뭐했나? 난 누구?’하며 서글퍼지고 위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새롭게 하고 믿음으로 도전할 때 운전 경력과 캠퍼스를 열심히 돌아다니며 섬겼던 체력이 유수한 기업에 합격케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책임져주심을 체험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로마서에서 배웠듯이 이 세상은 불경건합니다. 그러한 세상의 압력으로 인해 우리의 목소리를 내기가 힘듭니다. 특히 날이 갈수록 대학생들의 복음 수용성이 낮아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그래도 ‘예수 믿는다’고 하면 ‘착하게 사는 사람이구나’하는 인정을 받았지만, 지금은 이상한 사람, 고지식한 사람으로 취급받습니다. 이러한 여러 어려움과 도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코 주님을 떠나거나 우리의 선교 현장을 떠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이 경건한 사람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매우 귀하고 소중하게 보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2장 9절에서 말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긍휼로 하나님께 택함을 받아 그의 자녀로 입양된 자들입니다. 이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자녀는 부모 덕분에 많은 특권을 누립니다. 하물며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이것은 참으로 크고 놀라운 특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십니다. 가장 좋은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무엇보다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왕같은 제사장의 위대한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 나라 건설의 소망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이 세상의 소망이 누구입니까? 여러분들 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이는 베드로가 먼저 경험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처음 만나셨을 때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셨고,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귀하게 보셨고 그를 택하셨고 부르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소망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요, 세상에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대사입니다. 이 확신을 갖기를 기도합니다.
제 2장. 우리의 산 소망인 영원한 기업(1:3-5).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베드로는 처음에 고난받는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이 글을 썼는데, 자기를 포함하여 성도들을 소망가운데 택하시고 부르셔서 특별하고 귀한 존재가 되게 하신 삼위 하나님께 초첨을 맞출 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찬송이 터져 나왔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베드로는 이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산 소망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소망은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나치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몸이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삶의 희망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소망이 있을 때 절망을 이기고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과거 인간에게 누구나 공평하게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계급 없는 공정하고 행복한 사회 건설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희망이 얼마나 기만적이며 공허하며 거짓된 것인가가 역사 속에서 다 드러났습니다. 세상의 희망은 마치 신기루와 같습니다. 멀리서 보면 무엇인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가까이 가 보면 그 희망은 저 멀리 사라져 버립니다.
저희 치과 환자 중에 집 없이 20년동안 이곳, 저곳 떠돌이 생활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몇 달전 치과에 방문하셔서 대화하던 중에 그동안 떠돌이 생활을 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원래 강남 반포에 집이 있었는데, 재건축 때문에 나와서 그동안 여기저기 떠돌이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입주했는데 너무 기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도 잠시일 뿐입니다. 일 년은 기쁠지 모르지만 이것도 영원하지 못합니다. 이런 종류의 희망은 결국 소멸하고 부패하고 퇴색합니다. 불멸의 영혼을 가진 우리에게는 영원한 희망이 필요합니다. 그런 희망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그런 희망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 산 소망은 하나님의 ‘크신 긍휼’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영죽을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하나뿐인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우리에게 주신 이 선물은 결코 값싼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세상에서 가치 있다고 여기는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도 아닙니다.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이룬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새로운 탄생이 산 소망을 줍니다. 왜 ‘산’ 소망이라고 부를까요? 산소망은 살아 계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벧전 1:21). 그리스도의 부활이 확실하며 그가 항상 살아 계시듯, 우리의 소망도 확실하며 죽지 않고 항상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네~’ 이런 뜻입니다. 이 살아 있는 산 소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항상 우리에게 복된 확신을 줍니다. 우리를 위한 이 유업이 하늘에 확실하게 간직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유업은 항상 늘어나지만 결코 줄어들지 않는 하나님 나라 은행계좌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영혼은 이 유업을 기다리는 동안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기 때문에 안전합니다(5).
이 산 소망은 우리 영혼의 닻과 같습니다(히 6:19). 닻은 배를 땅에 고정시켜 표류하지 않도록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길을 잃기 쉽습니다. 죄의 유혹, 장래 염려, 물질 문제, 건강 문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같은 갑작스러운 풍랑이 불어옵니다. 그러면 절망하게 됩니다. 존번역이 쓴 천로역정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주인공인 순례자 크리스찬이 소망과 함께 ‘절망의 거인 감옥’에서 포로가 됩니다. 그곳에는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갇혀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순례자는 자살을 생각하기까지 하지만 두루마리를 생각하여 펼치는데, 그곳을 탈출할 수 있는 열쇠가 나옵니다. 이 열쇠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소망과 함께 탈출하여 소망이 그의 친구가 되어 동행함으로 마침내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산 소망을 친구 삼을 때 풍랑으로 잠시 흔들릴 수 있지만 파선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연약해지는 대신, 더 강해집니다. 우리의 산 소망이 더욱 커지고 풍성해 집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4:16)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산 소망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4절을 읽겠습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유대인들에게 유업이란 대대로 계속해서 전해지는 가족 재산을 말합니다. 이 유업은 그들에게 소속감, 안정감, 평화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흩어졌을 때, 그들은 이 유업을 잃었습니다. 이방 땅에서 살면서 그들은 난민이 된 것 같았습니다. 가난하다는 생각이 그들을 위축시켰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들의 아버지, 부유하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큰 유산, 위대한 유업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안정감과 존엄성을 갖게 하였을 것입니다. 딤후2:11,12은 말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아까 제가 20년만에 강남 반포아파트에 입주한 환자분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원하지 않는 이 땅의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이처럼 참고 기다리면서 떠돌이 생활을 하는데~ 장차 나를 위하여 하늘에 영구한 아름다운 처소가 예비되어 있고, 주와 함께 왕노릇하게 될터인데~ 내 남은 생애 20년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영원한 것, 즉 주님을 위하여, 그리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드리며 고난을 감당하며 참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그동안 고난을 회피하고자 했던 마음, 안일한 삶, 편한 삶을 추구했던 것을 회개하고 산 소망을 굳게 붙들기를 기도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를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제 3장 우리의 삶의 자세
지금까지 베드로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하늘의 관점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천국에 있지 않습니다. 현재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서신의 나머지 부분에서 산 소망을 가진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실제적 권면을 들려줍니다. 몇가지 핵심적인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고난을 기뻐하라(1:6-9). 사람들은 고난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고난은 해로운 것이며, 불행의 원인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피합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속에 산 소망이 있을 때, 우리에게 고난이 필요하며, 고난이 유익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의 거짓된 소망이 제하여집니다. 우리의 마음이 순결해집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진실되고 순전하여지며 강하여집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는 인내를 배우며 연단이 되며 소망 안에서 성장합니다(로마서 5:3-4).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광이 우리 안에 나타납니다(4:13).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고난을 어떻게 사용하시는지 우리의 실제 삶속에서 체험되어질 때,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기쁨으로 힘을 얻어, 우리는 고난을 한결 더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둘째, 거룩하라(1:15-16). 15,16절 입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거룩하라’ 이 말을 들을 때, 비현실적이고 부담스러운 요구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바라는 것입니다. ‘거룩’이란 단어는 ‘구별됨’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 때, 우리는 타락한 세상의 흐름을 따르기보다 하나님의 성품 안에서 성장합니다. 거룩한 삶이야 말로 가장 행복한 삶입니다.
셋째,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1:22). 이는 거룩함 안에서 성장하는 사람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사랑과 존중과 신뢰가운데 아름다운 공동체, 영적인 가족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세상의 삶의 방식은 무엇입니까? ‘적자생존’입니다. 질투, 증오, 중상모략으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정치가 그 대표적인 예이죠. 사람들은 이 차가운 현실을 인식하고서 머리 아파하며 더 나은 무언가를 찾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진정한 사랑이 있는 기독교 공동체를 발견할 때 기꺼이 그 공동체에 합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진심으로 깊이 사랑합시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우리의 증거가 강력하고 가장 효과가 있습니다.
넷째,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1:23-2:3). 거룩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롬 12:9). 그러하기에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까?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 2:2-3).
갓난아기는 생사를 걸고 젖을 갈망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간절한 스피릿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갈망함으로 영적으로 성장합시다.
다섯째, 선을 행하고 우리의 소망에 관한 이유를 나누라(2:11-17; 3:15-17). 선을 행하는 것은 베드로전서의 주요 주제 중 하나입니다. 2:12절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또 2:15절은 말씀합니다.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베드로가 왜 선을 행하는 것을 강조할까요? 선을 행함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 아니지만, 구원받은 자의 믿음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딛 2:14). 그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방법입니다. 선을 행하는 동기는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선을 행할 때, 우리는 그 이유를 말해야 합니다. 3:15절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산소망이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울 때, 그것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기쁨과 의미를 부여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볼 때, 관심을 갖고, 우리의 비결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에게 묻는 사람들에게 항상 그리스도를 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여섯째, 하나님의 양 무리를 위한 목자가 되라(5:1-4). 사도 베드로는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양 떼를 위한 목자가 되십시오,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양무리의 본이 되십시오”라고 권고합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시대의 요청’, 이 시대가 정말 필요로 하는 지도자는 선한 목자입니다.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지위나, 인종이나, 국적이나 이 모든 것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선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양 무리를 위한 좋은 목자가 됩시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우리의 목자장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결코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자, 메시지를 마무리합니다. 베드로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위대한 비전을 가지고서 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들은 비록 사회의 낮은 곳에서 멸시와 핍박을 받으며 살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택함 받은 백성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서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산 소망으로 말미암아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겨냈습니다. 그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역사는 그들을 통해 로마 제국이 변화되었음을 증거합니다. 그들은 참으로 세상을 변화시킨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전 세계에 흩어져 성서한국과 세계선교의 비전가운데 복음 전파와 제자양성에 힘쓰고 있는 우리 UBF 공동체와 각 사람은 주님이 보시기에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택한 자들입니다. 구주 예수님의 피값으로 사신 여러분, 여러분이 소중한 존재이며 이 시대의 소망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산 소망, 영원한 유업을 주셨습니다. 올한 해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는 산 소망으로 기뻐하며, 기도하며, 기대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한 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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