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신년 말씀 2강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즐거움
말씀/ 베드로전서 4:1-19 요절/ 베드로전서 4: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라고 부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신앙생활을 기쁨의 상징인 혼인잔치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 기쁨과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배고픈 5000명의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고 남도록 배부름의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나병환자는 병에서 깨끗이 낫는 즐거움을 목마른 여인은 영생수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통해 어떤 즐거움을 누리고 계시나요?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사도 베드로는 특별한 즐거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즐거움”입니다. 고난은 괴롭고 힘든거 아닌가요? 그런데 이 단어에 상반된 의미를 가진 “즐거움”이 같이 쓰인다니 좀 어색합니다. 그런데 오늘 요절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고난 자체를 즐거워하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어떤 가치가 있기에 즐거워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 시간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바른 자세를 배우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
1-6절은 고난에 대한 태도에 관해 말씀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에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베드로는 1절에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다고 말씀합니다. 고난을 어느 정도 받으셨습니까? 죽기까지 받으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조금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영접하시고 죽으시기까지 온전히 고난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난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내 죄 때문에 고난 받으시고, 내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처절하게 죽으셔야 했습니다. 이로인해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전에는 죄와 사망이 우리를 주관하였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내재하셔서 나를 주관하십니다. 전에는 죄의 종이 되어 죄가 시키는 대로 하였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 때문에 죽기까지 고난을 받으셨는데, 이제 내가 어떻게 주를 위해 받는 고난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예수님이 주신 고난을 외면하고 다시 육신의 쾌락을 좇아 살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고난을 잘 피하는게 아니라 고난이 왔을 때 고난을 잘 받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을 잘 대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마음으로 갑옷을 준비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갑옷을 준비하라”는 것은 항상 고난을 맞이할 수 있도록 자세를 취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자세가 중요합니다. 고난에 대한 자세가 분명치 않으면 결과는 뻔합니다. 그러나 고난에 대한 자세가 분명하면 고난을 능히 감당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과 같은 실제적인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영적으로 크게 각성하게 됩니다. 초기 성도들처럼 신앙 때문에 감옥에 가거나 매질을 당하거나 할 때 당시는 고통스럽지만 영적으로 크게 깨어나게 됩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고난의 때를 예수님의 마음을 갑옷처럼 입고 통과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육체의 정욕을 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뜻을 좇아 남은 삶을 삽니다.
3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과거 우리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음란하고, 정욕을 좇아 살았고, 술취함과 방탕의 시간을 보냈고,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우상 숭배는 단지 눈에 보이는 신상에게 절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을 보면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하였고, 하나님보다 정욕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때 우리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우리의 삶은 고통스러웠습니다. 하루하루 시간이 무료했습니다. 너무나 무료하여 하루 종일 게임을 하기도 하고, 종일 영화나 드라마 웹툰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 시간들이 그리우십니까? 악몽 같은 시절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때로 지난날을 그리워할 때가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힘들 때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면서 먹었던 고기와 마늘, 후추 등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실상 그때는 악몽 같은 시절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시절을 그리워해서는 안 됩니다. 로마서 6장 20, 21절을 보면 복음을 믿기 전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우리는 죄의 종으로 살았기 때문에 의롭고 거룩한 삶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때의 열매는 아주 당연하게 사망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시간은 지나간 때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 때 불신자들이 우리를 이상히 여겨 비방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과거 우리는 그들과 똑같이 방탕에 달음질했습니다. 그들과 똑같이 죄를 즐겼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들의 대열에서 벗어나, 삶의 방향과 목적이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과 몰려다니며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죄의 낙을 즐기지 않습니다. 그들과 몰려다니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허랑방탕한 삶을 살지 않습니다. 이로인해 그들은 자기들과 같은 삶의 방식대로 살지 않는다고 우리를 이상히 여겨 비방합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이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이상히 여긴다”는 것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항상 입에 욕을 달고 다니던 분이 예수를 믿더니 언젠가부터 욕을 안 하고 친절한 말투로 복음을 전합니다. 그렇게 술과 담배에 쩔어있던 친구가 어느 순간 예수를 믿더니 술과 담배를 끊고 예수를 믿으라 합니다. 대기업에 다니던 한 분은 사장님이 술을 따라주었으나 나는 예수 믿어 술을 마실 수 없다며 소주잔을 머리 위에 부었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20대 꽃다운 나이에 아프리카 선교지로 가서 젊은 청춘을 다 받칩니다.
그런데 가만보면 세상 사람들도 뭔가에 미쳐 살아갑니다. 어떤 이는 돈에, 어떤 이는 출세와 명예에, 어떤 이는 정욕에 미쳐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에 인생샷을 남기기 위해 위험한 곳에서 영상이나 사진을 찍다가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스마트폰과 좀비의 합성어라는 스몬비족은 길거리에서 스마트 폰을 보며 무단횡단을 하다 사고를 당하기도 합니다. 종로에도 몇 군데 있는데 로또 명당이라는 곳에는 주말이면 줄이 길게 늘어섭니다. 세상사람들도 다들 이런 저런 것에 미쳐 살아가지만 대다수가 그렇게 살아가기에 크게 문제의식이 없을 뿐입니다. 만일 예수 믿는 자가 미쳤다면 우리는 예수님께 미친, 옳게 미친 자들입니다. 우리가 진짜 믿음대로 행하면 가끔은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게 당연합니다. 우리의 삶이 분명히 세상과 구별된 삶이라면 반드시 핍박을 받습니다. 성경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분명 핍박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바로 믿는 것으로 인해 핍박을 받을 때, 우리는 오히려 “아! 이제 내가 제대로 예수님을 믿는구나!” 하며 기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신자들을 비방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하게 됩니다. 이때 믿지 않던 자들의 예수님과의 대면은 심판을 위한 대면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고 죽은 그리스도인들의 예수님과의 대면은 떳떳한 대면입니다. 그들은 육체로는 죽었지만 영으로는 영원히 살아 우리 주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6).
7-11절은 고난이 닥쳤을 때 무엇을 해야할지에 대한 말씀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이 말씀은 베드로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나왔을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포함한 세 제자에게도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막14:38). 그런데 베드로는 이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위기가 닥치자 베드로는 칼을 빼들어 휘두르기도 하고(막14:47),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이처럼 큰 환란과 위기 앞에서 기도하지 않으면 결국 시험에 들고 실족하게 됩니다. 베드로전서가 쓰여질 당시 교회는 로마로부터 다가오는 큰 박해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자신에게 기도하라 하셨던 예수님의 심정으로 신자들에게 말씀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근신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걱정하며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기도한다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고 믿음을 지키며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신자는 광풍 속의 제자들처럼 기도하기 쉽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막4:37). 물론 이런 기도도 주님이 받으시죠. 하지만 우리는 더 나아가 빌립보서 4장 6절에서처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고, 고난 속에서도 분별력을 갖고 마땅히 할 일을 찾아하게 합니다. 우리가 크고 작은 고난 가운데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다 같이 읽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이 말씀은 누구보다도 베드로 자신이 체험한 말씀입니다. 과거 베드로는 많은 죄와 허물을 범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를 소망 없다고 잘라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허물과 실수를 다 덮어주셨습니다. 이 기이한 사랑으로 인해 그는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진심어린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즘 시대를 일컬어 사랑이 식은,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시대라고 합니다. 이런 영향을 받아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서로 사랑하지 않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또한 베드로처럼 사랑으로 허다한 죄를 다 덮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도 다른 사람의 죄를 덮어줄 수 있습니다. 남의 죄와 허물을 덮어주는 것은 손해보고 억울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동역자가 되어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사람을 살리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상대의 약점을 감당해 주고 병든 내면을 치료해 줍니다. 마음에 사랑이 있으면 심지어 상대의 약점도 아름답게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잠언 10장 12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우리 공동체가 서로 뜨겁게 사랑함으로 서로의 죄와 허물을 덮어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은 대접하는 것입니다. 대접 받기보다 대접하고, 섬김받기보다 섬기는 것이 복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손님 대접의 좋은 본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롬13:2).” 우리 공동체가 선교사님들이나 양들을 잘 대접하고, 서로가 서로를 대접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길 기도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다같이 읽겠습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각각 은사를 주셨습니다. 서로 봉사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능력의 은사를 받았으면 그것을 가지고 교회를 위해 청지기같이 봉사해야 합니다. 은사를 청지기같이 사용하라는 겁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맡아 주인을 위하여 관리하는 자입니다. 다시 말하여 은사는 섬기고(serving), 주는데(giving) 사용해야 합니다. 섬기려면 낮아져야 하고, 주려면 희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은사는 꼭 능력의 은사만 있는게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2:28을 보면 서로 돕는 은사도 있습니다. 은사는 우열이 없습니다. 각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각양 은사를 사장시키거나 자기만을 위해 쓰지 말고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는 것처럼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해야 합니다(11).
12-19절은 고난의 의미에 대한 말씀입니다. 왜 고난을 이상히 여기지 말고 즐거워해야 합니까?
첫째, 고난은 믿음을 순수케 하기 때문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제가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 온 세상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매일 벅찬 기쁨과 감격만 누리며 살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지켜주시니 아무런 인생의 어려움이나 고난 없을거라 여겼습니다. 있더라도 기도하면 척척 실시간으로 해결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런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매일 그런 삶이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불 시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금은, 보석함이 아니라 불길이 가득한 용광로에서 만들어집니다. 금광석은 스스로 순금이 되지 않습니다. 금광석이 불 속을 통과해야 99.99%의 순수한 금이 나옵니다. 아무 잘못 없이 고난받은 욥은 극심한 고통 가운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10).” 고난과 시련을 통해 내 안에 모든 불순물, 죄악 된 본성이 불태워지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이 남게 됩니다.
둘째,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고난 자체를 즐거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고난 자체는 아픈 것이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다가 고난을 받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죄 때문에 고난 받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또한 아무 죄 없이, 예수님을 믿는거 하나 때문에 고난을 받을 때, 우리는 나의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신 주님의 심정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과 특별하고 깊은 사랑의 관계성을 맺게 됩니다. “조강지처가 좋더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구차하고 천할 때 고생을 같이한 아내가 최고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되면 예수님과 더 깊은 사귐과 교제를 나누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조강지처”와 같은 존재들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9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는 믿음뿐만 아니라 고난도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원하지 고난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고난도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고자 했습니다(빌3:10).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셋째는 영광의 날에 상급을 받기 때문입니다(13b). 고난, 영광, 이것은 성경에서 쌍두마차처럼 분리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고난이 있는 곳에 영광이 있습니다. 또한 영광이 있는 곳에 고난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영광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고난의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고난을 싫어한다면 영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사랑하는 자녀에게 자꾸 고난을 주시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영광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의 인재가 되기를 원합니까? 그러면 고난 즉 학문의 십자가, 어학의 십자가를 사랑해야 합니다. 정말 성경선생으로 쓰임 받기를 원합니까? 우리가 정말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까? 말씀 공부와 기도의 고난을 사랑해야 합니다. 로마서 8장 17, 1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가 고난을 통과함으로 영광의 대열에 서길 기도합니다.
넷째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14). 14절을 보십시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이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치욕을 당한 자에게 성령이 특별하게 임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에게 더 가까이 찾아와 주십니다.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의 깊은 임재를 경험하고 싶으십니까? 주의 이름으로 치욕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고난 받는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아름답고,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성령의 임재가 고난을 받는 우리 중에 나타나셔서 함께 하십니다. 고난받는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고, 함께 울어주시고, 힘을 주십니다.
다섯째로 주님의 이름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15,16). 죄를 지어서 고난받는 것은 고난이 아닙니다. 이는 죄에 대한 징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받을 때 이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받을 때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신자들이 고난받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된 증거입니다(17). 신자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면 복음을 순종치 않는 자들의 결국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받는 자들은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해야 합니다(19). 우리가 고난의 때에 선을 행하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를 기도합니다.
베드로는 고난 받는 신자들에게 고난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의미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상한 일이 아니라 정상적인 일이며,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 복 받은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과거 그는 얼마나 고난을 싫어하던 사람이었습니까? 얼마나 십자가를 안지려고 하던 사람이었습니까? 그런데 그가 이제 신자들에게 고난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고난 받는 자들을 위로할 뿐 아니라 고난을 즐거워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변화의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신자는 불신 세상에서 크고 작은 고난을 받습니다. 이런 고난을 통해 우리의 믿음은 순수케 되고, 우리는 예수님과 더 깊은 사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영광의 면류관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고난을 사랑합시다. 2025년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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