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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5년 신년 제3강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베드로전서 5:1-14)2025-01-19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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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신년 3강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말씀/ 베드로전서 5:1-14

요절/ 베드로전서 5: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베드로전서는 사도 베드로가 당시 로마의 속주인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 즉 지금의 투르키에 지역의 교회들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베드로전서의 요점은 당시 박해받던 그들이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굳게 지키고 소망을 잃지 않도록 격려하는 내용입니다. 베드로전서의 키 워드를 4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째, 거룩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로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도록 권합니다. 둘째, 고난입니다. 고난은 그리스도인에게 필연적인 부분이며, 이를 통해 더욱 믿음이 성숙해질 수 있음을 말합니다. 셋째, 소망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산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도록 권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격려하고 신앙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5장 말씀은 베드로전서의 마지막 부분으로, 박해 가운데 있는 성도들이 서로를 격려하며 겸손히 섬기는 삶을 살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천성을 향하여 이 땅을 살아가는 나그네들입니다. 1세기 성도들과 같이 우리에게도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한 사랑의 공동체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더욱 건강하고 성숙한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길이 무엇인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장로들에게 주는 메시지 - 양 무리의 본이 되라. 

1절입니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여기서 장로(프레스뷔테루스)라는 말이 나오는데 구약 시대부터 있었던 호칭입니다. (출3:16,18; 24:9; 민11:16; 수20:4) 1세기 교회에는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들이 있었습니다. 가르치는 장로는 다스리는 일도 겸하였습니다. 교단마다 제도가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1세기의 가르치는 장로는 오늘날 목사가 되고, 다스리는 장로는 평신도 장로가 됩니다. 장로들은 일반적으로 나이가 많은 어른들이었고 교회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먼저 장로들을 권합니다. 외적인 핍박으로 인한 고난의 때에는 지도자들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무엇이라 합니까?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베드로는 사도였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이 가장 신임하신 수 사도였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에는 첫째가 되고자 하는 야심이 강했습니다. 수 사도의 자리를 탐내는 요한이나 야고보를 견제하였습니다. 이랬던 베드로가 지금은 사도로서의 특별한 권위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소아시아 지역 교회 장로들과 자기를 같은 위치에 놓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잘 배워서 아주 겸손한 종이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권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2,3절입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이 말씀을 영어로 보면 NIV에는 "Be shepherds of God's flock" (하나님의 양 무리의 목자가 되라), KJV에는 "Feed the flock of God" (하나님의 양 무리를 먹이라)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본문에서는 비신자 전도를 명령하는 말씀이라기보다는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곧 이미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을 치라는 말씀입니다. 치라는 것은 물론 사람을 때리라는 것이 아니고 양을 치듯이 사람을 섬기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 양들이 누구입니까? 자기 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양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의 생명을 내어주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너무나 귀중한 한 사람 한 사람인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양 무리를 어떻게 섬겨야 합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양 무리를 잘 치는 것입니까? 무엇보다 지도자들은 양 무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잘 가르쳐야 합니다. 사람들이 모임에 나온다고 저절로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영적인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앞의 2:2에서도 말했습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은 순전하고 신령한 영적인 젖과 같습니다. 이를 맛있게 섭취할 때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됩니다. 즉, 믿음으로 이미 얻는 구원 안에서 자라서 구원에 합당한 사람이 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공동체 구성원들을 부지런히 말씀을 가르치고 영적인 권면으로 도와야 합니다. 규칙적으로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하며 섬기는 삶을 통해 영적 훈련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 공동체가 건강하고 견고해집니다. 


그런데 교회 지도자들은 양 무리를 치되 어떤 자세로 쳐야 합니까? 2,3절 말씀은 3가지 자세를 명합니다. 첫째,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라. 둘째,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라. 셋째,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억지로 한다는 것은 마지 못해 하는 것입니다. 리더의 위치에 있으니 마음을 드리지는 않고 자기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더러운 이득을 위해서는 물질적인 보상이나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장하는 자제를 갖는 것은 영어로 ”Lord it over“인데 자기가 주요 왕처럼 행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0:42절에서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임의로 주관한다고 하셨는데, 그때 쓰인 표현이 ”Lord it over“입니다. (KJV: being lords over) 권세를 가지고 지배하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직분을 받으면 권세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명령이나 권세로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는 것은 절대로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직분은 낮아져 섬기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건강하게 잘 서 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나의 섬김을 통해 오직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으시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지도자들은 양 무리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선한 목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예수님은 양들 앞에서 가십니다. 본을 보이며 앞서 가시고 양들이 자기 뒤를 따라오도록 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님은 섬김과 사랑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을 보여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심히 부담스럽습니다. 양들이 나의 좋은 면 본 받기는 커녕 나의 약점과 허물을 보고 실족할까 염려가 됩니다. 그러나 본을 보여야 된다고 꼭 잘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도 양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배우는 사람인 것을 보여 주면 됩니다. 나에게도 반복되는 실수와 허물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진실되게 회개하고 예수님을 배우는 그런 삶을 살면 됩니다. 사도 바울도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11:1)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젊은 종 디모데에게 말했습니다.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해여 믿는 자에게 본이되라”(딤전 4:12) 그리고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 보이라고 명했습니다(딤전 4:15). 모든 언행에 본을 보이되 특별히 영적으로 성장하는 본을 보이라고 권한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는 배우는 학생으로서의 모범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를 배우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배우는 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계속 배우는 자가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계속 배우는 자가 겸손한 자입니다. 우리가 경쟁하여 싸울 대상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입니다. 어제의 나와 경쟁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예수님을 향하여 더 달음질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있는 위치에서 끊임없이 예수님을 배우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양 무리의 본이 되는 지도자에게 주어지는 약속이 무엇입니까? 4절입니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여기서 목자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목자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십니다. 그때, 시들지 않는 영광의 관을 주십니다. 당시 올림픽에서 우승하면 월계수로 관을 씌워주었습니다. 그것은 최고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월계수는 시간이 지나면 시듭니다. 말라 비틀어져 볼품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영광의 관은 결코 시들지 않습니다. 지도자의 직분을 잘 감당하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오시는 그때 영원히 지속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둘째, 교회 공동체에 주시는 메시지 - 겸손하라

5절입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여기서 젊은 자들은 청년들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문맥적으로 보면 장로들을 제외한 교회 공동체 모든 신자들을 의미합니다. 지도자들인 장로들의 다스림을 받는 성도들을 말합니다. 장로들은 주장하는 자세를 갖지 말고 본을 보이라고 하되, 성도들에게 주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가르치며 다스리는 장로들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교회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지며 노심초사 기도하며 섬기는 지도자들을 거스르지 말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7도 말씀합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장로들은 양 무리의 본이 되고, 지체들은 지도자들의 리더십에 순종할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가 세워집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지도자의 직분은 누가 그 직분을 맡느냐에 상관없이 존중히 여김 받아야 합니다. 주님이 친히 세우신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Honor is given yet respect is earned.” 지도자는 직분을 받으면 직분에 따는 존중을 받습니다. 그러나 존경을 받는 것은 별개 문제입니다. 존경은 지도자가 섬기며 본을 보이는 가운데 얻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구성하는 지체들로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 그 몸이 건강하게 활동하도록 각자의 역할을 겸손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지도자는 머리와 같습니다. 손과 발이 머리의 지휘를 받지 않고 혼자 움직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눈이 앞을 보지 않고 땅만 쳐다본다면 그 몸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손과 다리가 움직여주지 않으면 머리가 아무리 좋은 생각을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 각자가 지체로서 맡은 역할을 잘 감당할 때 건강한 교회, 튼튼한 교회 공동체가 이루어집니다.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순종은 겸손의 외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면 겸손이라 무엇입니까? 이는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아래로 낮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낫게, 곧 더 훌륭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시니어 목자가 한 청년을 볼 때 실제로 자기가 그보다 성경을 더 많이 알고 믿음이 나은 것 같습니다. 그가 어떻게 자기를 더 아래로 여길 수 있을까요? 나이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내가 그의 나이 때 그와 같은 수준에 있었는가를 생각하면 그 청년을 나보다 더 낫게 여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본성상 겸손은 어렵습니다. “겸손은 어려워”라는 노래도 있고 방송도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겸손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마11:29a) 예수님을 배울 때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스스로 낮은 위치에 서셨습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겸손히 순종하는 사람에게 어떤 약속이 있습니까? 5b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하나님이 대적하시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사람이 나의 대적이 되면 하나님이 구해주시지만, 하나님이 나의 대적이 되면 누가 나를 구원하겠습니까?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교만을 부채질합니다. "내가 제일 잘 났어" 하며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을 싫어하게 합니다. 다른 사람의 지혜로운 말을 듣지 않게 하고 자기가 모든 것을 판단하고 행하게 합니다. 순종하는 것이 자기도 복을 받는 지혜로운 길인데 마귀는 마음에 교만을 심습니다. 스스로 왕이 되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요? 하나님의 은혜는 그저 일시적으로 우리를 기분 좋게 하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 승리하고 열매 맺는 삶을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 가운데 지혜가 필요할 때 지혜를, 능력이 필요할 때 능력을, 사랑이 필요할 때 사랑을, 힘이 필요할 때 힘을, 곧 때마다 필요한 은혜를 주십니다. 누구에게? 겸손한 자에게! 그러므로 겸손한 것이 어리석은 것이 아닙니다. 가장 큰 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편으로 얻는 길입니다. 우리가 누가 정말 잘되기를 바라면 그가 겸손한 사람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가, 양들이, 동역자들이 복된 삶, 귀한 삶을 살기를 원하면 그들이 겸손한 사람들이 되도록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이란 전능하신 하나님 아래서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다 아신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공의롭게 판단하신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보응하신다는 것을 믿고 겸손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면 겸손한 자를 높이십니다.


셋째,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7절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고향을 떠나 흩어진 나그네로 사는 1세기 신자들에게는 염려가 많았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 일자리 문제, 집 문제, 아이들 교육 문제 등 하나에서 열까지 문제였습니다. 이로 인해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고 말합니다. NIV에는 “Cast all your anxiety on him.”으로 되어 있습니다. Cast 라는 말은 창던지기 경기에서처럼 창을 힘껏 던져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염려는 거머리같이 달라붙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벌써 내가 염려 중에 있습니다. 분명히 던져 버렸는데 다시 염려가 내게 찾아와 내 몸에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던져 버려야 합니다. 어디로 던져야 합니까? "다 주께 맡기라!" 주님께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를 돌봐주십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염려하지 말고 주님께 맡기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3가지입니다. 첫째, 그 문제가 실제로는 그다지 염려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침소봉대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원래 바늘과 같이 작은 문제를 몽둥이만하다고 부풀려 말하는 것을 뜻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염려할 때 사실 그 문제가 실제로 부딪쳐 보면 큰 문제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상상의 세계에서 worst scenario 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부딪쳐 보면 다 해결 방법이 있습니다. 제가 오래전에 군 생활을 할 때 대대 병력 제일 앞부분에 서서 행군을 인솔한 적이 있었습니다. 상부의 명령대로 하면 저 멀리 앞에 보이는 절벽과 같은 산을 넘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깎아 자른 듯한 저 산을 어떻게 오를 수 있는가? 이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실제 그 가파른 산밑에 도착하자, 그 산을 오르는 작은 길이 있었습니다. 아마 산삼을 캐는 사람들이 다녔던 길이었던 듯하였습니다. 그래서 대대 병력이 한 줄로 그 급경사의 산을 넘은 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멀리서 보며 지레 겁을 먹습니다. 그 문제가 너무 크고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갖고 가서 부딪쳐 보면 별거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해결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아버지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은 십자가에서 이미 증명이 되었습니다. 다른 그 어떠한 증거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사랑의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이 구하는 것을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로마서8:32절은 말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닥칠 때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아버지, 제가 이 문제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해결해 주세요. 나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아버지의 절대적인 사랑을 믿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이 해결해 주십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다른 방식으로 응답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대로 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면,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안 하시는 것입니다. 왜? 더 나은 것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지혜가 뛰어나십니다. 우리는 때로 나에게 무엇이 좋은 것인지,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내가 구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이런 점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응답하지 않으신 것도 하나님이 기도를 응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게 가장 좋은 때에 하나님께 가장 영광이 되고 내게도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 이를 믿고 우리가 아무 일에도 염려하지 말고 다 주님께 맡기기를 기도합니다.


넷째, 마귀를 대적하라

8절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우리의 원수는 겉으로 볼 때 우리의 신앙을 박해하는 자들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배후에 역사하는 자는 사탄 마귀입니다. 마귀는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 다닙니다. 먹이를 발견하면 기민하게 공격하여 쓰러뜨립니다. 그런데 본문의 맥락을 보면 어떤 자들이 마귀의 공격 대상이 될까요? 지도자로서 주장하는 자세를 갖는 자들입니다. 본을 보이기보다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외식하는 리더들입니다. 또한 겸손히 순종하지 않고 자기가 왕 되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 같이 다니지만 “나는 마귀다”하며 무서운 모양을 하고 다니지 않습니다. 광명의 천사처럼 친밀하고 간사하게 접근합니다. 이러한 마귀의 공격을 이기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교제권 안에 거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에 전념할 때 우리는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깨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9절입니다.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마귀를 대적하라고 합니다. 야고보 사도도 말했습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마귀는 우리를 두렵게 하지만 믿음에 굳게 서서 대적하면 마귀는 즉시 물러갑니다. 물론 우리 힘으로 마귀를 대적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의 말씀으로 싸울 때 마귀를 능히 대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10,11절입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권능이 세세 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10절 전반부를 NIV는 이렇게 말합니다. "And the God of all grace, who called you to his eternal glory in Christ," 은혜의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영원한 영광으로 부르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스스로 영광스런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부족한 게 전혀 없으십니다. 삼위의 하나님은 스스로 충족하시고 스스로 영원히 복되고 영원히 즐거워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들을 창조하신 이유는 우리로부터 무엇을 얻고자 하심이 아닙니다. 우리를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즐거움, 그의 영원한 복에 참여하도록 하십니다. 그의 영원한 영광에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 영광을 생각할 때 우리가 세상에서 받는 고난은 잠시입니다. 실로 경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베드로는 그의 서신을 마무리하면서 나그네 된 성도들이 힘과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공동체를 생각하였습니다. 비록 그들이 세상에서 불안정한 가운데 있지만 지도자들은 겸손과 사랑으로 양 무리를 섬기며, 공동체 지체들은 겸손으로 순종하는 공동체를 바랐습니다. 비록 고난이 많지만,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는 소망으로 믿음의 싸움을 잘 싸우기를 바랐습니다. 우리가 그런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영원한 소망을 붙들고, 리더들은 본을 보이며 말씀을 열심히 가르치는 모임, 지체들은 지도를 잘 받으며 겸손히 동역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힘과 위로를 얻는 사랑의 공동체, 나그네 삶에 오아시스와 같은 참 가족들의 건강한 교회 공동체로 우리를 세워주시길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