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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5년 로마서 11강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로마서 8:18-39)2025-01-26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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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로마서 제 11 강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말씀/ 로마서 8:18-39

요절/ 로마서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자, 이제 신년 말씀이 끝나고 로마서로 돌아왔습니다. 지난 로마서 8장 전반부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지난 강의 마지막 말씀, 17절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상속자, 곧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라고 하였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말씀과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 받은 성도는 성화 과정 속에서 고난을 받습니다. 그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 과정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도우시는가?를 배울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미래에 대한 소망을 붙들며 승리의 확신, 구원의 확신을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18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생각하건대’ 사도바울이 깊이 생각했다는 것이죠. ‘현재의 고난’ 이는 사도바울과 로마 성도들이 겪는 고난입니다. 고난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악된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또 사단 마귀가 시험할 때 이를 대적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구속함을 받지 못한 죄악된 육체의 소욕과 싸울 때 고난이 있습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사명을 감당하고자 애쓸 때 고난을 받습니다. 고난을 받으면 참 힘듭니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회피하고 타협하면 쉽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안됩니다. 왜냐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받는 성도들에게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현재의 고난과 나타날 영광과 비교해 보라고 합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회사가 잘되어 상여금을 1000% 줄터이니 당직과 야간 연장근무하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기쁨으로 합니다. 또 취준생들이 놀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장래 내가 원하는 곳에 ‘취업’이라는 영광을 얻기 위해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는 것 아닙니까? 


‘고난’하면 사도 바울만큼 많이, 그리고 세게 받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바울은 천국의 영광스런 모습을 살아 생전에 본 사람입니다. 고후12:4에서 자신이 체험한 내용을 말합니다.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이는 천국의 영광이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지극히 크고 풍성하다는 뜻입니다. 그가 직접 눈으로 천국의 영광을 보았기에, 자신과 로마 성도들이 겪는 신앙적 고난이 천국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보통 고난을 받으면 ‘왜 나만 이런 고난을 받느냐?’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오히려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특권을 주시는가?’ 왜 특권이죠? 고난은 보통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받습니다. 중동에서 많은 양무리를 칠 때 목자는 보통 염소 한 마리씩을 넣어놓는다고 합니다. 왜 이러는 줄 아십니까? 양들은 염소와 싸움으로서 질 좋은 털을 가질 뿐 아니라 운동도 하게 되어서 잘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양은 영양 과다로 병에 걸린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 ‘원수 같은 염소’를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인생 채찍으로 고난을 받습니다. 영국의 조지 왕이 한 도자기 공장을 방문하였습니다. 공장 입구에 두 개의 꽃병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두 개다 같은 원료, 같은 모양과 디자인으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윤기가 흐르고 생동감 있는 예술 작품의 모습인 반면, 다른 하나는 흐릿한 빛을 내며 볼품이 없었습니다. 이상해서 왕이 관리인에게 “똑같은 꽃병 같은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나죠?” 물었습니다. 그러자 관리인이 “똑같은 제품인데요. 이쪽은 불에 들어간 것이고, 저쪽은 불에 안 들어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처럼 ‘고난의 불’은 우리의 영혼을 아름답게 하고 빛나게 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 뒤에 영광이 옵니다. 


그렇다면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며 현재 고난받는 우리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일까요? ‘탄식’입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아직 구속받지 못한 몸을 가지고서 죄악된 세상에서 살아갈 때 탄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롬7:24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 탄식을 하였습니다. 본문에는 세 종류의 탄식이 나옵니다. 피조물의 탄식, 성도들의 탄식, 성령의 탄식입니다. 


첫째, 피조물의 탄식. 22절을 보십시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범죄함으로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모든 자연세계, 모든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얼마 전 뉴스에 지구 온난화가 아주 심각하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WMO(세계 기상 기구) 에서는 2024년, 작년 한해 지구 평균 온도가 섭씨 1.55도 올랐다고 합니다. 임계점을 섭씨 1.5도로 정했는데 이것을 처음 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반복되면 지구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 경고했습니다. 질병과 영양실조, 식수부족, 해수면 상승, 대규모 이동으로 인한 분쟁으로 65년후에는 세계인구의 40억명이 사망하고, 전세계 GDP가 반토막 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습니다. 또한 북극의 얼음이 녹으면서 그 속에서 동면하고 있던 세균과 바이러스가 깨어나 활동하면 동물과 인간에게 어떤 해악을 끼칠지 전혀 예상할 수 없습니다. 또한 자연세계를 보십시오. 겉으로만 봐서는 멋있어 보이지만 속에 들어가 보면 치열한 양육강식의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여름에 집 근처에서 여치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오랜만에 구경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치에게서 30센티미터 근처에서 여치를 노려보고 있는 사마귀를 발견하였습니다. 하도 신기해서 자리를 뜨지 못하고 지켜보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마귀가 여치를 공격하여 먹잇감으로 삼는 것을 보았습니다. 평화로움 속에 치열한 양육강식의 법, 썩어짐의 법이 지배하는 세상을 보고서 천국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죄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이 다 탄식하며 고통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들이 고대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제발 인간들이 회개하고, 욕심부리지 말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영적 질서를 회복해 주세요”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니다. 이 소망은 마침내 예수님의 재림 때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의 자유에 이를 때 성취되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 탄식은 성도들의 탄식입니다. 23절을 읽겠습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성화 과정 속에서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죄와 허물, 연약함이 드러날 때 탄식합니다. ‘네가 그러고도 하나님의 자녀야?’ ‘그러고도 목자야? 선교사야?’ 자기를 향하여 탄식합니다. 이러한 탄식은 하나님 앞에서 정말 올바르게 살고자 애태우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갖는 마음입니다.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립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오늘날까지 거룩하게 살려고 했던 성도는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소망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얼마나 간절히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고 있습니까? 


24,25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우리는 보통 구원을 믿음으로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본문에서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합니다. 왜 이런 표현을 했을까요? 믿음, 소망,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3대 미덕이라고 하는데, 한 묶음입니다. 히11:1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믿음 안에는 이미 소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특별히 여기서 믿음보다는 ‘소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잘 감당하려면 소망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현대 문명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그 조급함 때문에 인내를 기대하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바울은 ‘미래의 소망을 바라보는 당신~ 참음으로 기다리십시오’ 권면합니다. 


세 번째는 성령의 탄식입니다. 26절을 읽겠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가 소망가운데 잘 참고 기다리면 좋겠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다가 주저앉고 싶고 포기하고 싶습니다. 죄에 빠져 헤메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두신 것이 바로 ‘성령의 탄식’입니다. 피조물과 우리 성도의 탄식은 우리의 죄로 인한 탄식이지만 성령님의 탄식은 이러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돕기 위한 탄식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우리를 인도하기 위한 탄식입니다. 성령께서 탄식하셔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십니다. 우리가 너무 힘들면 어떻습니까?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여서 ‘아버지~ 아버지~’ ‘도와주세요’,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이 말 밖에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시고, 도와주시고, 인도해 주시니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감사할 일입니까! 요일5:14에서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신다’고 하였는데, 성령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이기에 하나님께서 100% 응답하시는 기도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28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는 ‘거듭난 성도’를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그 이유는 성령의 탄식과 기도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선’은 무엇일까요? 29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이루고자 하는 선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한 진정한 목적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인생 목적이 ‘그리스도를 본받아’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영광에 참여할 때 최종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영광의 몸을 덧입게 될 것입니다. 


30절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이유가 나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9절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자들’이라고 나옵니다. 이것을 ‘예지’라고 합니다. 30절에서 ‘그들을 미리 정하셨다’, 이를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들을 부르셨다’, ‘소명’이라고 합니다. ‘그들을 의롭게 하셨다’, ‘칭의’라고 합니다.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다’ ‘영화’라고 합니다. 예지, 예정, 소명, 칭의, 영화로 이어지는 구원의 과정을 ‘구원의 황금사슬(golden chain of salvation)’이라 부릅니다. 사슬로 묶여진 한 묶음, 패키지라는 것입니다. 이번 장기간의 설 연휴에 사람들이 해외 여행을 많이 가는 것 같습니다. 패키지 여행을 가는 경우 어떻습니까? 여행사가 이미 짜 놓은 일정과 프로그램을 따라야 합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지부터 영화까지 패키지로 되어 있기에 반드시 구원의 여정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한번 선택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반드시 영화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저는 장유찬형제의 할머니가 예수님 믿고 구원 얻고 소천하신 것을 보고서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불교를 신봉하는 유찬 할머니에게 예수의 ‘예’자만 꺼내도 손사래를 치실 분이라고 전해 들었기에 요양병원에 있는 그 분을 첫 심방할 때 복음을 전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지금 아니면 안된다는 그런 마음을 주시는 것 같아 입을 열어 담대히 복음을 전하였을 때 의외로 유찬 할머니가 복음을 순순히 들으시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까지 따라하는 것을 보고 저는 속으로 놀랬습니다. 함께 갔던 유찬형제도 놀랐습니다. 그 뒤 일주일에 한번 씩 심방하며 구원의 확신과 천국 소망, 사죄의 확신, 기도에 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기도에 관해 가르쳐 드렸을 때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두 손 모아 기도하는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은혜롭게 기억이 됩니다. 소천하시기 전날 심방하였을 때 평안하고 온화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어서 유찬형제랑 무릅끓고 기도해 드리고 왔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택하신 자들을 반드시 구원하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저에게 ‘새봄학기에 국민대, 상명대 가운데 택한 나의 백성이 있으니, 가서 복음을 전하라’ 교훈하시는 것 같습니다.


여기 청년들 중에는 설 명절에 놀이공원에 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롤러코스터를 탑니다.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아찔한 스릴을 즐깁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어떻습니까? 터미널에 도착합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길도 오르락 내리락 아찔한 때를 여러번 넘지만 마침내 영화에 이릅니다. 단기적으로는 절망과 슬픔이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선을 이룹니다. 하나님은 완전하게 예정된 이 프로그램속에서 고난이란 촉매를 사용하셔서 우리 구원을 더욱 활성화시키며 진보를 이루어 가심을 우리가 알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비한 구속의 비밀을 깨달은 바울의 마음에서 환희에 넘치는 사랑의 시가 흘러나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31절부터의 내용입니다. 그 주제는 ‘우리의 구원이 확실하다’입니다. 


31-39절을 보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우리를 고발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여기 나오는 용어들이 주로 어디서 쓰는 용어입니까? 법정에서 쓰는 용어입니다. 지금 하늘 법정이 열렸습니다. 재판장인 하나님이 계시고, 피고석에 신자들이 앉아 있고, 원고쪽에는 우리의 반대자들인 사단과 그 추종 세력들이 서 있습니다. 


31절,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우리의 구원의 과정을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끄시는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느냐는 반문입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는데 대적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32절, ‘자기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셨는데, 하나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는가?’ 자기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조차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믿는 우리에게 영생과 하늘의 기업과 왕노릇하는 지위를 약속하셨는데, 그것을 안 주겠느냐는 말입니다. ‘다~ 준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33절,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이미 의롭다고 ‘땅땅땅’ 판결을 내리셨기에, 성도는 고소 자체가 안된다는 것입니다. 


34절, ‘누가 정죄하리요’ 우리에게 죄의 형벌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증인이요 변호사 역할을 하십니다. ‘죽으셨다’ 이 말은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셨다는 말이고, ‘다시 살아나셨다’ 이 말은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덧입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성균관대 로스쿨 교수님인 강야곱목자님의 말에 의하면, 재판을 할 때 재판장 좌우로 여러 판사들이 앉는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재판장 오른편에 있는 판사가 가장 영향력이 세다고 합니다. 옆에서 ‘재판장님~ 이것은 형량을 감해주어야 할 것 같은데요’ 간구하면 재판장이 10년 때릴 것을 ‘5년~’ 선고를 내리고, ‘이것은 무죄인 것 같은데요’ 간구하면 재판장이 ‘무죄~’ 이렇게 많이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지은 죄의 형벌을 받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35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롬5:8에서도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셨습니다. 35-39절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고자 하는 무수히 많은 것들, 특히 17가지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이 결코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입니다. 당시 로마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종일 주를 위해 생명까지 위협을 받았습니다(35,36). 그러나 그들은 붙잡히면 죽을 줄 알면서도 흔들림 없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들의 담대한 확신의 근거는 그들의 지혜, 의지, 능력, 끈기가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자기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대신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들은 모든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37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가 간신히 이기는 것이 아니라 넉넉히 이깁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어려움과 고난으로 인해 우리 믿음이 흔들릴 때, 우리의 영적인 눈을 열어 하늘나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틀림없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예정으로 완전히 보장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균형감 있게 더불어서 명심해야 할 사실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과 예정을 빌미로 제멋대로 행동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경거망동한 태도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성도의 태도가 아닙니다. 절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구원이 확실해도 오히려 구원을 잃어버릴까 조심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성경 곳곳에서 말합니다(히4:1,12:15,고전9:27).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반면 원수 앞에서는 구원의 확실성과 담대함으로 대항하여 승리하는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결론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고난 속에 있는 우리를 힘있게 합니다. 승리케 합니다. 어떤 시련속에서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를 지시고 자기 생명까지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붙들 때 우리가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의 은혜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서 장차 얻게 될 영광을 바라보며 현재의 고난을 잘 감당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안에 새겨지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