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출애굽기 2강 들으시고 기억하시고 돌보시고 아시는 하나님 말씀/ 출애굽기 2:1-25 요절/ 24,25절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출애굽기가 몇 장까지 있습니까? 이렇게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출애굽기를 쓴 모세의 인생이 40년, 40년, 40년 이렇게 40년을 주기로 큰 전환점을 맞는다. 그러므로 출애굽기도 40장까지 있다.” 모세의 삶을 3기로 나눌수 있는데, 오늘 말씀 출애굽기 2장은 모세의 1기, 2기 80년의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지난 1장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애굽왕 파라오가 ‘전쟁이 나면 이스라엘이 자신을 배반하여 다른 편에 설 수 있다. 강성해지면 애굽에서 나갈 수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출산을 억제해야 한다’ 그래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강제노역을 시키고, 산파를 시켜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죽이게 하고, 그것도 안되니 이제는 부모들에게 직접 남자 아이를 나일강에 던져 죽이도록 명령합니다. 자, 이쯤되면 하나님의 백성의 씨가 마를 것 같고, 더 나아가 출애굽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에 큰 차질을 빚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는 결코 중단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고 반전을 통해 일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가를 배우길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어”. 레위는 야곱과 레아 사이에서 세 번째로 태어난 아들입니다. 이 가문은 후에 제사장 가문이 됩니다. 여기 나오는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은 아므람(6:18-20)이고, 레위 여자는 요게벳(6:20)입니다. 이들이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너무나 기뻐 ‘하나님, 감사합니다.’ 찬양해야 마땅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애굽왕이 “아들이 태어나거든 나일강에 던지라”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는 어두운 시대에 죽을 운명을 가지고서 태어났습니다.
이때 모세의 어머니는 어떻게 합니까? 아이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깁니다. ‘잘 생겼다’, 목자님들과 공부할 때 코메디언 이주일씨가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라고 했는데, 못생겼으면 숨기지 않는다는 말인가? 본문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이쁘다고 합니다. ‘잘 생겼다’ 이 말은 히브리 말로 ‘토브’인데,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난 후 ‘보시기에 좋았더라’에서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히11:23은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나옵니다. 그 부모가 믿음의 눈, 하나님의 눈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통해 이루실 놀라운 계획, 굿 뉴스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어떤 계시가 그 부모에게 전달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시간이 흘러 석 달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들키지 않기 위하여 무진 애를 썼습니다. 아이가 울 때마다 엄마는 피리를 불고 아기의 누나 미리암은 ‘곰 세 마리’ 노래를 우렁차게 불렀습니다. “곰 세 마리가 한 집에 있어 아빠 곰, 엄마 곰, 아기 곰” 석 달 째 되는 날도 어김없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아빠가 황급히 문을 열면서 “여보, 이제 안되겠어요. 아기 울음소리가 너무 커서 밖에서 다 들려요. 눈치채겠어요. 빨리 무슨 대책을 세웁시다.” 아기의 목숨뿐만 아니라 온 가족의 목숨까지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이에 중대한 결심을 합니다. 갈대상자를 구해왔습니다. 상자 안팎을 방수용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였습니다. 거기에 아기를 담아 나일강 가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3). 여기 쓰여진 ‘상자’란 단어는 노아가 만들었던 ‘방주’와 똑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창6:14), 노아의 방주가 인류의 씨를 보존하는 하나님의 도구였다면, 아기를 담은 갈대 방주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보존하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이 방주는 장차 온 인류를 구원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때 누가 나타났습니까? 애굽 왕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강에 왔습니다. 갈대 사이에 있는 상자를 발견했습니다. 시녀들에게 가져오게 합니다. 열어보았습니다. “응애~ 응애~” 아기가 울었습니다. 이를 본 그녀가 아이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근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순간 갈등이 되었습니다. ‘히브리 아이는 강물에 던지라’는 아버지의 명령이 생각났습니다. 강물에 던져 버릴까? 그냥 못 본채 두고 갈까? 이 찰나를 놓치지 않고 미리암이 잽싸게 공주에게 달려왔습니다. “공주마마~, 제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엄청난 도전의 말입니다. ‘당신을 위하여’란 말은 공주의 양자로 입양하라는 제안입니다. 이에 바로의 딸이 무엇이라 합니까? ‘가라’. ‘오케이~’합니다. 소녀가 얼마나 신났겠습니까? 자기 엄마에게 가서 “어머니, 이제 됐어요. 됐어요. 어머니가 일러준대로 다 되었어요.” 그 어머니가 얼마나 기뻤을 까요? 춤을 덩실덩실 추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 찬양했을 것입니다. 바로의 딸 앞으로 갑니다. 그러자 바로의 딸이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모세가 물에 빠져 죽을 운명이었는데, 그가 입양을 통해 왕궁의 귀족, 왕자가 된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반전입니다. 우리도 죄로 말미암아 파멸의 강에 빠져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비, ‘불쌍히 여기심’에 의해 구원을 얻었습니다. 죄의 노예였던 우리가 하늘의 황태자, 황공주가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이루어진 은혜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로마서에서 배운 것이 이것 아니겠습니까? 거기에다 덤으로 삵까지 받게 됩니다. 요10:10절이 생각납니다.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죽을 우리를 살려내시고 이 땅에 사는 동안 덤으로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친모에게 맡겨진 아이가 크자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갑니다. 보통 3세에 젖을 뗍니다. 어떤 학자는 아이가 궁중에서 교육받을 수 있는 6세에 데려갔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때까지 아이는 친모 밑에서 신앙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누구신가? 이스라엘에게 어떤 약속을 하셨는가? 너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의 신앙교육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바로의 딸이 아이에게 ‘모세’라는 이름을 지어 줍니다. ‘모’는 ‘물’이고, ‘세’는 ‘건짐을 받다’입니다. 그런데, 이 동일한 발음이 히브리어로 ‘건져내는 자’란 뜻입니다. 죽음의 강 나일에서 건져냄을 받은 그가 장차 그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는 자로 쓰임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놀랍습니다.
궁중에 들어간 모세가 무엇을 했겠습니까? 애굽은 당시 최고의 학문과 문명을 자랑하는 나라입니다. 이미 B.C. 2000년 경에 스핑크스. 피라미드를 만들었습니다. 수학과 과학, 천문학, 법학, 철학, 건축술이 발달했습니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과 행정력을 갖추었습니다. 당시 시체를 썩지 않게 미이라를 만든 것을 보면 생물학과 의학도 상당히 발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선진문물을 모세가 열심히 배웠습니다. 그래서 행7:22을 보면,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였다고 나옵니다. 이스라엘도 앞으로 한 나라를 건설해야 합니다.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앞선 학문과 지식을 배워 익히도록 준비시킨 것입니다. 우리도 대학에서 또한 직장에서 배우는 세상 학문과 지식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잘 배워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섬기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우리 청년들~, 젊었을 때 열심히 공부하고, 기술을 터득합시다.
하나님은 모세를 위하여 또 다른 훈련을 예비하십니다. 11절을 봅시다. ‘모세가 장성한 후’라고 나오는데, 나이 사십이 되는 때입니다. 그가 자기 형제들에게로 나아갔습니다. 여기서 ‘자기 형제’란 표현은 모세가 히브리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하겠습니다. 그는 동족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루는 어떤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세는 화가 났습니다.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입니다. 모래 속에 감춥니다. 히11:24,25절은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기술합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모세는 히브리 사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자 하였습니다. 또 사도행전 7장을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났고,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모세의 손을 통해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다시 본문을 살펴보면, 모세가 좌우를 살폈고 시체를 모래에 숨겼다고 나옵니다. 믿음의 사람은 좌우가 아니라 하늘을 보아야 합니다(코람데오-신전의식). 모세는 믿음으로 행한다고 하였으나 하나님을 의식하기보다 사람을 의식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이에 모세가 잘못한 사람에게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그러자 그 사람이 대들었습니다.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는 어제 한 자신의 행동이 들통났음을 알았습니다. “일이 탄로되었도다” 두려움에 빠집니다. 바로가 그를 죽이고자 찾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으로 갑니다. 그는 이제 애굽의 왕자에서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일련의 사건을 통해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현재 애굽의 권력구도는 바로의 딸의 남편인 투투모스 2세가 죽고 투투모스 2세와 후궁 사이에서 난 투투모스 3세가 왕권을 이어 받았습니다. 하지만 바로의 딸이 섭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의 딸의 양 아들인 모세의 위상도 높아진 상태입니다. 모세 나이 사십, 왕궁에서 배울 것은 다 배웠습니다. 젊고 패기가 넘칩니다. 자신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도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때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편에서 보면, 그는 아직 덜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세가 자기 힘으로 하고자 할 때 하나님은 철저히 실패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또한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때 가장 행복합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막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을 하나님은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탄이 타락한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모세가 죽을 때도 하나님께서 그의 시체를 찾지 못하게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세의 영광’이 너무나 커서 그 시체를 우상화 할 수 있기 때문에 아예 없애 버리셨습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길 “주님이 내게 말씀하시길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그러므로 내가 기뻐하며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해 자랑하리니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릴 언제 쓰십니까? 내가 잘 할 것 같고, 내 욕심, 내 영광이 드러날 것 같을 때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내가 죽고, 주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그 때에, 내가 아무 것도 아닌 nothing인 것 같고, ‘나는 아니에요’ 이럴 때 하나님은 쓰십니다. 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 있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원하십니다.
두 번째로,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모세가 준비가 안되어 있습니다. 그는 지금 혈기가 왕성합니다. 겸손 훈련, 온유 훈련이 필요합니다. 왜 입니까? 그가 앞으로 애굽의 노예백성, 200만 명의 이스라엘을 출애굽하여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을 지도자로서 이끌어야 합니다. 우리가 명절 때 시골 내려가거나, 아니면 가족 여행갈 때 어떻습니까? 짧은 기간이지만 의견 충돌이 생기고 가족간에도 십중 팔구 다툼이 있습니다. 하물며 수 많은 노예 백성을 이끌고 40년간 고난의 길을 가야합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 그에게 이 일을 맡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의 혈기로 한 사람도 품고 데려 갈 수 없을 것입니다. 물이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 자신을 대적하며 면전에서 짱돌을 드는 사람,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사람, 음행하며 안식일을 맘대로 안 지키는 사람들을 보면서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저주하며, 못해 먹겠다며 ‘나, 자연인이 될래’하며 산속으로 숨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내면 훈련, 특히 ‘하나님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서 한 명의 양을 품고 섬기는 목자 훈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도망자가 되게 하사 애굽 궁궐의 훈련장에서 제2의 훈련장인 미디안 광야로 옮겨 놓으십니다. 40년동안 양을 치며, 양의 똥을 치우는 목동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모세를 온 지면에서 가장 ‘온유한 자’로 빚어지게 하시며 이스라엘을 이끌수 있는 지도자로 키우십니다.
다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고센 땅에 거주하니 물이 풍부하여 목축을 하고 농사를 짓기에 좋습니다. 오랫동안 거주하여 정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노역으로 인해 육체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아직 살만합니다. ‘정말 이곳 싫다. 지긋지긋하다. 못 살겠다. 빨리 떠나자’ 이런 마음이 들어야 진짜 떠날 수 있습니다. 그때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무얼 바꿔보려고 해도 잘 안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직 쓸 만하기 때문입니다. 좀 불편하지만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죽었다’ 생각될 때 바꾸는 것이 인간입니다. 폐암에 걸려서 ‘담배 안 끊으면 죽습니다’ 의사가 말해 줄 때에라야 사람이 담배를 끊습니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일하시며 인내하며 그 때를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 원하는대로 되지 않을 때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고, 유익한 것이라 할지라도 혈기 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기도하며 또한 준비하며 인내합시다. 예수님도 항상 때를 따라 일하셨습니다.
미디안 땅으로 도망한 모세는 그곳에서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양을 치며 40년의 세월을 보냅니다. 여기서 우물가 이야기가 길게 나옵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우물은 창세기에서 이삭과 야곱이 배우자를 만난 곳입니다. 그리고 그 패턴이 모세에게까지 이어집니다. 어제 일용할 양식 창24장에서,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배우자를 찾아나선 장면이 나옵니다. 나홀성 한 우물에 도달하여 그곳에서 장차 이삭의 배우자가 될 리브가를 만나고 기뻐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찬송하나이다.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의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인도하시고 주관하심으로 우물가에서 이삭의 배우자를 만나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마찬가지로 모세도 우물가에서 배우자를 만난 것이 우연히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이끄셨고 계획하셨음을 말해줍니다. 이 이야기는 신약으로 이어집니다. 요4장에서 남편을 다섯이나 둔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서 참 남편되신 예수님을 만나고 영생을 얻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때 예수님이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라고 나옵니다. 영어로 조동사 ‘must’가 사용되어 반드시 거기에 가고자 하는 예수님의 의지와 주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첫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이름을 ‘게르솜’이라 지었습니다. ‘이방인’이란 뜻입니다. 모세는 미디안 땅에서 르우엘의 환대를 받았고 십보라와 결혼까지 하였습니다. 자녀까지 낳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나는 애굽인인가? 히브리인인가? 미디안인인가? 그는 자신을 ‘나그네’로 인식하였습니다. 미디안 광야 40년은 모세가 하나님을 믿고 인내하며 나그네 인생을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자아가 죽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간이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모세가 이 기간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하여 참았다고 해석하였습니다(히11:27). 나그네는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정체성입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이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습니다. 그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24,25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하나님은 그 고통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언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공적인 약속’입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나의 백성이 된다”(6:7)는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는 것입니다.(창15:14; 46:4a). 이 언약을 기억하신 하나님은 그들을 돌아보셨고, 그들이 겪는 고난을 아셨습니다. 25절 마지막에 나오는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에서 ‘기억하셨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다’인데, ‘아셨다’는 말입니다. 송명의목자님의 출애굽기 개론에서 출애굽의 키워드가 ‘야다-아신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메시지 타이틀도 ‘들으시고 기억하시고 돌보시고 아시는 하나님’으로 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약속을 기억하시고 우리를 돌아보시고 우리의 사정을 잘 아십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와 언약을 맺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십니다. 이를 이루기 위해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일본의 소설가 엔도 슈사쿠(1923-96)의 대표작 『침묵』이 있습니다. 1600년대 일본 가톨릭이 탄압을 받을 때의 내용입니다. 소설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인간이 고통받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실제로 많은 신부가 탄압을 이기지 못해 죽거나 배교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능력을 나타내셔서 박해하는 권력자를 없애고 신부를 구원해 주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박해는 더 심해졌고, 믿음을 배신하는 사람도 더 늘었습니다. 그때 이런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는 침묵하고 있던 것이 아니다. 너희들과 함께 괴로워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모래 위의 발자국’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너무 힘들어 할 때 돌아보니 한 사람의 발자국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나아가 “주님, 주님께서는 나와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제가 너무 힘들어 할 때 주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저 혼자만 이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을 걷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저 발자국은 네가 너무 힘들어해서 내가 너를 업고 간 발자국이란다”
우리는 하나님이 침묵하지 않으심을 믿어야 합니다. 결코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아픔을 돌보시며, 우리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해 사람을 찾고 훈련하십니다. 우리 삶 속에서 경험되어지는 모든 슬픔과 고통과 쓰라림과 연약함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으시는 하나님의 선한 손길임을 우리가 알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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