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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5년 출애굽기 4강 여호와인 줄 알지라(출애굽기 5:1-7:7)2025-03-30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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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출애굽기 4강


여호와인 줄 알지라

말씀/ 출애굽기 5:1-7:7

요절/ 6:7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아는 것이 힘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식정보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지식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지만 잘못된 정보들이 넘쳐납니다. 올바른 지식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솔로몬은 잠1:7에서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세상 지식을 열심히 추구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는 무관심합니다. 이것이 인생의 비극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들에게 알기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적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5장 1절을 읽겠습니다.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그 후’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애굽으로 돌아온 모세와 그 형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여호와의 메시지를 전하고 이적을 보이자 그들이 모든 것을 인정하고 두 사람을 하나님의 일군이요 지도자로 인정한 후를 말합니다. 용기를 얻은 모세는 바로 앞에 서고자 40년만에 궁궐로 들어갑니다. 감회가 새로웠을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전한 여호와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내 백성을 보내라’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로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돌보시는 백성입니다. 바로는 이스라엘을 내보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이용해 온 노동력이며 그 땅의 자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단칼에 거부합니다. 바로와 애굽은 농경신 ‘아피스’, 태양신 ‘라’를 비롯하여 수많은 신들을 섬기는 신의 나라였습니다. ‘여호와’란 이름은 바로에게 금시초문이었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이 말을 통해 앞으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의 핵심이 무엇이 될지를 알려 준다 하겠습니다. ‘그래, 내가 누구인지 알려줄게~’ 그는 오직 여호와만이 참 신이시고 유일한 신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이스라엘과 바로와 애굽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온 천하에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바로에게 거절 당한 모세와 아론이 다시 한번 요청합니다.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3) 바로의 질문 ‘여호와가 누구?’라는 답변으로, ‘히브리인의 하나님’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을 히브리인이라 불렀는데, 그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었던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에게 나타나셔서 명령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광야 사흘길 쯤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사흘 길은 바로의 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는 거리입니다. 이는 바로가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는 요청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심판하시되 근거없이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의 거절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의 완악함을 드러내시며, 바로와 애굽을 심판하는 근거로 삼으십니다. 또한 사흘 길은 죽음과 부활의 간격을 예표한다 하겠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이 배부르고 게을러서 이런 요청을 한다고 진단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짚을 주지 말고 정해진 수의 벽돌을 만들게 하라” 혹독한 노동을 명령합니다. 벽돌에 짚을 넣지 않으면 푸석푸석하여 쉽게 깨지기에 반드시 넣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온 땅에 흩어져 곡식의 그루터기, 즉 곡식을 베고 난 후 남은 밑둥을 잘라서 짚 대신 사용하였습니다. 그래도 할당된 벽돌 수를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바로의 감독들이 히브리 기록원들을 때립니다. 이러한 보복 정책은 바로에게서 직접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알지 못한 이스라엘 기록원들은 바로에게 가서 호소합니다. 그러나 단박에 거절 당하죠. 그들은 화가 자신들에게 미친줄 알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너희가 우리를 미운 것이 되게 하였도다” ‘미운 것’이란 아주 고약한 냄새를 품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모세와 아론이 빌미를 제공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심판하고 징계해 주길 바란다는 겁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세와 아론을 환대했던 그들이 어려움을 당하자 원망하고 미워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무슨 문제가 생기면 속죄양을 찾기 쉽습니다. 캠퍼스 역사가 잘 안된다거나 내부적으로 무슨 문제가 생기면 ‘누구 때문인가?’에 초첨을 맞춥니다. 그런데 누구 때문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주권 가운데 어려움을 허락하신 것일 수 있습니다. 때론 일이 우리의 생각이나 방향과 다르게 흘러가기도 하고, 단기적으로 어떤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는 사람과 다투기보다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믿고 하나님과 씨름해야 합니다. 서로 이해하고, 인내하며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궁극적으로 그 문제도 해결이 됩니다


이제 모세도 힘들어졌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 호소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라는 대로 순종해서 했는데, ‘왜 이 모양입니까? 왜 더 악화되었습니까? 왜 당장 이 백성을 구원하지 않습니까?’ 모세는 주저앉았습니다. 40년 전 동족들에게 배척당한 것이 생각나 상처가 덧났습니다. 너무 아프고 낙심이 되었습니다. 특히 모세는 ‘내가 바로에게 들어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후로부터’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냥 있었으면 ‘中’이라고 가는데~ 괜히 나서서 더 상황이 나빠졌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바로만 하나님이 누군지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모르고, 심지어 모세조차도 하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모세는 하나님께 나아가 호소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내가 순종했다고 해서 바로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장애물에 부딪히고 실패하고 더 악화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기도할 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무얼 기대합니까? 문제 해결에 있습니다. 우리 주된 관심은 문제 해결, 문제 해결, 문제 해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심은 더 높은데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야곱이 집을 떠나 살다가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올 때, 형 에서 문제로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과거 자신이 형의 장자권을 빼앗았고, 형이 분노하여 자신을 죽이고자 할때 살기 위해 도망쳤습니다. 세월이 지났으나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형이 군대를 이끌고 마중 나온다는 소식을 듣자 두려웠고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그는 얍복강가에서 밤새 하나님과 씨름하였습니다. 새벽까지 하나님이 축복해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며 꽉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시며 도리어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시며 축복해주었습니다. 야곱은 그 곳 이름을 ‘브니엘’로 짓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란 뜻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으나 생명이 보존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야곱이 체험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알게 되었을 때, 형 에서 문제가 내면으로부터 해결이 되었습니다. 형 에서를 만났을 때 그가 말합니다.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알게 될 때, 현실 문제가 가시적으로 해결되든 안되든 그것에 상관없이 이미 문제가 해결됩니다. 


나의 신앙 생활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문제 해결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까?  특히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아, 하나님께서 나에게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더 잘 알도록 하기 원하시는구나’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고난이 오히려 유익이 됩니다.


모세의 말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하십니까? 6장 1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하나님은 이제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겠다고 하십니다. ‘강한 손’이란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바로의 손보다 훨씬 강한 하나님의 권능의 손으로 바로를 참교육 시키겠다 하십니다. 참교육 당한 바로가 두손 두발 다 들고 싹싹 빌면서 ‘제발 나가 주세요’ 사정하게 될거라는 것입니다. 역사상 노예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된 적이 있나요? 여러 나라에서 대규모 또는 소규모 폭동으로 시도를 하였지만, 인류 역사상 성공한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노예에서 해방된 경우는 다른 나라가 그 나라를 정복하여 해방시켜준다거나, 아니면 그 나라 왕이나 대통령이 해방시켜 준 경우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강한 손으로 애굽에서 구원하실 것을 예고하시면서, 그 근거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선언하십니다. 6:2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나는 여호와라’ 이 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반드시 약속을 성취하시는 영원불변의 존재자이심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트럼프가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나, 트럼프야’ 하면 안되는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높은 무역관세를 매기고 으름장을 놓으니 각 나라가 그의 눈치를 봅니다. 우리나라 모기업은 얼마 전 트럼프에게 잘 보이기 위해 미국에 수십 조원을 투자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동안 당당했던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도 조심합니다. 트럼프의 권세가 대단합니다. 하물며 ‘나, 여호와야’ 하면 ‘게임아웃’ 아니겠습니까? 그분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엘로힘’,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보이셨습니다. 이들이 약속을 받았지만 실현되는 것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단지 믿음으로 멀리서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강한 손이 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약속하신 것을 이루는 것을 모세와 이스라엘이 보고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영생과 하늘의 기업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강한 손으로 반드시 약속을 이루실 것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10:28,29)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바라보며 우리가 이 세상의 문제들에 일비일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6-8절까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구원의 내용이 무엇인지가 나옵니다. 5가지입니다. 1) 괴로운 노역에서 해방시키신다. 2) 그들을 속량하신다. 3)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된다. 4) 그들이 구원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게 된다 5)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 


여기 보면 ‘내가’라는 말과 ‘나는 여호와다’란 말이 반복하여 나옵니다. ‘내가’란 말은 하나님께서 홀로 친히 출애굽 역사를 이루실 것을 예고합니다. “모세~ 네가 하는 것 아니니까 걱정마. 내가 다 할거니까, 넌 내가 시키는대로만 해~” 이런 뜻입니다. ‘나는 여호와다’란 말은 ‘내가 반드시 약속을 지킨다니까, 반드시 돼~’ 이런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최종 목적이 무엇입니까? 7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됩니다. 깊은 인격적 관계성을 맺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언약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요17:3은 말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이 바로 여호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구원받은 우리가 여호와를 알아갈 때 유익이 있습니다. 제임스 페커가 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책에서 세가지 유익을 말합니다. 첫째, 안전함. ‘내 아버지 그 품 안에서 내 영혼 안전합니다’ 노래 가사처럼 사망 권세가 주는 두려움과 위협으로부터 안전함을 누리게 됩니다. 둘째, 확실함. 우리는 우리 인생을 주님의 약속 안에서 확신에 찬 확실한 삶을 살게 됩니다. 셋째, 누림. 벧후1:3,4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나님을 알아갈 때 우리에게 주신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더 풍성히 누리게 되며, 이를 통해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그의 인생의 목적을 그리스도를 아는데 두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9a)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망해가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6:3) 나에게 혹시 어떤 어려움이 있지는 않습니까? 이 나라가 망해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럴 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여호와께로 돌아가 그를 힘써 알고자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모세는 먼저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시 바로에게 가서 말하라 하십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도 듣지 않는데, 바로가 듣겠습니까? 나는 입이 둔한 자입니다” 합니다. 하나님은 ‘입이 둔하다’는 모세의 말에 이미 답을 주셔서 형 아론을 대언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금 자신의 부족함을 토로합니다. 


이후 갑자기 모세와 아론의 족보가 나옵니다. 족보는 보통 내용의 전환점에서 나옵니다. 여기서는 무얼 말하고 싶었을까요? 여기 족보를 보면 입애굽한 레위부터 시작하여 고핫, 므라리, 출애굽한 모세와 아론까지 4대가 나옵니다. 이는 출애굽이 4 대만에 애굽에서 나오리라는 언약의 성취요.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또한 이 족보는 레위 지파가 중심입니다. 레위는 어떤 사람입니까? 야곱이 임종시 12지파를 위해 기도할 때 저주에 가까운 기도를 받은 지파입니다. 창49:5-7절이 그 내용인데, 7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저주를 받을 것이란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이랬던 지파가 가장 복된 지파가 됩니다.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의 영적 장자가 됩니다. 땅을 분배받을 때 따로 기업을 받지 않고 이스라엘의 대표로써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만을 섬기는 지파가 됩니다. 이런 축복을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므람과 요베겟등 레위 후손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들었기 때문입니다. 가계의 저주가 그치고 가계에 축복의 물줄기가 그 후손들에게 끝없이 흐르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서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고,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출20:5,6)’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참으로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족보 앞뒤를 보면, 12절과 30절에 반복하여 모세가 한 말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란 말이 나옵니다. 모세는 입이 둔하다며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지만, 하나님은 그 약한 자를 강한 자로 능히 만들어 쓰심을 말한다 하겠습니다. 7장 1,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로에게 신같이 되게 하시고 아론은 대언자가 되게 하십니다. 신의 아들이라는 불리우는 파라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모세를 신으로 보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고 하셨습니다(요10:35). 그만큼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섬기는 사람의 권위를 높여 주십니다. 우리는 말씀을 맡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나 존귀한 직분, 복된 소명을 받았는가 알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 안에 말씀이 살아 있을 때 영적 리더쉽이 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노예 백성 이스라엘을 무엇이 되게 하십니까? 6:26, 7:4을 보면 ‘군대’가 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보십시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내는 민족 아닙니까? 끊임없이 하나님과 모세를 배반하고 불평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노예가 아니라, 오합지졸이 아니라, 군대라 하십니다. 


출애굽의 과정은 순탄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의 마음이 수시로 완악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만드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왜 입니까? 애굽에 여러 큰 심판을 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조급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결코 서두르지 않습니다. 충분히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까지 인내하며 기다리십니다. 7장 5절을 읽겠습니다.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 하나님은 애굽, 즉 세상이 마침내 여호와인 줄 알게 하십니다. 세상의 참신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음을 알고 그 분 앞에서 두려워 떨며, 회개하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을 살펴보길 원하십니다. 


모세와 아론은 점점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순종합니다.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 모세는 팔십 세였고 아론은 팔십삼 세였습니다. 80세면 은퇴할 나이입니다. 노후를 즐겨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부르시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젊은이도 좋고, 중년도 좋고, 노인도 좋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그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자는 나이와 상관없이 복된 인생이 됩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친히 출애굽 역사를 진두지휘하십니다. 당장 구출해낼 수 있는 능력이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가 누구인지 알리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바로와 애굽 사람, 그리고 우리들에게까지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추기가 쉬운데 더 높은 차원인 하나님을 알아 가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하겠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주님이 주시는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누리는 복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